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올림픽 대표 선발전 - 떠버리 복서와 S체대 마피아 (1)
"최 관장님! 강석현 선수, 대단하지 않습니까? 마지막 어퍼 컷은 정말 예술이었어요! 옛날 오영민의 어퍼 컷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전(前) 주니어 라이트급 동양 챔피언 오영민 말입니다!"
고일상 기자가 나보다 더 흥분을 한다.
고전을 한 경기였고 마지막 어퍼 컷 하나만 좋았을 뿐인데, 고일상 기자는 그 펀치에만 주목을 한다.
"아직 멀었어요. 우리 석현이는 페더급 적응도 안 끝난 애송입니다. 괜히 띄워주려고 그러실 필요 없어요."
"무슨 겸양의 말씀을! 두고 보세요! 강석현은 분명히 슈퍼스타가 될 겁니다. 우리 나라도 복싱의 슈퍼스타가 나와야지요!"
시합 내용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고일상 기자님께서는 나름 흡족하신 모양이다.
나를 좋게 보는 사람이 기뻐하니 나도 좋다.
내가 복싱 말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재주가 있을까?
두 번 생각할 것도 없다.
나는 다른 재주가 없다.
죽으나 사나 복싱을 해야 한다.
이것이 나의 천직이다.
준결승전 상대는 대학 선수권 우승자 장인욱이다.
한국 페더급 2인자라고 보면 된다.
1인자인 김영호가 프로로 전향하면 다음 국가대표 1순위다.
그리고 S체대 장인욱의 뒤에는 김원기 교수가 있다.
하긴, 김영호도 S체대 출신으로 김원기 교수의 애제자다.
S체대! S체대!
복싱 좀 한다는 자들은 모두 S체대다.
S체대를 갔기 때문에 국가대표가 된 것인지, 국가대표가 될 선수만 귀신 같이 S체대에서 뽑아가는지는 머리 나쁜 나는 잘 모른다.
어찌되었건 현재 S체대는 한국 복싱의 메카다.
한국 아마추어 복싱 국가대표 선수들 중에서 S체대 재학중이거나 졸업생이 아닌 경우는 거의 없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S체대 김원기 교수의 안목과 지도력을 칭송한다.
명성이 높아진 만큼 우수한 선수들이 모여들고 김원기 교수의 지도를 받았던 선수들이 중고교 지도자로 자리를 잡는다.
지도자 자리가 여의치 않으면 심판의 길도 있고 복싱 협회 임직원 자리도 있다.
대부분의 권투인들이 김원기 교수를 찬양하지만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김원기 교수의 사단을 'S체대 마피아'라고 부른다.
김원기 교수와 S 체대 마피아가 한국 복싱계를 좀 먹고 있으며, 그들이 종국에는 한국 복싱계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걱정한다.
나를 가르치는 최 관장님도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다.
파벌이라고는 관심도 없는 일개 고교생인 나 까지도 S체대 반대파의 일원으로 간주되고 있을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른바 복싱계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개인주의자다.
파벌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일개 고등학생에게 블랙리스트가 웬 말인가?
하지만 현실이다.
복싱 선수라면, 국가 대표가 되고 싶다면 선택은 하나였다.
모든 문제는 내가 파벌에 들기를 거부한 놈으로 찍혀 버렸다는 거다.
그것도 우리 최 관장님과 세트로 말이다.
준결승전이다.
이제 두 번만 더 이기면 된다.
링 사이드에 김원기 교수가 친히 앉아서 관람을 하신다.
VIP 석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부심들이 앉아서 채점을 하신다.
대략 견적이 나온다.
오늘은 K.O 승이 아니면 이기기 어렵다.
어떤 심판들도 자기 뒤에서 김원기 교수가 흘끔흘끔 보고 있는데 그의 제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안겨 줄 리 없다.
이제 심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다 보인다.
복싱 실력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쓸데없는 능력만 늘어난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이 오히려 나를 불타오르게 한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투지란 놈이 용솟음 친다.
이런 날의 나는 아무도 말릴 수 없다.
오늘이 그날이다!
장인욱은 테크니션이다.
키도 175cm 로 페더급으로는 큰 키다.
그리고 잽에 이은 원투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김원기 교수는 장인욱이 나에게 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 눈치다.
하긴 누군들 그리 생각할까?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린 후 앞 두 경기를 고전 끝에 역전승을 거두며 올라온 나이기에 장인욱을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준결승 부터는 TV 중계가 있다.
여러 대의 중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일어난 복싱 붐에 편승하려는 것이다.
랭킹 1위 김영호, 랭킹 2위 장인욱은 팬들도 많이 확보하고 있다.
페더급의 최강 김영호, 페더급의 미래 장인욱의 결승 대결, S체대 동문 간의 대결을 기대하는 복싱 팬들도 많다고 들었다.
오늘 내가 그 기대를 무참히 깨어 줄 작정이다.
1라운드 공이 울린다.
테크니션 끼리의 대결은 자칫하면 재미없는 시합이 될 가능성이 있다.
소극적으로 포인트 위주의 복싱.
대부분의 팬들은 그런 대결을 싫어하신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
페더급 최고의 스트레이트를 가진 놈이 누군지 똑똑히 보여 줄 것이다.
역시 장인욱이다.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잽을 쉬지 않고 내민다.
평소 같았으면 백 스텝을 밟으며 전열을 정비했을 것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나도 잽이라면 자신 있다.
보기 드물게도 스트레이트 펀처들 간의 원거리 난타전이 펼쳐진다.
복싱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장거리 직사포들이 불을 뿜는다.
관중석이 서서히 달아 오른다.
장인욱의 스트레이트도 일품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내 핸드 스피드가 미세하게 더 빠르다.
한 대 맞고 두 대 때리는 식의 난타전이 펼쳐진다.
멀리서 보면 펀치를 서로 주고받는 식의 경기가 펼쳐지는 것 같겠지만 나는 장인욱의 정타를 거의 맞지 않았다.
그 결과가 1 라운드 종료 직전에 나타난다.
장인욱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주심의 카운터가 시작되자마자 1라운드를 끝내는 공이 울린다.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나도 모르게 한 손을 번쩍 들어서 내가 이긴 라운드라는 표시를 확실히 했다.
관중들이 열화와 같은 함성으로 코너로 돌아오는 나를 맞아 준다.
"강석현! 건방 떨지 마! 보는 내가 다 불안해 죽겠다. 좀 침착하게 하자! 응?"
관장님은 내가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는 것이 영 불안하신 모양이다.
"좋잖아요? 오늘 TV 중계도 있다잖아요? 혹시 압니까? 끝나고 TV 인터뷰라도 하게 될지요! 관장님도 뭐 말씀하실 거라도 준비해 두세요. 오늘 경기는 나한테 맡기구요!"
"이 자식! 오늘 완전히 떠버리가 되었네! 임마! 네가 무하마드 알리냐?"
"오늘은 제가 무하마드 알리예요! 두고 보세요! 이번 회에 장인욱 저 놈을 눕혀 버릴 겁니다. 저 놈은 결코 2라운드 종료 벨을 듣지 못할 거예요!"
"......"
이왕 떠든 김에 무하마드 알리의 흉내를 좀 더 내고 말았다.
이른바 K.O 예고다.
너무 황당해서일까?
관장님이 분명히 뭐라고 야단을 치실 줄 알았는데 그냥 계신다.
선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설까?
아니면 관장님도 나하고 같은 생각이실까?
2라운드 시작과 함께 코너를 뛰쳐나갔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를 상대의 안면에 적중 시켰다.
벌써 장인욱이 비틀 거리고 있다.
아직 멀었다!
벌써 쓰러지면 안 된다!
나는 아직 내 실력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링 사이드에 기대어 비틀거리는 장인욱에게 다시 원투 스트레이트와 어퍼 컷 콤비블로를 적중시켰다.
장인욱이 두번째 다운을 당해서 바닥을 긴다.
링 사이드의 김원기 교수가 앞으로 튀어 나와 장인욱을 독려한다.
장인욱이 겨우 일어난다.
그 장인욱을 향해 라이트 훅 단발이 관자놀이에 크게 꽂힌다.
장인욱이 털썩 주저앉는다.
주심이 카운터도 세지 않고 경기를 중단시킨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지켜들고 관중석을 향해 포효했다.
내 가슴을 두드리며 소리를 쳤다.
내가 최고라고!
나 강석현이 서울 올림픽까지 갈 거라고!
최 관장님이 말리지 않았다면 더 떠들었을 것이다.
관장님이 내 귀를 잡고는 나를 링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간다.
나가면서 똑똑히 보았다.
똥빛으로 변한 S체대 김원기 교수님의 얼굴을 말이다.
누군가 관장님에게 다가와서 귓속말로 소근댄다.
관장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서, 석현아! 티, 티브이 인터뷰란다. 주, 준비하래!"
얼마나 놀라셨는지 말을 다 더듬으신다.
다음 경기 준비할 동안 시간도 남고, 내가 오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서 관중들의 환호를 제일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급히 TV 중계석으로 와서 인터뷰를 하자고 한다.
물론 최 관장님도 함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TV 인터뷰란 것도 다 해본다.
나 출세한거 맞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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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아! TV 카메라 보고 쫄지 마! 긴장하면 한 마디도 못하니까. 긴장 풀고! 평소처럼 이야기하면 돼! 알겠지? 잘 안되면 나한테 떠넘겨! 내가 잘 커버해 줄 테니까!"
최 관장님께서 방송 출연이 처음인 나를 위해 이것저것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린다.
평소에도 말을 잘 못하는 나니까.
그냥 관장님 말씀에 맞장구나 치다보면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나는 관장님의 말씀대로 긴장을 풀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작 관장님 본인이 이를 실천하지 못하신다.
최 관장님이 그렇게 긴장하실 줄은 몰랐다.
카메라 맨이 TV 카메라를 관장님의 얼굴에 들이대자 그만 얼어붙고 마신다.
나 대신 대화를 주도하실 줄 알았는데 본의 아니게 내가 대신 떠들게 되었다.
나도 몰랐다.
카메라 앞에서 내가 이렇게 말이 많아질 줄은!
"아! 강석현 선수!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는 장인욱 선수가 올라올 줄 알았거든요? 뜻밖의 승리인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제가 이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장인욱 선수의 원투 스트레이트보다는 제 원투 스크레이트가 더 빠르고 위력적이니까요. 경기 시작하고 나니 바로 알겠던걸요?"
"아! 고교생 복서가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장인욱의 스트레이트는 한국에서 탑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자신의 스트레이트가 더 낫다? 겁 없는 모습 좋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2라운드 K.O 승은 의외였습니다. 천하의 장인욱이 그렇게 맥 없이 무너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저는 예상했습니다. 코치 님께도 2라운드에 끝낼 것이니 인터뷰나 준비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약속을 지켰고요."
"......"
"......"
갑자기 해설자가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아, 제가 잠시 기가 막혔, 아니 당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강석현 선수는 2라운드 K.O를 예고했단 말이지요? 무하마드 알리처럼 말입니다."
"그냥, 감이 왔습니다. 제 컨디션이 좋았고, 장인욱 선수는 제 펀치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 보았습니다. 펀치를 주고받다 보면 감이 오지 않습니까?"
"네에! 다음 상대가 한국 아마추어 복싱의 간판인 김영호 선수입니다. 어떤 태도로 임하실 생각입니까?"
"반드시 이길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올림픽에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왜 그러시죠? 제가 못할 말이라도?"
"아, 아닙니다. 강석현 선수의 패기가 보기 좋군요. 그럼 이번에도 예측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이깁니다! 그것도 K.O 로! "
"......"
"김영호 선배는 꽤 강한 상대니까 3라운드에 끝내겠습니다."
"......"
"내기를 하셔도 좋습니다. 저 강석현에게 걸면 절대 지지 않으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