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백지 수표 (29/88)



〈 29화 〉백지 수표

참으로 신기한 종이 쪼가리다.

  공간에 숫자만 적어 넣으면 은행에서 그 액수만큼 나에게 즉시 현금을 준다는 것이다.


기분이 어떠냐구?


허무하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돈이란 것이  힘이 세더라.


뭐든지 할  있고, 누구라도 부릴 수 있는 모양이다.

다들 알아서 그 앞에서 설설 긴다.

백지 수표를 받은 사실은 아직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최 관장님에게도 말이다.


과연 최 관장님은 뭐라고 하실까?

김원기 교수와 전현도 프로모터에게로 가라고 할 것이다.

그것이 진심일까?


나와 같이 세계 무대로 나아가자는 꿈은 그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관장님의 마음을 알기에 더더욱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나는 수학이 약하다.

수학만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얼마의 값어치가 있는 놈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사람들은  가치를 아주 높이 매긴 모양이다.


기껏 아마추어 복서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 말이다.


도대체 나를 이용해서 얼마나 큰돈을  생각일까?

내가 그 돈을 벌어다주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버려야만 하는 걸까?

아니, 누구를 버려야 되는 것일까?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머리가 아프다.

원래 쓰지 않던 근육을 갑자기 쓰면 아픈 법이다.


나는 평소에 머리를 쓰지 않고 살았나 보다.


철학적인 생각을 좀 했더니 머리가 버티지를 못한다.

나를 대신해서 생각이란 것을 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사람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그녀가 가까이 있어서 좋다.

아직 서울을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뭐가 우스운지 민예린이 한참을 웃는다.


자기도  같은 고민을 나와 같은 나이에 했단다.

그녀도 백지 수표를 받은 적이 있단다.

 이야기를 하다가 목이 메는지 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해 진다.


백지 수표는 악마의 유혹이란다.


그녀는  유혹에 넘어갔고,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단다.

"악마의 유혹이야! 돈 같은 건 우습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막상 백지 수표를 마주하게 되니까 머릿속이 백지 상태가 되던걸?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이는 거야!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걸 철이 들었다고 표현하더라고."

"······."


"그건 철이 든게 아냐! 돈의 노예가 된 거지."

"······."

나도 알 것 같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항상 어른 같고 누나 같았던 민예린이 오늘따라 갸날퍼 보인다.

그런 그녀를 내가 보호해야 한다.

그녀를 갑자기 품에 안고 싶어진다.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무릎에 앉혔다.


그녀도 순순히  무릎에 앉아 손가락을 내 가슴에 대고는 꼼지락 거린다.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은 것 같다.

그 따스한 온기가  무릎에,  가슴으로 온다.

내 손 가득 그녀의 풍만한 유방이 잡힌다.

콩닥거리는 가슴 고동 소리가 내 손바닥에 전해진다.

"나 석현 씨 많이 좋아하는가 봐!"

"나두!"


"처음 봤을 때 내가 어땠어?"

"예뻤어!"

"피이! 거짓말! 그때 내 가슴에는 욕망밖엔 없었을 걸? 석현 씨 눈엔 그런 내가 추해 보이지 않았어?"

"예뻤어!  때도, 지금도! 난 어땠어?"

"음! 야생마 같았어! 길들여지지 않은······. 아니,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최욱 그놈을 그렇게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는 남자는 처음 이었어. 그 눈빛이 섹시했어! 나, 이 남자 갖고 싶다! 그런 생각?"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녀도 내 입술을 반긴다.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입술과 입술을 희롱한다.


"사실 확신이 없었어!  어린 남자가 나를 사랑은 하는 걸까? 아니, 나야말로 이 남자를 끝까지 사랑 할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서······. 나 바보같지?"


"아니? 누난 항상 똑똑했어. 누나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건 그런 거야!"

누나의 가슴을 만지던 손을 치마 속으로 옮긴다.

살짝 습기를 머금은 팬티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본다.


얇은 천 조각이 빠르게 젖어든다.

젖은 팬티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촉촉한 속살의 감촉이 나를 반긴다.


"아이! 거길 그렇게 하면······.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가 없잖아! 응?"


대화도 좋지만 이렇게 몸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다.


그녀의 팬티를 벗긴다.

나는 이 순간이 좋다.


마치 선물 포장지를 뜯는  같다.

늘 설렌다.

지금도!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 바닷가에서 파도에 바람에 내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고 싶어! 그래서 더 깨끗해진 몸으로 석현 씨 앞에 서고 싶어! 기다려 줄 수 있어?"


"지금도 충분히 깨끗해! 그리고 귀여워!"

"피이! 누나한테 귀엽다구 그러냐?"

하지만 어쩌겠는가?


귀여운 것은 귀엽다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나에게 그녀는 귀엽기만 하다.

말하는 것도!
마음도!
그리고 몸도!


한참동안 그녀의 몸을 쓰다듬고, 만지고, 사랑했다.


그리고 이제 확실히 알겠다.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내가 처음 마음먹은 데로 하면 될 것이다.

마음이 이제야 편안해 진다.


이렇게 쉬운 것을 괜히 고민했다.

머리가 맑아진다.

민예린과 나는 이제 백지 수표를 받아 보았다는 공통점이 생겼다.

그녀가 백지 수표를 누구에게 받았는지, 왜 받았는지 따위는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


***



내가 전현도를 찾아갔을  그곳에는 S 체대 김원기 교수도 함께 있었다.


 뿐이 아니다.

변호사까지 이미 와 있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나와의 계약을 해치울 생각이다.

내가 내민 백지 수표를 바라보더니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강석현 선수! 지금 우리랑 장난 하자는 건가?"


"아닙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조건을 말씀드린 겁니다."

"오천만 원 + 최철 ?"


"맞습니다."


"이게 장난하는 게 아니면 뭔가? 수표에는 숫자만 써 넣어야지! 사람이름을 넣으면 어떡하자는 건가?"

전현도는 냉정함을 잃지 않는다.

대신 옆에 앉은 김원기의 얼굴이 붉어진다.

"저는 계약금을 대폭 낮추는 대신 최 관장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


"최 관장님은 제가 어떻게든 설득을 해 보겠습니다."

"최 관장은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하지 않았나?"

"제가 몇 번이고 설득을  보겠습니다."


"좋아! 우리 계획을 말해주지! 처음 우리 계획은 김영호였어. 김영호를 주니어 페더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 시킬 생각이었어. 그리고는 한 체급 올려서 페더급 까지! 두 체급 석권에 도전한다는 것이 원래 목표였지."

"······."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거야! 천하의 김영호가 애송이 강석현에게 무참하게 패배를 당할 지 누가 알았겠나? 하지만 난 사업가야! 상품, 아니 선수를 보는 안목 하나는 탁월하단 말이야. 그래서 강석현의 잠재력에 과감하게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지!"

"······."

"내가 강석현에게 백지 수표를 줬다는 소리를 복싱 관계자들이 들으면 뭐라고 할  같아? 미쳤다고 그럴걸? 하지만 나는 자신 있어. 강석현을 슈퍼 챔피언으로 키워낼 자신 말이야! 난 강석현 너를 3체급을 석권하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복서로 키울 생각이거든!"

"그, 그건!"

"아! 오해하지 마! 그건 강석현 네가 천부적인 선수라서 그런 게 아냐! 내가 천부적인 프로모터니까 가능한거야!"


"저는 비즈니스로 억지로 만들어진 챔피언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강한 상대와 맞서 싸워서······."

"철없는 소리! 3체급 석권이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같아? 비즈니스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난 자신 있어! 내가 시키는데로만 하면 돼! 내가 주선해주는 시합만 묵묵히 치르다보면 어느새 3체급 석권의 위업을 달성한 슈퍼 챔피언이 되어 있을 거야! 강석현! 함께 하자!"

"저는 최 철 관장님을 신뢰합니다.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제 실력을 발휘할 자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굴욕적인데? 천하의 전현도가 백지 수표를 내 밀고도 애송이한테 퇴짜를 맞았다는 건가?"

"퇴짜가 아닙니다. 저는 단지  관장님이랑 함께 운동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관장이  안 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면 해 주지!  사람은 타고난 반골이야! 조직 생활을  사람이  돼! 그 자식이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시비를 걸어서 하는 말이 아니란 말이야!"


"······."


이제 알았다.


최 관장님은 복싱협회에서 비주류가 되어 버렸다.

 때문이다.


내가 협회와 몇 번의 문제가 있었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다보니 어느 틈에 거물들에게 미운 털이 박혀 버렸다.

"강석현이가 적이 많더구먼! 프로 선수로는 대단한 결격 사유지! 어때? 나와 손을 잡으면 내가 그 분들과 화해하도록 주선을 할 생각이야. 확실하게 숙이고 들어가기만 하면  분들도 용서  주실 거야. 내가 또 그런 건 잘하지!"


"죄송합니다. 제가 숙이고 들어갈 이유는 없습니다."

"너, 세상이 만만해 보이는구나?"


"······."


"네가 인생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하지! 여기서 싸인 하고 나가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이라도 맛보게 됩니까?"

"······."


나 강석현의 말에 전현도도, 김원기도 모두 말을 잃는다.

이런 결론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이리 되고 말았다.

아니, 처음부터 이렇게 되고야  운명이었다.


나는 최 관장님과 함께 하기로 진작부터 마음을 먹었으니까!

민예린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어쩌면 이렇게 될 거라고 가장 먼저 내다 본 사람은 그녀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세상을 잘 알고,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니까!




******



"진짜 백지 수표를 받았단 말이야?"

"······."

"그리고 그것을 거절했어? 미친 놈!"

"거절 한 것은 아니에요. 거기다 오천만 원이랑 최철이란 이름을 같이 써 넣었죠."

"이놈 진짜 미친놈이네! 거기다 내 이름은 왜 썼어? 아주 전현도랑 김원기를 세트로 조롱했구나, 조롱!"

"아닙니다. 그냥 내 마음을 써 넣다보니······."


최 관장님이 나를 꼭 껴안는다.


남자끼리 이러는 거 별로다!


"고맙다! 석현아! 정말 고맙다!"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하시고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진짜 별로다.

고일상 기자가 체육관으로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그러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소문 좌악 났어! 강석현이 전현도의 백지 수표를 거절했다고 말이야! 아! 기사로 쓰는 건 금지야! 전 회장이 기자들 입단속 시켰으니까!"

"······."

"잘 한거야! 강석현의 미래 가치가 전현도의 수표 보다는 높을걸? 나는 그렇게 봐!"

"우리 고 기자께서 또 우리 석현이한테 바람을 넣으시네! 일억이 얼마나 큰 돈인데요!"


"앞으로 슈퍼 챔피언이 되면 시합  번에 몇 백만 불을 우습게 벌게 될텐데 뭐! 거부한 건 잘 한거야!"


"······."

"전현도 회장이 어떻게 키워준데? 김영호한테는 10전 안에 세계 타이틀 도전 시켜 준다고 했다는데? 강석현 선수한테는 더 달콤한 말을 했을거 같은데 말이야."


"세 체급 석권에 같이 도전하자고······."

"오호! 그래도 전 회장이 선수 보는 눈은 있네! 강석현은 라이트 급 까지 충분히 가능한 선수지! 그 제안은 강 선수도 구미가 당겼을 것 같은데?"


"저는 비즈니스 챔피언은 싫어요! 안방에서 약한 선수하고만 싸워서 랭킹 올리고! 강자는 피해서 약한 선수하고만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무조건 제일 강한 선수하고만 싸울 겁니다!"

"브라보! 멋지다! 그게 바로 슈퍼 챔피언이지!"

"······."

"더더욱  했네! 슈퍼 챔피언에게 전현도 회장의 백지수표는 약하지! 백지 수표라고 달라는 데로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백지 수표면 금액이 무한대 아닙니까?"

"순진하긴! 분명히 한도 걸어 놓았을 걸? 많아야 2억? 기자들은 리미트(상한선) 2억으로 대부분 예상해!"


"······."

"일종의 심리 게임이지! 내가 너를 꼭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 하지만 빤히 수가 보이지 않아? 강석현이 만약 자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다해도 기껏해야 1억 밖에 못쓴다고 봤겠지. 다른 조건을  내밀 수는 있었겠지만! 강 선수,  철 관장도 같이 받아달라고 했지? 그러다가 파토 난거고!"

"······."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백지 수표 내밀만큼 간절하다는 놈이 최 철 관장 하나 못 받아 준다는  말이 돼? 애초부터 부도 수표였다는 거지!"

"아이고,  기자님은 우리 석현이 값을 좀  후하게 쳐주지 않으시고 그러신다!"

"뭐, 강 선수도 알건 알아야 하니까! 이제 애가 아니잖아요?"



사실 전현도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다.

강한 자와 싸우고, 강한 자를 이기는 쾌감을 알아버렸다.


돈이 나에게 갖다 줄 쾌락보다도 더 큰 즐거움 말이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싸우지 않을 것이다.


강한 자와 싸우고 싶다.

전현도는 아니다.

나에게 그런 쾌감을 줄  있는 역량을 가진 남자가 아니다.

졸장부다.

어린 나보다도 배포가 작은 놈이란 것이 눈에 보이더라.

어쩌면 나도 조금은 사람 보는 눈이 생긴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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