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재대결 ( Return Match )
낭만검객 이상훈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다.
이제껏 나를 그냥 내버려 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강석현! 너 정말 왔구나! 올 줄 알았어! 자식!"
겁이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머리가 나빠서 상황판단이 안 된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자신이 아지트로 삼고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찾아온 나를 이상훈이 반겨 준다.
이상훈이 나에게 악수를 청한다.
"강석현! 난 너에게 아무 감정이 없다. 우린 그날 철저하게 용병이었다. 과거는 잊자! 난 너를 좋게 봤다!"
나는 그의 손을 말없이 잡았다.
화해의 악수를 나눈 셈이다.
나도 안다.
그의 배려가 아니었으면 내 팔은 그날 이미 꺾어졌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박선호가 이제껏 나를 건드리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낭만검객 이상훈의 덕인지도 모른다.
"올림픽 대표에 선발 되었다면서? 대단해!"
"······."
"어디 국가대표 선수의 주먹맛을 한 번 볼까? 강석현, 어때? 그날 끝내지 못한 승부, 오늘 한 번 계속해 볼까?"
이상훈의 지시로 룸 하나가 깨끗이 치워진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나이트클럽은 을시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하다.
"오! 해 볼 마음이 생긴 거야? 좋아! 한 번 더 겨뤄 보자! 강석현 너랑은 꼭 한 번 다시 붙고 싶었어!"
이상훈은 주먹도 주먹이지만 발길질이 매섭다.
복서의 약점인 다리 쪽을 집요하게 공격한다.
발차기가 얼굴을 노리고 들어오면 그 순간 카운터펀치를 날려서 그를 쓰러뜨릴 생각이었는데, 그의 발차기는 내 하체 외의 부분은 노리지 않는다.
낭만검갬은 몸의 균형이 완벽하다.
이래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불리하게 되어 있다.
그의 발차기에 다리를 두어 차례 얻어맞았다.
마치 채찍에 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감각이 없다.
다리 공격을 계속 받으면 다리가 마비되어서 꼼짝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조금 위험 하더라도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이상훈이 내 다리에 발차기를 날리려는 순간!
허술해진 이상훈의 방어막을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레프트 스트레이트 단발이 이상훈의 턱을 때렸다.
중심을 잃은 그가 비틀거린다.
그 틈에 그의 복부에 어퍼컷이 들어간다.
필사적으로 막아보려는 그의 관자놀이에 내 짧은 훅이 적중했고 낭만자객 이상훈이 쓰러진다.
"강해졌어! 그 때보다 훨씬!"
쓰러진 이상훈에게 내가 손을 내밀었고, 낭만자객은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고 일어난다.
잠시 비틀거리던 이상훈이 이제 중심을 잡는다.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이상훈은 이제 미래일보의 박선호와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이용 가치가 떨어진 거지. 고분고분 말 잘 듣는 놈들도 많은데 굳이 나 같은 놈하고 함께 할 필요가 있을까? 진작부터 이런 날이 올 거란 걸 알았지."
"······."
"조심해! 강석현! 박선호와 새로 일하게 될 놈들은 물불 가리지 않으려 할 거야."
나도 안다.
박선호는 자신이 당한 치욕을 결코 그냥 넘어갈 놈이 아니란 사실을.
"웃기는 일이지! 여배우를 사이에 둔 재벌 2세들의 애정 행각 때문에 우리 같은 협객들만 목숨을 걸고 싸워야 되는 거야!"
"······."
"더 웃기는 것을 말해줄까? 그 계집애 말이야. 설유연이란 신인 여배우! 지금은 톱스타 반열에 올랐잖아. 알지?"
"TV 에는 자주 나오더군요."
"그 계집애를 누가 차지했는지 모르지? 박선호도 최욱도 아니야. 두 놈다 헛물만 켠 거지. 하여튼 설유연 그 년도 아주 맹랑하더라니까? 잘못하다가는 사내놈들 감정 싸움에 자신이 다칠 거 같으니까 제일 센 놈한테 붙은 거지."
"네?"
"고 계집애가 최욱이랑 도망치다가 최욱에게서도 달아났어! 그러고는 그 길로 박상영한테 달려 간 거야!"
"······."
"강석현! 너는 박상영이 누군지 몰라? 미래 일보 사장님! 박선호의 작은 아버지 말이야."
"······."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탁월한 선택이었어. 처음에는 젊은 재벌들이랑 연애 비슷한 걸 꿈꿨겠지만 그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잖아? 바로 깨닫고는 늙은 박상영에게 몸을 갖다 바친 거지! 확실히 연예인이 스폰서를 물려면 나이는 좀 많아도 확실히 센 사람이 좋더라고! 그러고서는 주말 드라마 주연 자리 떠억하니 차지하고는 승승장구 하고 있잖아? 아! 우리 아우님은 이런 이야기는 관심 없으신가?"
이제야 알았다.
설유연 그녀의 눈물의 의미를!
세상이란 놈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예쁜 여자에게나, 무식하게 주먹만 쓸 줄 아는 남자에게나······.
"세상이 변했어. 주먹 하나로 세상과 맞서던 협객들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어. 나 이상훈이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은 이제 보니 철 지난 낭만에 불과해! 이젠 사시미 칼의 시대야! 그리고 돈의 시대고! 돈을 가진 놈이 뭐든 다 가지는 엿같은 시대가 온 거지······.!"
"······."
"나는 이제 전주(錢主)가 떨어졌으니 스폰서 떨어진 여배우 신세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자존심 죽여가면서 더 이상 전주 비위맞추며 주먹 휘두를 생각은 이제 없어."
"······."
"복싱이란 게 힘든 거야! 제 아무리 출중한 실력이 있어도 돈과 운이 받쳐주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해!"
"저도 압니다."
"하! 우리 아우님께서 벌써 세상을 배우셨군! 그런걸 모르면서 사는게 행복한건데 말이야."
"······."
"버틸 만큼 버티다가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겠거든 나 이상훈에게 와라! 나는 내 패밀리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는 놈이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낭만자객 이상훈은 지금 나에게 건달이 되라고 유혹하는 것이다.
"알아! 내가 우리 아우님 마음을 잘 알지! 나도 석현이 너 나이에는 그렇게 대답했으니까!“
“......”
“내 말은 그냥 마음속에 묻어 두기만 해! 지금은 나에게 온다고 해도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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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대표 선발전 재대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지난 선발전 우승자인 나 강석현과 준우승자인 김영호의 재대결이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이제 잊어야 한다.
오늘 이기는 사람이 페더급 한국 대표 자격으로 서울 올림픽에 나간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여론이 끓어올랐다.
<한국 복싱 어디로 가는가?>
<국제 대회 한 번 참가한 적 없는 국가대표 선수!>
<단 한 번의 대결로 결정되는 국가대표 선발! 과연 문제는 없는가?>
<서울 올림픽 유력 금메달 후보인 복싱의 김영호! 정작 대표선발에서는 제외!>
<아직 늦지 않았다. 대표선발 포인트제가 답이다! 국민들도 그것을 원한다!>
<지금은 전략적 판단이 필요할 때!>
미래일보는 항상 말한다.
자신들이 기사를 쓰면 그것이 곧 여론이 된다고.
그리고 그 여론이라는 것은 힘이 세다.
오래지 않아서 모든 언론이 복싱 국가대표 선발전의 모순(?)을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강석현을 국가대표에서 제외하고 김영호를 뽑으라며 전 국민(?)들이 입을 모은다.
"지랄하네! 국민들에게 누가 물어봤다고 심심하면 국민을 들먹여? 선발전까지 버젓이 치러서 대표를 뽑아 놓고선 이제 와서 대표선수를 바꾸자는 게 말이 돼?"
최 관장님이 불같이 화를 내지만 불행히도 최 관장님은 미래일보가 말하는 국민에 포함되지 않는 모양이다.
관장님의 말씀을 보도하는 언론은 한 군데도 없다.
고일상 기자가 나와 관장님의 인터뷰 기사를 작성했지만 정작 신문에는 실리지 못한다.
그나마 절충안으로 나온 것이 재대결이다.
최 관장님은 결사적으로 반대하셨지만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 있었다.
김영호와는 재대결이든, 재재대결이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시합을 비공개로 하잖다.
복싱 관계자들과 언론만 불러 놓고 시합을 해야 한단다.
관중들이 너무 많으면 이런저런 잡음이 나올 수 있고, 그런 잡음은 국민의 총화 단결에 대단히 좋지 않다는 높으신 분들의 정무적 판단이란다.
거기다 시합장소는 S체대 체육관이다.
S체대 관계자들이 경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수고를 아끼지 않으실거란다.
"아주 지랄을 무더기로 하는구먼! 이건 대놓고 승부 조작을 하자는 것 아냐! 이래서 재대결을 받아들이면 안된다니까!"
최 관장님은 아주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울 기세다.
하지만 시나리오는 이미 나왔고 배우들은 충실하다.
정해진 각본대로 흘러간다.
참! 시나리오는 미래일보에서 써 준 모양이다.
아주 눈물겹다.
재대결 일정도 두 번이나 바뀌었다.
내 컨디션을 망치려는 속셈이라고 관장님은 말씀하신다.
다행이 계체량을 무사히 통과 했다.
평소 체중 조절에 크게 곤란을 겪지 않는 편이라서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시합도 하기 전에 대표선수 자격을 빼앗겼을 거다.
***
오늘이 시합 날이다.
S체대 체육관의 출입문이 철저하게 통제된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아마추어 복싱협회와 S체대 관계자 여러분의 노심초사 덕분이다.
이 황량한 체육관에 내 편은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나와 내 편을 지키기 위해 이 링에 섰다.
결코 져서는 안된다.
터무니 없이 불리한 환경이지만 나는 이길 것이다.
"석현아! 주눅 들면 안 된다! 그리고 판정으로 가면 많이 불리할 거다. 알고 있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미, 미안하다. 내가 못나서, 너를 이런 더러운 싸움판에 세우고 말았다. 정말 미안······."
최 관장님이 말을 끝내지 못한다.
다 큰 어른이 왜 이렇게 심약해지셨는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질까봐 걱정을 하시는 걸까?
경기가 시작된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시작과 함께 김영호가 적극적으로 나온다.
슬로우 스타터인 내가 컨디션이 올라오기 전에 포인트를 따 놓겠다는 심산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이다.
이미 싸워본 상대다.
그의 경기 리듬은 이미 내 몸에 익었다.
같은 전략이 두 번 통하지는 않는다.
잽에 이은 원투 스트레이트가 터진다.
깨끗하게 김영호의 머리를 흔들어 놓는다.
주저하지 않고 김영호에게 파고든다.
접근전의 왕자 김영호와 접근전을 펼쳐 볼 생각이다.
복부쪽은 가드를 비워 두었다.
그가 내 몸통을 노린다면 몇 대 맞아줄 생각이다.
단, 얼굴만은 정타를 맞아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안면을 중심으로 가드를 단단히 한다.
그의 짧은 주먹이 내 복부를 노린다.
묵직한 주먹이긴 하지만 견딜 만 하다.
내 몸통을 노리느라 그의 턱이 비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그의 턱을 내 라이트 훅이 강타한다.
주먹에 감촉이 왔다.
김영호가 뒷걸음을 친다.
가드를 올린 김영호를 상대로 몇 차례의 훅과 어퍼컷을 넣었다.
충격을 받았는지 전혀 반격을 하지 못한다.
물러서던 김영호를 코너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고는 무자비하게 펀치를 쏟아 부었다.
김영호가 필사적으로 버티며 가끔 반격에 나서기도 하지만 어림없다.
그의 주먹은 내 눈에 완전히 읽히고 있다.
가뜩이나 황량하던 체육관이 얼어붙고 말았다.
1라운드 종료 공이 울린다.
최 관장님이 얼굴빛이 한결 나아졌다.
반대로 김영호 측 코너는 난리가 났다.
코치들이 지르는 고함소리가 나한테도 들린다.
2라운드 공이 울린다.
코치들의 질타 때문일까?
시작과 함께 김영호가 공세를 취하고 나온다.
그의 짧은 공격은 나의 카운터블로 한 방에 주춤한다.
저돌적으로 치고들어오지 못하는 인파이터는 전혀 위협적인 상대가 되지 못한다.
원거리에서 파상적으로 내뻗는 나의 원투 스트레이트에 샌드백처럼 노출되고 만다.
이제 상처 입은 맹수를 쓰러뜨릴 것이다.
한 방에 깨끗이 보내드리는 것이 선배에 대한 예우다.
필사적으로 한 방을 노리며 마지막 반격을 하던 김영호의 턱에 어퍼컷 한방이 그림같이 들어간다.
급소를 맞은 맹수의 마지막 숨통이 끊어진다.
나는 중립 코너에 서서 심판의 카운터가 끝나기만을 묵묵히 기다린다.
환호성을 지르지도 않았다. 내가 이기기를 바라는 팬 하나 없는 이런 삭막한 공간에서 다시는 시합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한 명이 있었다.
나의 승리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던 남자 말이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는 번쩍 들어 올린다.
체육관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나를 외면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대한민국의 복싱 국가대표다.
당신들이 나를 인정 하던 말든, 이제 그건 상관하지 않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