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살인 강간 용의자
패배의 고통은 링에서 끝나지 않는다.
링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그 고통이 시작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고 있다.
온 세상이 나를 비웃는 것 같다.
비행기에서 일부러 신문을 읽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보고야 말았다.
나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가 신문에 나올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비난이 과도하다.
수면 아래에 가라앉았던 올림픽 대표 선수 교체에 관한 이야기들도 또 다시 나온다.
벌써 몇 번인지 모르겠다.
<복싱 페더급 대표 강석현! 졸전 끝에 태국 무명 복서에 완패!>
<강석현! 해외 무대에서는 통하지 않는 국내용 복서!>
<메달 획득을 위한 대승적 결단이 요구된다!>
지겹다.
지친다.
하지만 미래 일보는 집요하다.
그들은 결코 지루해 하거나 지치지 않는다.
그래서 미래 일보가 무섭다.
저들은 하이에나다.
저들은 쓰레기다.
방콕에서 서울까지는 6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몸도 마음도 피곤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억지로 잠을 청해 본다. 최 관장님이 김포 공항까지 나와서 이 패잔병을 맞아 주신다.
"잘 했어! 석현이 넌 아직 고교생이라구! 원래 맞으면서 크는 거야! 갤럭사이 그 놈이 엄청난 실력자였다며? 괜찮아!"
관장님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신다.
곁에서 민예린이 활짝 웃으며 붉은 리본을 곱게 묶은 선물상자를 내게 건넨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 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약한 놈이다.
리본을 풀고 선물 상자를 열었다.
'으악!'
상자에는 뱀이 또아리를 틀고 혀를 낼름거린다.
커다란 킹 코브라다!
그 코브라는 갤럭사이 그 놈을 닮았다.
코브라가 내 몸을 칭칭 휘감는다.
뱀을 어떻게 해 보려 하지만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는다.
내 몸을 조여드는 뱀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관장님도, 민예린도! 그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가슴이 갑갑하다.
"이제 곧 서울 김포 공항에 착륙을 하오니 승객 여러분은 안전벨트를······."
스튜어디스가 안전벨트를 하라며 나를 깨운다.
꿈이다.
괜히 마음이 심란하다.
***
최 관장님도 민예린도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
상처투성이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니 차라리 다행이다.
어쩌면 일부러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 성격을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공항까지 나를 찾아 왔다.
전에 카페에서 보았던 민예린을 빼닮은 소녀다.
그녀의 사촌 동생이다.
이름이 혜린이라고 했던가?
따라다니는 남학생들이 한 트럭이 넘는다며 나를 도도한 눈으로 쳐다보던 아가씨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소녀는 말없이 내 손을 잡는다.
소녀의 눈가에 울음이 가득하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얼마나 다급한 일이길래 그녀가 오지 않고 대신 사촌동생이 공항까지 나를 찾아온 것일까?
나를 찾는 사람이 몇 명 더 있다.
"강석현? 강석현 맞지? 잠시 우리와 같이 가 주어야겠어."
자신들의 신분을 밝힌다.
경찰이란다.
무슨 일일까?
나보다도 민혜린이 더 놀란다.
황급히 내 손을 놓고는 달아난다.
겨우 고등학교에 진학할 여학생이 무슨 죄라도 지은 것일까?
왜 경찰을 보고 저렇게 놀라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경찰들이 내 손에 수갑을 채운다.
이것이 무슨 상황일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강석현! 너, 민예린 알지?"
"······."
"강석현! 너는 민예린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야!"
경찰이라는 사람이 하는 말이 딴 세상의 말처럼 들린다.
무슨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가 죽었다고?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것인가?
거짓말이 지나치다.
그럴 리가 없다.
"민예린은 자신의 승용차에서 하의가 벗겨진 채 목이 졸려서 사망했어. 그녀의 차에서 강석현 네 지문이 나왔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증거가 있지. 민예린의 질에서 정액이 검출 되었고, 그 정액이 강석현 네 DNA 와 일치한다는 국과수 분석 결과가 나왔어!"
"······."
저들의 말에 의하면 내가 태국으로 출국하는 날 민예린, 그녀가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인 용의자로 나를 지목하고 있다.
"사건은 단순해! 용의자는 강석현 너 뿐이고. 평소 너에게 친절을 베풀던 카페 여사장을 욕보이고 그녀가 저항하자 죽인거야! 그렇지?"
"······."
"호오! 주먹질이나 하는 돌대가린 줄 알았더니 제법인데? 지금 묵비권을 행사하는 거야? 그래봤자 소용없어. 빨리 자백하고 쉬자! 응?"
난 지금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이 멍하다. 무슨 말도 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그의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도,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묵비권이란 것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제 그녀는 세상에 없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그 단초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뿐이다.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구속영장이 곧 청구 될 거라고 한다.
나는 내가 구속이 되든 풀려나든 그딴것에는 관심도 없다.
누가 민예린을 죽였을까?
왜 죽였을까?
그것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인 놈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영장은 기각 되었다.
증거 불충분이란다.
나도 몰랐는데 내 앞으로 변호사가 선임되었다고 한다.
그 변호사라는 양반과 함께 나타난 것은 뜻밖에도 민예린의 사촌 동생 민혜린이다.
"운이 좋았어요. 강석현 씨가 출국 심사장에 들어간 후에도 민예린 씨가 생존해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그 증언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죄를 덮어 쓸 뻔 했지요. 여기 민혜린 양이 강석현 씨를 위해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것을 경찰에 진술했지요. 가, 강석현 씨, 어디 가십니까?"
아무튼 이제 무죄가 입증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하기로 마음먹었던 일을 하면 된다.
내 뒤를 따라 뛰어오는 이가 있다.
민혜린이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예린의 그것이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린다.
"이것 받아요! 예린 언니가 오빠한테 이것 꼭 전해야 한다고 신신 당부한 거야."
종이봉투가 제법 두툼하다.
책일까?
아니면 노트?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늦으면 기회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마음이 자꾸 급해진다.
"예린 언니는 복수 같은 건 하지 말라구 그랬어! 정말이에요!"
울음이 잔뜩 묻은 혜린의 목소리가 내 뒤로 멀어진다.
복수를 하지 말라구?
웃기는 소리다.
꼬맹이 아가씨가 무얼 안다고!
***
경찰이나 검사는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걸까?
민예린을 죽일 사람은 세상에 두 명 밖에 없다.
보영 그룹 회장 최대갑과 그의 아들 최욱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 두 놈을 찾아가서 실토를 받아 낼 것이다.
증거가 있냐고?
나는 그런 것은 모른다.
하지만 그놈들이다.
확실하다.
증거는 그놈들이 토해내게 할 것이다.
"김광수!"
"가, 강석현! 네가 웬일로······. 우욱! 우엑!"
광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내 주먹에 배를 얻어맞고 땅바닥을 뒹군다.
"최욱이 어디 있어?"
"모, 몰라!"
녀석의 멱살을 잡고 사정없이 뺨을 갈긴다.
"지, 진짜 몰라! 나 같은 피라미가 최욱 선배가 어디서 유흥을 즐기는지 어떻게 알겠어? 진짜야!"
"그럼, 박태식이는 어디 있어?"
"······."
광수 놈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녀석의 턱을 박살낼 것이다.
"서, 석현아! 마, 말할게! 때, 때리지 마!"
겁에 질린 광수가 입을 열기 시작한다.
박태식은 최욱이 어디에 있는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다음은 박태식의 차례다.
박태식도 모른다면 그 다음 놈을 대단히 거칠게 다루어 줄 생각이다.
나는 오늘 밤이 가기 전에 최욱 놈을 내 앞에 꿇어앉히고 말 것이다.
그리고 사흘 안으로 보영 그룹 회장 최대갑도 내 앞에 꿇릴 것이다.
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내게 남긴 물건을 확인하고 말았다.
민혜린이 나에게 건내준 보따리!
그것은 민예린의 일기장이었다.
꿈 많은 연예인 지망생이었던 때부터 바로 며칠 전 까지 일을 그녀는 꼼꼼하게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가 내게 남긴 최후 진술을 읽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정했다.
세상에는 나쁜 놈들이 많다.
그 많은 나쁜 놈들 중에서도 최대갑과 최욱은 악질이다.
그놈들을 용서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놈들을 딱 반만 살려 놓을 것이다.
어쩌면 두 놈을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살인은 자제하려고 노력만은 해 볼 생각이다.
아주 조금만.
나는 악마가 될지도 모른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