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민예린의 일기장 (4)
나 민예린은 누구일까?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걸까?
강석현이란 사내에게 빠져든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러면 안 된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보영그룹 회장 최대갑의 숨겨둔 여자였다.
그 남자의 삐뚤어진 자존심을 잘 알고 있다.
나 민예린이 아무리 잊혀진 여자이고 자신이 버린 여자라 하더라도 내가 먼저 자신을 떠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 빼앗기고 말 것이다.
꿈을 포기하는 대가로 받은, 내 몸값으로 받은 알량한 재산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아 갈 것이다.
어쩌면 돈을 빼앗아 가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산 넘어 산이다.
늑대를 피하니 호랑이가 나타난다.
최대갑의 아들 최욱이 놈이 나에게 치근댄다.
이 놈이야말로 말 못할 변태다.
컴플렉스가 있는 놈이다.
오디푸스 컴플렉스 말이다.
내가 자신의 아비인 최대갑의 여자라는 사실이 놈의 정욕에 불을 붙인 것일까?
내가 석현이와 사랑에 빠진 후 부터는 더더욱 집요하게 내 몸을 노린다.
자신을 세상의 왕이라고 착각하는 최욱이다.
결사적으로 최욱을 거부하던 내가 강석현을 유혹한 것이 놈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불안하다.
이제 나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불똥이 강석현, 그 아이에게 튈지도 모른다.
순수한 남자다.
복싱 밖에 모른다.
처세를 위해 고개 숙일 줄도 모르고 돈이 얼마나 무섭고도 좋은 물건인지도 모른다.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려는 남자이다.
내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그리움일까?
자꾸만 이 남자에게 빠져든다.
꿈에도 몰랐다. 강석현과 사랑에 빠질 줄이야!
나를 가지고 놀고는 내팽개친 남자에 대한 복수심이었을까?
매력적인 육체를 가진 어리고 순수한 영혼에 대한 욕정이었을까?
아니면 최욱과 거래를 하면서도 결코 자존심을 굽히지 않던 애송이 복서의 그 오만한 눈빛에 반한 것일까?
아무려면 어떤가?
그와 사랑을 나누는 순간은 무엇보다도 행복했으니까! 그
는 내 몸을 거쳐 간 어떤 남자도 주지 못했던 쾌락을 내 몸에 선물했고, 여자로서 사랑받고 있다는 마음의 위안도 주었다.
거기서 멈춰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그를 꼬옥 끌어안고는 놓아주지 않는다.
나에게 무엇보다도 큰 기쁨을 준 어리고 순수한 복싱 전사에게 악마 같은 적을 선물하고 말았다.
복싱이란 스포츠를 난생 처음 관람했다.
강석현의 복싱은 우아하다.
마치 격동적인 발레리노처럼 사각의 링을 뛰어다니며 정열을 표출한다.
그의 야성적인 힘에, 정제된 우아함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제부터 복싱 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강석현의 1호 팬이 된 것이다.
저 사내가 링을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언제까지나 보고 싶다.
최욱이 강석현에게 이빨을 드러낸다.
이빨은 강석현을 향하지만, 최욱이 물어뜯고 싶은 것은 나 민예린이다.
나를 범하고 싶은 것이다. 그
것이 자신을 빨리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는 아비 최대갑에 대한 복수라고 믿는지도 모른다.
나 같은 여자 때문에 저 우아한 복싱 전사(戰士)가 다쳐서는 안 된다.
이제 그를 놓아주어야만 한다.
내가 최욱의 손길을 피할 수 있을까?
피하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잃게 되는 것일까?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나는 철부지 소녀가 아니다.
나는 민 마담이다.
지킬 것은 지키고 줄 것은 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얻어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전자상가에서 일제 볼펜을 하나 샀다.
아무도 모르게 녹음을 할 수 있는 앙증맞은 물건이다.
"민예린! 내가 너를 얼마나 원하는지 너는 모르지?"
"이러면 안 돼! 난 너의 아버지의 정부였어. 최대갑 회장이 최욱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웃기지 마! 너만 입 닫으면 아무도 몰라! 설령 꼰대가 안다고 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뿐인데 꼰대가 어쩔 거야? 보영 그룹을 다른 놈 손에 넘기진 않을 거 아냐?"
"안 돼! 손대지 마! 내 몸에 손대면 소리 지를 거야!"
"어쭈! 강석현 그 새끼한테는 아낌없이 주더니, 나한테는 못주겠다 이거야? 내, 기가 막혀서!"
"웃기지 마! 강석현이 최욱보다는 몇 백 배 나은 남자야! 너 같은 놈하고는 비교도 안 돼!"
"이 시발년! 감히 나를 모욕해? 미래에 대 보영 그룹 회장이 될 최욱을 그런 거렁뱅이 놈과 비교질을 해? 민예린 네년을 오늘 죽여 버릴 거야!"
"아악!"
최욱이 내 얼굴을 때렸고 나는 그 자리에 쓰러진다.
짐승이 내 몸을 덮친다.
내 스타킹과 팬티를 벗기려 한다.
저항해야 한다.
필사적으로 버틴다.
최욱이 내 스타킹을 쩢어버린다.
수컷의 광기다.
섬찟하다.
내 팬티가 갈갈이 찢긴다.
"이거 보이지? 조금 전까지는 네 보지 가리개! 지금은 걸레!"
도저히 예측이 되지 않는 놈이다.
미치광이가 두렵다.
"민예린 네가 걸레라는 건 이미 세상이 알고 있어!"
"......"
"걸레 민예린이 우리 꼰대랑 술 마시고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안단 말이야! 돈만 주면 어떤 놈들이랑 벼라별 짓도 다 하면서 나는 왜 안 된다는 거야! 엉?"
최욱이 내 블라우스를 벗긴다.
벗기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로 찢어 버린다.
오래지 않아 나는 완전한 벌거숭이가 되었다.
가장 내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 짐승 같은 놈의 눈 앞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손으로 내 몸을 가리려 들지 않을 것이다.
짐승에게 물릴 지언정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놈은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나를 희롱하며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비와 아들이 닮았다.
똑 같은 짐승들이다.
고개를 숙이면 안된다.
눈을 내리깔면 안된다.
맞서서 싸워야 한다.
그래야 놈이 약점을 드러낸다.
최욱이 내 다리를 벌리고는 내 음부에 얼굴을 파묻는다.
저항을 멈추고는 다리를 벌려 주었다.
도마뱀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내 속살을 헤집는다.
뿌직 거리는 음탕한 소음이 내 귀를 괴롭힌다.
짐승같은 놈의 신음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욕망의 노예가 된 놈이 이제 내 몸 위에 올라탄다.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놈의 성기를 내 몸 속에 받아들인다.
나는 시체처럼 누워서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오래지 않아 놈이 헉헉거리기 시작한다.
"민예린! 씨발년! 졸라 쫀득쫀득하네!"
"내가 잘 하지? 우리 꼰대보다 훨씬 잘하지? 억! 흐억!"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와 함께 놈과의 정사는 끝이 난다.
놈은 쉴 새 없이 내 귀에 다대고 내 이름을 부르며 쌍욕을 곁들이더니 이제 내 몸 위에 추욱 늘어져 버린다.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나는 민 마담이다.
아마 녹음이 잘 되었을 것이다.
내 몸을 내어주고 무기를 손에 쥐련다.
***
"그래! 나는 걸레 맞아! 니 애비랑 별 짓 다해 봤어. 최대갑 회장이 높으신 손님을 데려오면 그놈이랑 셋이서 섹스를 했어. 너 애비도 함께 말이야! 그 뿐인 줄 알아?"
"······."
"너도 외국물 먹었으니, 스와핑(swapping)이 뭔지는 알겠네? 나 민예린이 최대갑 회장이랑 함께 잔 사람들 이름 한 번 이야기 해 줄까?"
"......"
"국회의원 김성철, 국방부 장관 조철환, 그리고 검찰총장..."
"이, 이년이 미쳤나?"
"최대갑 회장은 카메라를 몰래 설치하고는 촬영을 해 두었어. 변태라서 그랬을까?"
"······."
"물론 최 회장 변태 맞아. 하지만 그 비디오는 최회장에게는 보험용이지. 유력인사들에게 뇌물 먹이고는 섹스 비디오까지 찍어 둔 거야."
"민예린, 마, 만나서 이야기 하자!"
"이제 너랑 만날 일 없어! 그리고 최욱 네가 알아둬야 할 것이 있어. 나는 소형 녹음기를 가지고 다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데?"
"최욱이 네가 나를 겁탈한 날에도 물론 가지고 있었지. 네 꼰대가 알면 너를 그냥 두지 않을 걸? 다른 건 몰라도 최 회장이 여자 문제는 확실한 사람인거, 알지?"
"그, 그건 진짜 안 돼! 꼰대가 알면 나를 죽일지도 몰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나도 알아! 그래서 녹음을 한 거야! 사실 최대갑이 아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왜, 왜 그래? 민예린 네가 바라는 게 뭐야? 돈? 얼마면 돼? 액수를 말 해 봐!"
"돈은 필요 없어. 강석현 건드리지 마! 그리고 이제 나를 찾지 마! 최욱 너든, 네 애비든 다시 한 번 나를 건드리려 한다면 내가 녹화 해둔 비디오 세상에 뿌려 버릴 거니까! 네가 나를 겁탈했던 거 녹음해둔 테이프는 특별히 네 꼰대한테만 보낼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미, 민 마담! 민예린!"
최욱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시끄럽게 윙윙 거린다.
더 이상 놈의 목소리를 듣기 싫다. 구역질이 난다.
이제 최대갑, 그 인간과 끝장을 보아야 한다.
기나긴 악연을 이제 끝내고 싶다.
그 인간이 순순히 나를 놓아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카드가 있다.
목숨을 걸고 싸우면 나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자유의 몸이 되면 조용한 바닷가로 가려고 한다.
거기서 바닷바람에, 파도에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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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민예린 그녀가 쓴 일기의 마지막 부분이다.
용감한 여인이다.
민예린은 나 강석현 같은 겁쟁이는 상상도 못할 용기를 가지고 자신만의 전장으로 당당히 나아갔다.
그리고는 산산이 부서졌다.
싸워야 할 때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이가 진정 용기 있는 자다.
내가 지금 아무리 열심히 싸운다한들 그녀의 용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다.
그래서 그녀의 반 만큼의 용기라도 가지고 있음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다.
겁을 먹은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인 최대갑의 안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것일까?
최욱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단히 잘 협조해 준다.
최욱의 차를 함께 타고 최욱의 집으로 너무도 쉽게 들어오는데 성공하였다.
최욱도 내 속셈을 알아챈 것이다.
내 최종 목표는 최대갑이고 그에게 다다를 때까지는 결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피차간에 적당한 딜이 암묵적으로 행해진 것이다.
말 그대로 저택이다.
집에 엘리베이터까지 있다.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 최대갑의 방이 있다.
지은 죄가 많은 것인지 집 안에 경호실까지 있다.
경호를 맡고 있는 놈들은 신사동 일대를 무대로 삼고 있는 조직폭력배 김상사 파다.
한창 떠오르는 신흥 조직으로 최대갑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
놈들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칼을 사용할 것이다.
방검복을 입고는 있지만 큰 기대를 걸어서는 안된다.
놈들이 칼을 뽑기 전에 끝장을 보는 것이 가장 좋고, 일단 상대가 칼을 뽑아든다면 한 방에 잠재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개죽음이다.
최대갑의 집으로 잠입하고 나서는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최대갑의 서재 겸 거실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루트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단다.
반드시 걸리게 되어 있단다.
그렇다면 도리가 없다.
1층부터 한층 씩 한층 씩 방어망을 뚫고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최욱을 인질삼아 끝까지 가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러기엔 기동성이 너무 떨어진다.
속도를 희생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차라리 번개처럼 치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최대갑의 목줄을 움켜쥘 수 있다.
그놈을 보면 일단 때려 눕혀 놓고 볼 것이다.
그리고 자백을 받아 낼 것이다.
무모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오늘은 마음껏 무모해볼 생각이다.
그래야 죽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 같다.
민예린에게 미안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