〈 38화 〉지옥으로 가는 계단 (1)
지금 집안에 최대갑의 식구들은 없다.
유신 시절 내무부 장관을 지낸 이의 딸이라는 최대갑의 아내는 2층에서 각방을 쓰고 있다.
딸이 셋, 아들 하나!
아들 하나가 바로 망나니 최욱 님이시다.
최대갑은 자신의 방에 누구도 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아내는 물론이고 자식들도 감히 방을 기웃거릴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들었다.
단 한사람, 자신의 막내딸만이 예외란다.
왜 자신의 가족들에게조차 철통같은 보안을 지키고 있는 걸까?
아내와는 이혼을 고려하고 있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단다.
최대갑의 난봉꾼 기질은 유명하지만 그 아내 되시는 분도 만만치가 않단다.
남성편력이 대단하시단다.
1층에는 최대갑의 마누라 방이, 2층에는 딸들의 방이, 3층이 최욱의 방이다.
그리고 4층에 최대갑의 방이 있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최대갑이 있는 4층 까지 가야 한다.
그러면 기회가 생길 것이다.
운명의 여신이 단 한 번의 기회 정도는 나에게 허락할 것이다.
그 기회를 잡으면 된다.
지옥으로 가는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냐!"
나를 발견한 놈이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 고수는 아니다.
겁 먹은 개개 크게 짖는 법이다.
이 놈을 뚫고 올라가야한다.
날아오르듯 계단을 치고 올라가서는 놈의 턱에 펀치를 날렸다.
놈이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집안 곳곳에 짱박혀 있던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생각보다 그 수가 많다.
다행인 것은 칼을 든 놈이 없다는 것이다.
최대갑의 딸들이 사시미 칼을 보고 기겁을 한 적이 있어서 가택 내부의 경호원들이 몸에 칼을 지니는 것을 엄금하고 있다고 들었다.
소문 대로다.
나는 독기가 오를데로 올랐고 손에 칼이 없는 폭력배들은 덩지 큰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무자비한 주먹질로 놈들의 앞선을 무너뜨리자 방어선이 와해된다.
두목인 김상사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최 회장 놈의 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특기인 재크 나이프를 손에 쥐고서 말이다.
회장을 해치려는 침입자가 있다는 소식이 밖으로 전해진 것일까?
검은 양복을 입고 야구방망이, 목검, 일본도 등으로 무장한 수십 명의 사내들이 뒤늦게 집안으로 들이닥친다.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는 어차피 외길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죽는다.
악착같이 올라가서 최대갑 회장 놈에게로 가면 된다.
그쪽이 차라리 허술하다.
최 회장의 방 앞을 두 놈이 막아선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빠르다.
제대로 운동을 한 놈들이다.
몇 대 맞았고, 몇 대 때렸다.
다행히 크게 휘두른 내 훅에 한 놈의 턱이 깨진 모양이다.
놈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일대일 대결이라면 놈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다리가 조금 무거워졌지만 몇 차례의 난타전 끝에 최 회장놈이 있는 방문을 열어제끼고야 말았다.
온 몸에 기쁨의 전율이 흐른다.
드디어 지옥 문을 열었다.
지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자들은 단 세 놈이다.
보영 그룹 최대갑 회장 놈, 그리고 비서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남자, 그리고 김상사다.
김상사만 해치우면 바로 최대갑의 멱살을 잡을 수 있다. 서
둘러야 한다.
아래층에서 굶주린 개떼들이 몰려오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우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다문 몇 분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한다.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김상사가 양 손에 단검을 들고 나를 막아선다.
방검복을 입고 팔에 보호대를 착용하기는 했지만 그 방어력에 큰 기대는 말아야 한다.
김상사의 칼날이 제대로 내 몸에 꽂히면 그대로 끝이다.
시간을 끌어도 나의 패배다.
방문은 오래지 않아 열릴 것이다.
자신의 주인 앞에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칼솜씨를 너무 믿은 것일까?
나보다도 김상사가 더 서두른다.
몇 번이나 현란한 칼춤을 추며 나를 압박한다.
이런!
피한다고 피했는데 상처를 입고 말았다.
피가 튀긴다.
괜찮다.
조금 긁힌 정도다.
이 정도로 안 죽는다.
김상사 놈의 기세가 오른다.
나와의 거리를 좀 더 좁혀도 된다고 판단하고는 슬슬 몰아붙인다.
코앞으로 놈의 칼이 지나간다.
서늘한 바람이 인다.
이제 내 차례다.
놈의 코앞까지 벼락같은 러쉬를 했다.
놈의 얼굴에 당혹감이 보인다.
그것으로 끝이다.
원투 스트레이트가 놈의 턱과 인중에 정확히 꽂힌다.
쓰러지는 놈의 몸통에 사커 킥을 먹였다.
발끝에 감기는 묵직한 느낌이 좋다.
김 상사 놈은 당분간 병원신세를 져야 한다.
그대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최회장 놈에게 돌진한다.
이제 되었다.
놈의 멱살을 잡고 몇 대 쥐어박아 줄 것이다.
그리고는 자백을 받아내련다.
민예린을 죽인 전말을 말이다.
내 품속에는 작은 녹음기가 있다.
그녀의 일기와 놈의 자백을 신문기자에게 넘기면 된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 다음은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법이다.
내 손에 최대갑의 멱살이 찰지게 잡힌다.
이제 내 스트레이트를 놈의 면상에 꽂아주면 된다.
너무 강하지 않게! 정신이라도 잃으면 자백을 받을 수 없으니까!
너무 약해도 안 된다.
그정도로는 내 분이 도저히 풀리지 않는다.
내 가슴이 터져서 내가 먼저 죽을 지도 모른다.
"어이! 강석현! 움직이지 마! 이건 장난감 총이 아니야!"
내 관자놀이에 차가운 금속체의 육중함이 전해진다.
총이다.
최 회장의 옆에 있던 놈은 비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먹이 운다.
이대로 거침없이 주먹을 질러버릴지 몇 번이나 고민하고 있다.
내게 총을 겨눈 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길 놈이다.
놈은 킬러다.
"바, 박 실장! 빨리 놈을 쏘아 버려요."
"잠깐! 이야기나 좀 들어 봅시다."
"이야기는 무슨! 이놈은 나를 죽이려고 가택침입까지 한 놈입니다. 쏴 죽여도 되요. 정당방위라니까?"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놈이 박 실장인 모양이다.
놈은 최대갑 회장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는다.
최대갑 놈의 부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역시 무모했던가?
운이 따라준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계산이 잘못 된 모양이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고 말았다.
나의 착각이었다.
대한민국의 재벌은 장난이 아니다.
맨주먹으로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총이라니!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복싱이건 싸움이건 마찬가지다.
상대가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면 대책이 없다.
준비는 링 위에 오르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이다.
링 위에서 적의 강함을 느낀 순간에 진 것이다.
난 패배했다.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강석현 씨! 나는 기관에서 나왔어. 대한민국의 안보를 담당하는 기관 말이야.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 하는 말에 솔직히 답을 해 줘야겠어. 나한테 협조하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해!"
웃기는 소리다.
협조해도 살아나가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런데 기관이라면 어딜까?
경찰?
검찰?
중앙정보부?
국가의 안보를 담당하고 있다면 중앙정보부가 맞나 보다.
참, 이름이 안기부로 바뀌었던가?
"민예린의 일기장 어디 있어!"
점점 더 웃기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민예린, 그녀의 일기장 때문에 국가 안보가 흔들린다는 건가?
농담이 지나치다.
"박 실장! 저 놈만 죽이면 되요. 강석현이 말입니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최대갑은 나를 빨리 죽이라고 박실장이란 놈을 재촉한다.
아쉽다.
이렇게 총에 맞아 죽을 줄 알았으면 그때 최 회장 놈의 얼굴에 마지막 펀치라도 먹였어야 했는데!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이젠 늦었다.
문은 열렸고 검은 양복을 입은 놈들이 최대갑을 둘러싼다.
아쉽지만 후회는 없다.
누군가 급히 뛰어들더니 박 실장이란 놈의 귀에 뭐라고 속삭인다.
놈이 당혹스러워하는 것이 나에게까지 전달이 된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강석현 풀어줘야 합니다."
"아니, 박 실장! 그게 무슨 소리요?"
"윗선의 지시입니다. 강석현 씨! 여기서 있었던 일 입 밖에 내면 안되는 거 알지요?"
"······."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를 살려주겠다는 건가?
"박 실장! 그건 안 되지! 뭐하러 우환거리를 그냥 둔단 말이요? 안기부가 나서기 그렇다면 내가 하겠소. 강석현 저 놈은 어디 파묻어 버리면 되고, 민예린의 일기장은 언론사 편집장들 불러다가 입에다 돈다발 하나씩 물려주면 절대 풀릴 일 없어요!"
"민예린이 청와대에까지 제보를 했습니다."
"그, 그런! 미친 년!"
"이쯤에서 수습을 하시지요."
"내 최대갑의 체면이 있지 어떻게······."
"최 회장님!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겁니까? 강석현 저 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기자들에게 일기장과 동영상을 뿌리겠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민예린이 말입니다."
"말했지 않소! 언론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입막음을 해 보겠소."
"문제는 국내 언론이 아니에요. 외신에도 제보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5공 청문회니, 5.18 청문회니 해서 정국이 시끄러운데 이 문제까지 터져 봐요! 최 회장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민예린의 배후를 족쳐보면 누가 제보를 하는지 밝힐 수 있을 거 아니오?"
"이미 죽은 민예린을 무슨 재주로 족친단 말입니까?"
"······."
"우선 급한 불을 꺼야 합니다. 한창 국익을 위해 일하고 계신 분들이 다칠지도 모릅니다. 그분들은 최 회장이 이 사태의 빌미를 준 것에 대해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각하께서도 아시게 된다면 그 불똥이 최 회장께도 튈지도 모릅니다."
"······."
"강석현만 무사하다면 언론에 뿌리지 않겠다고 했으니 협박치고는 얌전한 편이지요!"
"······."
최대갑이 침묵을 지킨다.
나를 이 자리에서 총을 쏘아 죽이고 싶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뒤탈이 걱정되는 것이 아니라 박 실장이 두려운 것이다.
아니, 박 실장 뒤에 있는 유력 인사들의 분노를 감당할 힘이 없는 것이다.
"강석현 씨? 석현 씨는 운이 좋아요! 여복은 아주 타고 났어!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떤 여자가 죽어가면서까지 남자 목숨을 지키려고 한답니까? 나는 석현 씨가 아주 부러워요. 같은 남자로서 말이에요. 물론 앞으로의 팔자는 대단히 사나와지겠지만!"
박 실장이 능글맞게 웃으면서 분노로 이글거리는 내 눈을 쳐다본다.
"뭐해요? 어서 도망가지 않고! 쥐새끼처럼 잘 숨어 봐요! 민예린의 일기장과 비디오테이프가 수거되는 즉시 강석현 씨를 찾아낼 겁니다. 그때까지는 살려 드리지요."
"······."
"그런데 강석현 씨가 숨을 곳이 있을까요? 한국에? 나 같으면 월북이라도 하겠다. 혹시 압니까? '김일성 만세!' 하고 외치면 북쪽에서 영웅대접이라도 받게 될지. 흐흐흐!"
박 실장이란 놈을 향한 살의(殺意)를 느꼈다.
허망한 감정이다.
나의 무력함을 박 실장 저놈에게 돌려보았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복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남들보다 조금 센 주먹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진짜 힘을 가져야 한다.
재력과 권력!
그것이 진짜 힘이다.
그것을 가져야 복수를 할 수 있다.
민예린, 그녀는 자신이 가진 카드를 이용해서 자신의 자유와 내 국가대표 자리를 지키려 한 것이다.
그 카드는 충분히 위협적이었고 놈들은 그녀에게 자유를 주는 대신 영원한 침묵을 강요했다.
그리고 이제야 알겠다.
민예린은 마지막까지 나만을 걱정하고 있었다.
변을 당하기 전에 이미 나를 위한 안전장치를 설계해 두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 강석현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만약 민예린이 살아있었으면 놈들이 어떻게 대처했을까?
민예린을 납치하고 협박해서 기어이 일기장과 비디오 테이프를 회수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예린은 죽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속수무책이다.
민예린이 어떤 경로로 일기장과 비디오테이프를 배포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사자(死者)는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민예린을 죽여 입막음을 하려고 했던 최회장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녀는 죽음으로 나 강석현을 사지에서 끌어 올린 것이다.
내 목숨 값이 정말 비싸다.
어떻게 해야 내 목숨값을 다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그녀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까?
차라리 여기서 최회장 놈을 죽이고 나도 죽어 버릴까?
아니다.
그것이 가장 비겁한 짓이다.
민예린이 가장 바라지 않는 행동이다.
살아야 한다.
기어이 살아남아야 한다.
김상사 파 놈들이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째려본다.
쪽수만 믿을 뿐 용기도 없는 겁쟁이들이다.
놈들을 하나 둘 헤치며 최대갑의 저택을 서서히 빠져나가야 한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무도 모르게 잠적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생각해 내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