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올림픽 대표 선발전 - Back to the Basic
2라운드가 시작된다.
침착! 침착!
몇 번이나 속으로 침착을 되뇌었다.
그런데 몸이 제 마음대로 서둘러 반응을 한다.
그러다 몇 대의 유효타를 또 허용하고 말았다.
만회를 하려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고 말았다.
주먹에 감촉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내 주먹을 맞고도 버틴다.
그러다 카운터펀치를 허용하고 말았다.
또다시 바닥에 뒹굴었다.
급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상대에게 돌진했다.
그 다음은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대 때리고 몇 대 맞은 것 같다.
상대는 노련한 복서다.
내 마음을 훤히 알고는 그에 대비를 한다.
때리고 맞고 클린치!
이 패턴이 반복되고 그러는 사이에 삼 분이 모두 흘러간다.
2라운드가 종료된다.
"석현아! 강석현! 정신 차려!"
관장님의 목소리가 딴 세상에서 들리는 것 같다.
입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이대로 끝인가?
국가대표는?
올림픽은?
세계 챔피언은?
아니, 복싱을 계속 수는 있는 걸까?
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까?
내가 무참하게 패배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야, 임마! 강석현! 정신 차려!"
관장님이 두 손으로 뺨을 찰삭찰삭 치신다.
이제서야 정신이 좀 든다.
"왜 이렇게 서둘러? 너답지 않게!"
"......"
"1라운드, 2라운드는 잊어버려! 새로 시작하는 거야!"
"하지만 판정으로 가면 못 이깁니다."
"K.O 노리지 마! 절대!"
"네? 하지만..."
"판정으로 가도 돼! 강석현의 복싱을 펼치는 것이 더 중요해. 알겠어?"
"......"
"기본으로 돌아가! 네가 제일 잘 하는거만 해! 다른거 하려고 하지 마! 결과는 내가 책임 져! 알겠지?"
"기본이라면?"
"잽, 그리고 원투 스트레이트! 다른 건 하지 마!"
"잽? 원투 스트레이트?"
"기본으로 돌아가자! Back to the Basic!"
관장님께서 나만큼이나 좋지 않은 발음으로 못하는 영어를 다 쓰신다.
괜히 웃음이 나온다. 덕분에 정신이 좀 든다.
그렇다.
기본으로 돌아가자!
Back to the Basic 이다!
상대는 서둘지 않는다.
아니 서둘 이유가 없다.
1라운드, 2라운드 모두 다운을 내게서 다운을 얻어내었다.
3라운드를 별 탈 없이 마무리하면 이길 수 있는데 왜 무리를 하겠는가?
역시 성인 무대는 다르다.
오랜 시합 경험에서 나오는 관록이라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잘 하는 것을 하라는 관장님의 지시는 백 번 타당한 말씀이다.
내 주무기는 뭐니 뭐니 해도 잽에 이은 원투 스트레이트다.
관장님에게 복싱을 처음 배울 때부터 신물이 날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나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
이 시합을 꼭 이겨야 한다는 조급증을 버려야 한다.
지더라도 내가 할 플레이는 다 하고 나서 져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아니, 지금이라도 그걸 깨달아서 다행이다.
잽이 먹히기 시작한다.
잽은 모든 공격의 시발점이다.
잽이 적중하게 되면 몸이 상대와의 거리를 정확히 계산해낸다.
잽을 적중시킨 다음의 원투 스트레이트는 훨씬 정확해지고, 그 위력도 배가 된다.
만약 그 잽에 체중까지 실리게 되면 스트레이트와의 구별이 무의미하다.
상대를 휘청거리게 할 만큼 충분히 위력적인 주먹으로 변한다.
체중이 실린 나의 잽이 연이어 상대의 얼굴을 때린다.
얼굴이 벌겋게 물든다.
당황한 상대는 급격히 수세에 몰린다.
하지만 링에는 도망갈 곳은 있어도 숨을 곳은 없다.
내 발이 더 빠르다.
결국 링 사이드에 상대를 몰아붙이고는 원투 스트레이트를 정확히 적중시켰다.
주먹에 감촉이 온다.
분명히 충격을 받았다.
지금이 기회다!
아니다.
서둘면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다시 잽부터 시작하자!
시간은 충분하다.
도망만 다니던 상대가 코너에 박혀서는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올 수 없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내 스트레이트가 미사일처럼 날아가 꽂힌다.
"석현아! 30초 남았다. 이제 몰아붙여!"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상대의 얼굴과 몸통을 가리지 않고 소나기 펀치를 퍼부었다.
가드를 올려도 소용없다.
이미 내 펀치는 물이 올랐고 아무리 가드 위라도 충격은 누적된다.
30초는 복싱에서 엄청나게 긴 시간이다.
머릿속에서 상상하던 그 광경을 실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다.
심판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양손을 들고 흔든다.
내가 이긴 것이다.
3라운드 K.O 승이다.
고전은 했지만 어쨌든 이겼다.
천신만고 끝에 2회전에 진출하고야 말았다.
복싱은 만만한 스포츠가 아니다.
조금만 방심해도, 조금만 준비가 부족해도 그 틈을 비수같이 파고들어 응징한다.
그리고 시합이란 것은 수백 가지의 변수가 존재한다.
시합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지옥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다.
관장님의 유창한(?) 영어 발음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Back to the basic!
죽다가 살았다.
다시는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
******
이제 8명이 살아남았다.
세 번만 이기면 국가 대표다.
그리고 페더급 대표의 자격으로 서울 올림픽에 나간다.
나도 안다.
쉽지 않다는 거!
남은 8명은 우리나라에서 손 꼽히는 강자들이다.
그중에서도 최강자는 단연 김영호 선배다.
현 페더급 국가대표이자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그리고 세계 선수권 대회 3위의 강자다.
언론은 물론 정부에서도 이번 올림픽 메달 후보 중 하나로 복싱 페더급의 김영호 선배를 꼽고 있다.
만약 홈 링의 이점에다 약간의 행운이 뒤따라 준다면 금메달까지도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는 당연히 그 적수가 없다.
모두들 이번 선발전의 최종 승자는 김영호 선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겁이 나지 않느냐고?
천만에! 그런 강자와 싸울 기회를 가지는 것이 기쁘다.
그와 주먹을 겨루어볼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잔꾀 부리지 않고 정면 승부할 것이다.
그러다 져도 좋다. 이기면 더욱 좋다.
만약 이기면?
내가 국내 일인자다.
내가 국가 대표다.
일단 김영호 선배와는 조가 다르다.
두 번을 더 이겨야만 선배와 겨룰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차라리 빨리 붙는 것이 좋을 텐데!
혹시 그를 만나기도 전에 내가 탈락을 한다면 그와 싸울 기회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같은 조가 아닌 것이 아쉽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나갔다.
나는 고교 3학년에 올라가는 애송이 복서다.
처음 성인무대를 치르는 신인이다.
겸손하게 임해야 한다.
하지만 기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
체급을 올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아직 페더급에서 통할 파워를 갖추지는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평소 체중이 60kg에 미치지 못하는 나로서는 사우나실에 한 번 들어가지 않고도 페더급 한계 체중인 57kg을 가볍게 맞춘다.
치열한 감량 끝에 가까스로 한계 체중을 맞추고 계체량이 끝난 후의 리바운드(회복) 효과를 노리는 선수들과는 분명 파워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최 관장님은 페더급으로 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신다.
분명 내 키는 더 크고 있으니까!
나도 그 방향에 수긍한다.
관장님은 항상 길게 보고 가자는 분이시다.
나는 우리 관장님을 믿는다.
준준결승 상대인 이명수 선배는 터프한 복싱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상대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필요하다면 반칙도 불사한다.
파울을 받지 않는 범위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동원하는 선수다.
모두들 그와 싸우는 것을 꺼린다.
그런 그가 이번 시합의 내 상대다.
"석현아! 버팅(박치기) 조심해! 이명수는 분명히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올 거야. 그러고는 접근전으로 들어가서는 치고받다가 클린치(끌어안기)로 나갈 거고! 알지! 가능하면 떨어져서 싸워! 거리 주지 마!"
1라운드 공이 울린다.
잽을 몇 차례 적중 시켰다.
잽에 이어서 원투 스트레이트만 맞추면 쉽게 끌고 갈 수 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이명수는 노련하다.
서서히 자신의 페이스로 시합을 몰고 간다.
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상대의 공격 패턴을 바꿀 수야 없다.
알고도 당하는 것이 이명수의 더티 복싱이다.
그리고 이명수는 누구보다도 노련하다.
상대가 난처해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복서다.
그가 나를 늪으로 끌고 들어간다.
잔 펀치를 맞으면서도 멧돼지 처럼 밀고 들어온다.
아주 빠른 것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순발력은 탁월하다.
거리가 좁혀지면 부담스러운 상대다.
그의 주먹도 묵직하지만 그의 머리통은 더더욱 묵직하다.
머리를 위, 아래, 전후좌후로 흔들고 들어온다.
머리끼리 부딪히는 것을 두려워 않는다.
아니 그걸 노리고서 들어온다.
머리에만 신경쓰다 보면 그의 짧은 훅과 어퍼컷이 터져 나온다.
타이밍을 맞춰 반격을 하려 하면 끌어 안아 버린다.
버팅(Butting) & 클린치(Clinch)!
이명수는 참으로 난처한 상대다.
심판이 엄격하게 보고 파울을 줄 수도 있지만 오늘 심판께서는 이명수에게 아주 관대하다.
결국 그와 머리를 부딪혔고 그래서 어질어질하다.
왈칵 짜증이 난다.
어쩌면 이명수가 바란 것은 내가 짜증을 내고 흥분을 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좁은 거리에서 난타전이 이어지고 클린치가 잦아진다.
이명수는 힘도 장사다.
클린치를 한 상태에서 꼭 나를 밀고 당기고 흔들어 놓는다.
내 힘을 빼놓겠다는 것이다.
흥분한 나도 지지 않고 그와 힘 대결을 벌였고 나는 조금씩 지쳐간다.
벌써 1라운드와 2라운드가 끝이 났다.
채점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내가 조금 더 유효타를 날린것 같은데? 아닌가?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3라운드에서 승부가 날 것이다.
"강석현! 화 내지 마! 흥분하면 지는 거야! 아직도 몰라?"
"......"
코너에 씩씩대며 앉아있는 나를 관장님이 다그친다.
"흥분하니까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가잖아? 주먹에 힘이 들어가니까 네 강점인 펀치 스피드가 떨어지잖아? 복싱은 힘자랑이 아니야!"
"......"
"머리를 숙이고 멧돼지처럼 밀고 들어오는 놈한테는 뭐가 약이지?"
"어퍼 컷이요!"
"맞아! 어퍼 컷을 먹여!"
"잘 안 맞아요. 이상하게..."
"이상할 거 하나도 없어! 몸에 힘이 들어가서 그래. 화내지 마! 그리고 흥분하지 마! 그러면 몸에서 쓸데 없는 힘이 빠질거야. 무념무상! 상대가 아무리 도발을 해도 화를 내면 안돼! 알겠지!"
마지막 3 라운드다.
나도 안다.
내가 한심하게 시합을 한 거!
지금부터 마음을 평안히!
사이드 스텝을 밟다가 이명수의 발에 걸려 고꾸라졌다.
저 인간이 일부러 그런 거다!
마음의 평화는 무슨!
불같이 화가 나서 달려들었고 다시 난타전을 펼친다.
그러다가 다시 눈두덩이를 이명수의 머리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찔하다!
그리고 어지럽다!
심판에게 항의를 해 보았지만 괜히 주의를 받은 쪽은 나다.
"이 새끼! 시합에 집중해!"
심판 선생님의 욕설에 정신이 번쩍 든다.
내가 안일했다.
내 상대는 눈앞의 이명수 만이 아니었다.
그걸 잊고 있었다.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심장이 차가워진다.
그리고 냉정해졌다.
이명수가 머리를 위협적으로 흔들며 파고 든다.
잽으로 응수하다가 이명수의 가드 위에 원투 스트레이트를 퍼부었다.
이명수는 버텨 낸다.
그리고 어느새 나와의 거리를 좁힌다.
이 거리에서는 내 주무기인 원투 스트레이트는 무용지물이다.
내 허리가 이 시합들어 가장 가볍게 돌아간다.
발끝에서 무릎으로 전달된 힘에 허리를 통하며 가속도가 붙는다.
그 힘이 고스란이 내 주먹에 실린다.
나의 주먹이 바람개비처럼 가볍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 파워는 결코 가볍지 않았던 모양이다.
썩은 고목처럼 이명수가 고꾸라진다.
심판의 카운터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
내 주먹에 감촉이 왔으니까!
이제 준결승이다.
두 번만 더 이기면 올림픽이다!
최 관장님이 어린아이처럼 껑충껑충 뛰며 좋아하신다.
나보고는 흥분하지 말고 침착하라고 하시더니!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 마음만, 그 감정만 조절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