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올림픽 대표 선발전 - 결전의 날
"오늘 시합에는 왜 왔어요?"
"석현 씨 시합 보고 싶어서! 팬이니까..."
그렇다.
잊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내 1호 팬이다.
"그럼 석현 씨는 왜 오늘 나를 보러 왔어?"
"고일상 기자님과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아는 곳이 거기 밖에 없어서..."
"피이! 나 보고 싶었다고 말해주면 더 좋을 텐데... 그건 아니지?"
"......"
보고 싶었다. 나도 몰랐는데 그녀가 정말 보고 싶었나 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그래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난 이제 곧 서울을 뜰거야! 모든 걸 다 정리하고 동해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곳으로 갈 거야! 거기서 작은 커피 가게를 열 생각이야."
"......"
왜 서울을 떠나려 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필요도 없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정리하려는 거다.
카페가 아니라 사람들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아마 나 강석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민예린을 둘러싼 혼란의 시작은 바로 나다!
나만 아니었으면 그녀의 삶은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을 거다.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그녀의 인생 항로가 뒤틀린 것이다.
나 때문에 그녀의 가장 큰 목표였던 물질적인 부(富)를 포기하려는 것이 아닐까?
"서울 사람들은 그곳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를 아는 그 누구도!"
"......"
"왜 그렇게 얼굴이 심각해졌어? 걱정 마! 석현 씨는 예외야! 나를 찾아와! 아니, 찾아와야만 해! 반갑게 맞이해 줄게! 언제든지!"
"......"
"만약 그곳까지 석현 씨가 찾아오면 그날은 가게 문을 닫고 바닷가를 거닐자! 둘이서 손을 잡고서 말이야! 파도랑 술래잡기가 지겨워지면 산으로 가는 것도 좋겠지?"
예린이 입술을 살짝 내민다.
키스를 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사랑스럽다.
그 눈빛이 아름답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도 원하는 것이 생각났다.
어쩌면 오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올림픽 대표로 선발이 되어 서울 올림픽에 기어이 나갈 것이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서는 그녀가 있을 동해안 작은 카페로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프로포즈를 할 것이다.
나와 결혼해 달라고!
어쩌면 그녀가 내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올림픽 금메달은 호락호락한 목표가 아니다.
그래도 좋다.
이번 올림픽이 아니면 다음 올림픽도 있다.
금메달이 아니면 은메달이 있고, 은메달이 아니면 동메달도 있다.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빈손으로라도 그녀 앞에 설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 했노라고!
그런 나라도 그녀가 받아준다면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노라고!
그렇게 외칠 것이다.
적어도 외쳐는 볼 것이다.
***
최 관장님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미래일보에서 '운동선수의 인성'에 관한 기사를 냈다.
나를 돌려 까는 기사였다.
아니 누가 봐도 나를 직접 저격하는 기사다.
한국 사회에서 버릇없는 언행을 한 인간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 복싱 페더급 선수인 K 모군은 고교생의 신분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친 언행으로 선배인 장인욱 선수를 비하! ]
[ 선배에 대한 예의범절은 배우지 못한 것일까? ]
[ 비록 링에서는 적이지만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쉬워! ]
[ 복서이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
[ 국가대표 선발에 인성을 고려하는 문제가 시급! ]
"K모 군은 또 뭐야? 페더급에서 선배인 장인욱과 시합을 한 놈이 우리 석현이 밖에 더 있어? 차라리 사내답게 실명으로 비판을 해! 실명으로!"
관장님이 격분하신다.
악의적으로 지엽적인 문제를 트집 잡아 나를 매도하고 있다며 방방 뛰신다.
문제는 제일 마지막 기사다.
국가대표 선발에 인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S체대 K 모 교수가 주장하셨단다.
복싱 협회도 K 모 교수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단다.
"이건 뭐야? 우리 석현이가 선발전에서 승리를 해도 인성을 트집 잡아서 국가 대표로 뽑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선수 사기가 어떻게 되겠어!"
최 관장님이 격분하신데는 이유가 있다.
결승전을 앞두고 나를 뒤흔들려는 고도의 심리전이라고 받아 들이신다.
큰 시합을 앞둔 선수의 집중력을 떨어뜨려 보겠다는 것이란다.
정작 나는 상관없다.
그런 비난 정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설마 대표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사람을 탈락시키기야 하겠는가?
사실 예상은 했었다.
미래일보는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박선호의 집안이니까!
고일상 기자의 예상이 맞았다.
박선호는 나를 잊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바닥에 처박아 버릴 기가 막힌 타이밍만 노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직은 박선호에게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어 나갈수록 박선호가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는 많아질 것이다.
강해질수록, 앞으로 나아갈수록 원래 적은 많아지는 법이다.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다.
내가 더 강해지면 된다.
******
페더급 최강 김영호는 이번 올림픽이 끝나면 프로로 전향한다.
이미 거액의 계약금을 국내 최고의 프로모터에게서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단지 올림픽 출전을 위해 쉬쉬하고 있단다.
프로에 데뷔하면 10 전 안에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주겠다는 믿기 힘든 제의를 받았다고도 한다.
그만큼 김영호의 실력은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에게는 프로 무대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경기 운영은 영리하고 펀치는 묵직하다.
나보다 여섯 살 많은 베테랑 복서가 나의 결승 상대다.
이 경기만 이기면?
드디어 서울 올림픽이다!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루어 볼 수 있다!
복싱 관계자들이 나를 일컬어 슬로 스타터(Slow starter)라고 하더라.
발동이 늦게 걸린다고 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경기 후반부가 강한 것이고 나쁘게 이야기하면 경기 초반에 감을 잘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두 대 때리고 몇 대 맞아봐야 상대가 파악이 되는 편이다.
이것이 오늘 나쁘게 작용했다.
김영호는 내가 초반이 약하다는 것을 이미 파악했고, 나를 분쇄하는 비책으로 초반에 거칠고 강하게 나왔다.
1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김영호가 정신없이 나를 몰아붙인다.
초반 1분은 무조건 탐색전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그만 페이스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김영호의 주먹은 무겁다.
사람들의 말대로 쇠뭉치 같다.
몇 대 정타를 맞고 나니 몸이 나도 모르게 움츠려든다.
김영호가 노린 것도 바로 이것이다.
초반에 몰아붙여 포인트를 딴다.
그러다 잃은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 막판에 내가 공격적으로 나갈 때는 클린치를 하며 엉겨 붙어 힘을 빼 놓는다.
1라운드가 끝나고 나니 벌써 힘이 달린다.
체력을 많이 쓴 거 같다.
"석현아! 네 페이스 대로 싸워! 자꾸 김영호 페이스에 말리지 말고! 거리 유지하는거 잊지 말고!"
나도 안다.
이건 김영호의 페이스라는 것을!
다시 정신 차리고 하나씩 하나씩 해 가야 한다.
2라운드가 시작된다.
이젠 다르다.
김영호의 주먹이 보인다.
약간의 차이로 김영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내 잽이 하나씩 그의 얼굴을 찍어대기 시작한다.
그의 눈 두덩이가 부어오르기 시작한다.
2라운드 중반 이후부터는 김영호의 주먹이 내 몸을 건드리지도 못한다.
내 잽에 체중이 실리기 시작한다.
잽이 아니라 스트레이트라고 봐도 좋다.
잽 하나하나가 날아갈 때마다 김영호의 머리가 흔들린다.
체력 좋고 터프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김영호가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한다.
창날 같은 잽을 뚫고 용케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한 김영호의 얼굴에 나의 짧은 훅이 터진다.
김영호가 휘청거린다.
뒷걸음을 친다.
천하의 김영호가 말이다.
따라 들어가서 난타전을 벌일 생각이었는데 종료 공이 울린다.
조금 아쉽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오른손을 번쩍 들어서 관중들께 인사를 했다.
관중들은 그 모습에 더더욱 열광을 한다.
이제 3 라운드다.
김영호는 초반부터 승부수를 던진다.
가드를 단단히 하고 무조건 파고든다.
잽을 던지며 1분만 잘 견디면 김영호는 지칠 것이다.
발 빠르게 거리를 유지하다가 김영호가 지친 중반 이후에 몰아붙이라는 것이 관장님의 작전이다.
타당하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붉은 피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짧은 거리에서 후려치는 훅과 어퍼컷이 일품인 김영호다.
하지만 그의 예리한 주먹이 내 눈에 다 보인다.
몸을 슬쩍슬쩍 비틀며 결코 정타를 허용하지 않았다.
오늘은 내 몸의 리듬감이 정말 좋다.
김영호의 주먹이 둔해졌다.
이제 그의 펀치는 내 몸을 스치지도 못한다.
내 회심의 어퍼 컷이 그의 배에 꽂혔고, 김영호가 무너져 내린다.
한국 페더급의 제왕이 쓰러진다.
김영호는 카운터 9 에서 일어난다.
굳이 상처 입은 맹수에게 소나기 펀치를 퍼부을 생각은 없다.
예의가 아니다.
예리한 펀치 하나면 된다.
그것이면 끝이다.
김영호의 얼굴에서 공포를 읽었다.
나도 그도 알았다.
이것이 오늘 경기의 마지막 주먹이란 것을!
투창같이 서늘한 레프트 스트레이트가 김영호의 가드를 뚫고 그의 안면을 찍었다.
김영호의 눈이 풀린다.
주심이 쓰러지는 김영호를 붙들고는 손을 휘젓는다.
조금은 허무하다.
아직 더 보여줄 것이 있는데!
최 관장님이 나를 끌어안고는 엉엉 우신다.
다 큰 어른이 주책이시다.
울고 있는 어른 사람을 또 하나 발견했다.
체육관 뒤쪽에 커다란 기둥이 있다.
그 기둥 곁에 숨어서 내 시합을 지켜보던 여인 하나도 그 고운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나 강석현이 무려 두 명의 어른이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나는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는다.
괜히 그들이 우는 바람에 내 코 끝도 약간 찡하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
결승전이 끝났다.
세상이 달라졌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에 다시없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나를 바라본다.
잘 했다고 나에게 격려도 해준다.
S체대 김원기 교수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무식한 나도 알만한 유명 인사가 앉아있다.
한국 프로 복싱 최고의 프로모터 전현도 씨다.
이런 거물들이 내가 다니는 광산상고까지 찾아왔다.
이제야 고일상 기자의 말이 이해가 된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하고 나면 김원기 교수의 백팔십도 변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더니 과연 그렇다.
내가 알던 김원기 교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표독하고 독선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뜻이 곧 법이다.
그의 말을 끊거나 토를 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우리 최 관장님과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오늘은 달라 보인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해 보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줄 수 있단다.
"일 억!"
"......"
지금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다짜고짜 일 억이라니!
"우리 강석현 선수께서 대답을 안 하시는군! 왜? 돈이 적나? 일 억이면 파격적인 조건이야! 지금껏 아마추어 복서에게 그 만한 돈을 제시한 적은 없었어!"
"......"
내가 프로로 전향하면 일 억을 주겠다는 거다.
세상에나!
미쳤다!
일 억이면!
"아! 올림픽은 나가야지! 올림픽이 끝나고 정확히 1년 후에 프로 전향을 하는 걸로 하자구! 그 전까지는 아마추어 무대에서 경험을 더 쌓아야지! 세계 선수권 대회도 나가보고!"
"......"
"물론 올림픽 메달을 따면 강석현 선수 몸값이 달라져야겠지. 그것도 옵션으로 계약에 다 반영했어. 금메달 1억, 은메달 3천, 동메달 1천을 추가로 지급하지!"
"상의를 해 보겠습니다. 최 관장님이랑..."
"지금 이 자리에서 계약서에 싸인을 하면 1억원을 바로 수표로 지급하지! 혹시 통장이 있으면 바로 입금을 해줄 수도 있고...."
"최 관장님이랑 상의를 해 보고 나서..."
"그건 곤란해! 계약과 동시에 S체고로 전학을 해야 하니까! 그래야 S체육대학으로 진학을 할 것 아닌가? 그리고 여기 김원기 교수께서 자네를 케어해 주실 거야!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지! 계약서는 여기 준비해 왔네!"
"......"
"놀랍군! 지금 고민을 하고 있는 건가? 설마 1억 원이 성에 차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닙니다. 금액은 저에게 과분합니다. 솔직히 생각지도 못한 큰 액수입니다."
"하하! 솔직해서 마음에 들어! 그렇다고 계약금 깎아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어떤가? 이래봬도 이 전현도가 꽤 바쁜 사람이야! 그런 내가 이곳까지 왔으니까 이왕이면 계약서에 지금 싸인을 받아 갔으면 하는데?"
"......"
"그렇군! 그림이 좋지 않군. 그러면 특급 호텔에서 계약을 하는 것은 어떤가? 기자들도 부르고!"
"저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최 관장님과 상의를 해야 합니다."
"......"
"최 관장님과 함께 운동을 할 수 있다면 계약금은 그보다 훨씬 적어도 상관없습니다."
"최 관장은 안돼!"
"그러시다면 저도 안되겠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나는 어디까지나 예의 바른 운동선수니까.
"그럼 이렇게 하지! 최 관장은 안 돼. 대신 이걸 주지! 백지 수표야! 원하는 금액을 적어 보게."
"......"
"시간이 필요한가 보군. 사흘 주겠네! 사흘 안으로 나에게 연락 주게! 기다리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