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지옥으로 가는 전야제 (2)
일단 출발은 순조로운 편이다.
1회전, 2회전을 거쳐 3회전 까지 모두 가볍게 승리를 거두었다.
몸도 가볍고 특별히 아픈 곳도 없다.
국제 경기도 걱정했던 것 보다는 할 만하다.
방콕의 날씨가 덥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적응하기 어려운 점이 없다.
체중 조절도 순조롭고, 시차 적응도 큰 문제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이제 준결승전이다.
상대는 홈링에 오르는 '카오스 갤럭사이' 다.
고일상 기자가 경계해야 할 선수라고 콕 찍어준 선수다.
하지만 우리 측 코칭스태프 들은 갤럭사이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복싱 경력이 일천한 킥복서 출신으로만 알고 있다.
그의 경기를 지켜 본 코치는 그를 대 놓고 무시한다.
"느려! 완전 거북이야! 강석현의 발을 따라잡지 못할 거니까 천천히 포인트 중심으로 가면 문제없어!"
"펀치력과 맷집은 어떻습니까?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진 선수라고 들었습니다."
"어쭈? 강석현 네가 국가대표 코치들을 가르치려 들어? 건방진 놈!"
"······."
"걱정하지 마! 놈은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간헐적으로 휘두르는 왼 손 훅 밖에 없는 놈이니까!"
과연 그럴까?
직접 갤럭사이의 시합을 보고 싶었지만 코칭스태프들이 반대한다.
훈련 일정이 맞지 않는단다.
마음이 편해지지가 않는다.
어렵게 국제 전화를 걸어 본다.
민예린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다.
그녀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직 집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코칭 스텝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체중 조절부터, 시합 당일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것 까지 내 스타일대로 하는 수 밖에 없다.
불화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묘하게 호흡이 맞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승승장구해야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면 최 관장님이 내 전담 코치로 태릉 선수촌에 들어 오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는 불편해도 참아야 한다.
준결승이다.
우승까지는 두 번의 승리가 필요하지만 오늘이 사실상의 결승전이라고 보아야 한다.
갤럭사이가 링 위에 오르자 우뢰와 같은 환호가 쏟아진다.
역시 무에타이 챔피언 출신이라 몰고 다니는 관중의 수가 엄청 나다.
이 많은 관중들은 모두 갤럭사이와 나의 경기를 보러 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갤럭사이가 나를 때려눕히는 것이 보고 싶은 것이다.
링에서 마주친 갤럭사이는 바위 같은 남자다.
키는 크지 않지만 팔이 길다.
딱 벌어진 어깨에 잘 발달된 상체 근육이 예사롭지 않다.
그의 주먹이 어느 정도인지 이제 내가 겪어 볼 차례다.
내가 진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검은 별은 절대 달고 싶지 않다.
검은 별은 패배를 의미하는 복싱 선수들의 은어다.
"아마 무대는 그래도 나아! 프로 복서에게 검은 별을 단다는 것은 몇 년의 퇴보를 의미해! 패배를 당한 복서는 교통 사고를 당한 보행자와 같아. 차가 근처에만 와도 놀라서 깜짝깜짝 놀라곤 하지! 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아."
최 관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자신이 검은 별을 달고서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는지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나는 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 무대이든, 프로 무대이든!
1라운드 공이 울린다.
잽을 몇 차례 던지다가 벼락 같이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제대로 들어간 주먹인데 아쉽게도 상대의 단단한 가드에 걸리고 말았다.
상관없다.
비록 가드 위라해도 체중이 실린 원투 스트레이트를 계속 맞으면 머리가 울린다.
충격은 누적되는 법이다.
갤럭사이는 주먹을 많이 뻗는 스타일이 아니다.
한 방을 노리는 것인지 불필요한 주먹을 자제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마추어 복싱이다.
저렇게 주먹을 뻗는 것을 아끼면 포인트에서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나보다도 애송이 복서에게 지고 싶지는 않다.
한 번 더 간다.
잽에 이은 원투 스트레이트 컴비블로!
이번에는 갤럭사이가 내 스트레이트를 더킹 동작으로 교묘하게 흘려버린다.
적이 아니었으면 박수라도 쳤을 거다.
갤럭사이는 결코 느린 선수가 아니었다.
엄청난 순간 속도를 발휘할 수 있는 선수다.
대표 팀 코치들의 눈이란 것은 그다지 믿을 것이 못된다.
갤럭사이는 힘을 써야 할 때와 빼야 할 때를 본능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타고난 싸움꾼이다.
이곳은 태국이다.
판정으로 간다면?
이기기 어렵다.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1 라운드에 점수를 따 놓아야 심리적으로 쫒기지 않는다.
주먹의 속도를 올려야 한다.
내 몸이 완전히 풀렸다.
시합은 지금부터다.
쉭! 쉭!
이번에는 원투 스트레이트가 갤럭사이의 얼굴에 적중한다.
제대로 들어갔다.
분명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놈이 웃는다.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다는 듯이 웃는다.
나를 비웃는 것일까?
약이 오른다.
무기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원투 스트레이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트레이트가 통하지 않는다면 짧은 훅이나 어퍼컷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역시!
짧게 끊어 친 어퍼 컷이 제대로 놈의 몸통에 들어갔다.
놈이 충격을 받고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이 포인트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내 장기인 원투 스트레이트를 꺼내 보일 생각이다.
어?
그 순간 카오스 갤럭사이의 레프트 훅이 내 얼굴을 때린다.
천둥이 치는 줄 알았다.
갤럭사이의 주먹은 진짜다.
말 그래도 돌주먹이다.
세상이 이런 주먹이 있다는 것을 지금껏 모르고 살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급히 발을 놀려 빠져 나와야 한다.
하지만 놈이 쫒아 온다.
엄청난 순간 속도다.
도망쳐도 도망쳐도 놈이 따라온다.
등에 로프가 느껴진다.
달아날 곳이 없다.
링 사이드에 기대어 놈과 난타전을 벌였다.
분명히 유효타는 내가 더 많이 때린 것 같은데 다리가 풀린 쪽은 나다.
놈의 주먹은 엄청나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다행이다.
내 코너까지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멀다.
코치들은 나에게 힘을 내란다.
정신력이 약해서 그런 것이란다.
죽기 살기로 싸우란다.
나는 단 한 번도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최철 관장님이 보고 싶다.
2라운드가 시작된다.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씩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
다행이 시작이 좋다.
원투 스트레이트 정타가 놈의 얼굴을 강타한다.
하지만 갤럭사이 놈은 그대로다.
조금도 충격을 받지 않는다.
나를 보고는 다시 씩 웃는다.
마치 악마가 나를 보며 웃는 것 같다.
태국의 카오스 갤럭사이!
이놈은 말 그대로 악마다!
복싱을 하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아무리 정타를 맞춰도 놈은 충격을 받지 않는다.
내 주먹이 통하지 않는다!
놈이 내 주먹을 겁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놈의 주먹이 무섭다.
제대로 한 방만 맞으면 주저앉아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시합은 갤럭사이의 페이스대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내가 한 대 때리면 녀석도 한 대 때린다.
그리고 충격은 나만 받는다.
2라운드 종료를 얼마 앞두고 녀석의 훅을 다시 관자놀이 쪽에 허용하고 말았다.
'쾅!'
벼락치는 소리가 내 머리를 때린다.
정신을 차려보니 링 바닥을 기고 있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멀리서 들려온다.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 주심이 카운터를 세고 있다.
얼른 싸우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었다.
갤럭사이가 무리하게 공격을 해 오지는 않는다.
몇 번 주먹을 주고 받았고 그 사이에 2라운드가 종료된다.
역전이 가능할까?
이제 마지막 3라운드만 남았다.
내 다리는 풀려서 휘청거린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는 있지만 아마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적잖이 충격을 받은 것을.
녀석의 약점은 무엇일까?
어디를 때려야 충격을 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너무 많았다.
녀석의 훅이 다시 내 가드 위에 터진다.
가드 위에 맞았음에도 머리가 울린다.
대단한 파워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 는 없다.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어설프게 지고 싶지 않다.
산산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뭔가는 해 보고 져야 한다.
판정으로 가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기지 못한다.
녀석의 턱은 무쇠로 만든 것 같다.
몇 번이나 내 스트레이트가 적중했는데도 끄떡도 없다.
몸통도 단련이 잘 되어 있다.
단발성 짧은 펀치 몇 방을 몸통에 꽂아 넣는다고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내 주먹의 파괴력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었나?
이 정도 주먹으로 감히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었단 말인가?
주먹을 주고받았다.
둘 다 유효타를 날렸는데, 휘청거리는 쪽은 이번에도 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녀석을 진흙탕 속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난타전을 벌일 생각이다.
저런 강타자를 상대로 무모한 작전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치고받는다.
맞고 때린다.
녀석도 휘청거린다.
자꾸 때리면 충격은 누적되고 그러다보면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누적된 충격은 내 쪽이 더 컸나보다.
비틀거리는 갤럭사이를 쫓아가다 녀석이 가볍게 휘두른 펀치에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었다.
마음은 벌떡 일어나서 녀석을 쫓아가고 싶은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억지로 일어났고, 시합은 계속된다.
나머지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녀석을 억지로 쫓아다니며 마구잡이로 펀치를 휘둘렀다.
갤럭사이도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공격적으로 나왔던 것 같다.
막싸움에 가까운 복싱이 연출되었고 그것으로 시합이 끝난다.
판정은 들어 볼 것도 없었다.
카오스 갤럭사이는 강했다.
나의 완패다.
기어이 검은 별을 달고 말았다.
복싱에서는 시합에 패배하는 것을 검은 별을 단다고들 한다.
검은 별은 무섭다.
몇 년에 걸친 피나는 노력을 한 순간에 무위로 돌린다.
아니, 단 한 번의 패배로 인해 더 이상 기회를 잡지 못한 선수들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이 검은 별에 대한 대가를 이제부터 치러야 한다.
어쩌면 패배보다도 그 후에 닥쳐올 일들이 더 무섭다.
링을 내려오면서 코칭 스태프들의 싸늘한 눈빛을 보니 실감이 난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적들에게 나를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는 것을!
나는 빈털터리가 아니었다.
지킬 것이 있었다.
지고 나니 더더욱 절실해진다.
나는 절대 패배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