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밤의 대통령 (2)
나와 이상훈은 이제 주먹도 섞지 않는다.
한참을 서로 노려보며 헛점만을 찾는다.
섯불리 움직일 이유가 없다.
장기전으로 간다.
설유연이 몸을 배배 꼬고 있다.
박선호의 손이 그녀의 치마 속으로 파고 든 모양이다.
룸 안은 고요한데, 고양이 같은 여자의 신음 소리가 빈 공간을 끈적하게 채운다.
"어맛? 거기에 손가락 넣지 말아요! 아파! 아앙!"
그 간드러진 교성에 흔들린 것은 나도, 이상훈도 아니었다.
최욱이 동요한다.
여자를 유린하고 있는 박선호에게 고함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닦달한다.
덕분에 내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찌되었던 나를 고용한 것은 최욱이니까!
"너 복싱하는 놈이지?"
"......"
나와 주먹을 섞은 이후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던 낭만검객 이상훈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체급이 어떻게 되지? 라이트 급?"
"......"
"아냐! 이 주먹은 도저히 라이트 급의 것이 아냐! 그럼, 웰터급? 그러기엔 너무 체구가 작아! 궁금한데?"
갑자기 낭만검객이 말이 많아진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나를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건가?
그래서 여유를 부리는 건가?
"밴텀급!"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밴텀급이라고? 말도 안 돼!"
"......"
"나 낭만검객 이상훈이 겨우 밴텀급의 주먹에 충격을 받았다고?"
"......"
"그러고 보니 체격이 밴텀급 맞네! 하도 주먹이 매워서 착각을 했군! 웰터급 쯤 되는 줄 알았어. 아니라해도 적어도 라이트급은 될 줄 알았는데! 참, 이상훈이 눈도 이제 다 됐군! 하핫!"
"......"
그의 칭찬이 묘하게 귀에 거슬린다.
이제야 알겠다.
놈은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깡석현! 이 새끼! 싸우라고 데려왔더니 어디서 토크 쇼만 하고 있어? 빨리 주먹 안 날리고 뭐하고 있어?"
최욱이 울부짖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설유연의 상태가 영 좋지 못하다.
박선호의 무릎에 앉아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신음소리를 흘린다.
"너, 이름이 강석현이구나! 이 싸움은 내가 이겼어!"
"......"
"이유를 가르쳐 줄까? 너네 코너에 최욱 같은 놈이 앉아있는 한 석현이 너는 나에게 못 이겨!"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최욱이 내 신경을 분산시키고 있다.
최욱은 아군이 아니라 차라리 적군이다.
그에 비해 낭만검객의 코너에 앉은 박선호는 단수가 높다.
"어맛! 오빠! 안 돼! 저 사람들이 보잖아! 손가락 좀 빼요!"
박선호의 손은 신인 여배우 설유연의 짧은 치마 속으로 사라져서는 나올 줄을 모른다.
"여기에 우리 둘 말고 사람이 또 어디 있어? 야, 설유연! 그렇게 다리를 오므리고 있으면 내 손가락이 아프잖아! 다리 좀 벌려 봐!"
"시, 싫어! 그럼 저기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뭐야?"
"저기서 싸우는 놈들은 사람이 아니야! 투견이지! 개싸움 몰라? 으르릉! 그리고 저 최욱이 놈은 개만도 못한 병신 새끼고!"
"아잉 터, 털 좀 뽑지 마요! 아얏!"
설유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그런 설유연 보다 얼굴이 더 벌개진 사람이 있다.
최욱이다!
"어마! 왜 이래요, 진짜! 빨리 돌려줘요!"
박선호가 설유연의 치마 속에서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천 조각을 기어이 벗겨 낸다.
잠시 자신의 코에 그 작은 천 조각을 가져다 대더니 손에 들고는 의기양양하게 흔든다.
"야! 최욱! 선물이다! 너는 이 년 팬티에 코를 박고 보지 냄새나 맡으면서 딸딸이나 쳐라! 킥킥!"
화려한 레이스가 붙은 그것이 공중에 떴다가 바닥에 천천히 떨어진다.
최욱은 한계에 다다랐다.
눈앞에 보이는 맥주병을 양손에 들고는 미친듯이 박선호에게 달려 든다.
최욱을 본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왜 낭만검객이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했는지, 그리고 최욱이가 나의 약점이라고 했는지를...
낭만검객이 왜 낭만검객이겠는가?
그의 주무기는 칼이다.
잘 다듬은 목검 하나만 있으면 어떤 조직 폭력배도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사시미 칼이나 야구 방망이로 무장을 한 폭력배들도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다행히도 그는 낭만검객이다.
맨손의 상대와 일 대 일 대결에서 목검을 들고 싸우지는 않는다.
문제는 최욱이 맥주병을 들고 박선호에게 달려 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낭만검객이 목검을 들 충분한 명분이 된다.
이래서 바보들 하고는 한 편이 되면 안 된다.
최욱은 멍청이다!
상대가 낭만검객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나로서도 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곳은 나이트 클럽의 룸이다.
천정이 낮다.
낭만검객이 들고 온 목검은 그 길이가 긴 장검이다.
이런 곳에서는 정상적인 검법이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긴칼이 낭만검객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늠름하고 거대한 뿔을 가진 숫사슴이 나뭇가지에 걸려 늑대에게 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늑대처럼 싸울 것이다!
최욱이 아주 오랜만에 보여준 결기에 찬 행동은 곧바로 낭만검객에게 저지 당하고 만다.
최욱이 다치면 안된다.
그것은 바로 나의 패배가 된다.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 놈을 지켜야만 한다.
그것이 용병의 임무고 운명이다.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낭만자객은 자신의 기다란 목검을 들지 않는다.
대신, 두 다리에 차고 있던 짧고 뭉툭한 검은 목검 두 개를 손에 쥔다.
쌍검이다.
일본에서는 소태도라고 하던가?
낭만검객의 쌍검이 최욱의 양 손목을 정확히 때렸다.
최욱의 손에 있던 맥주병이 바닥을 뒹군다.
이번에는 그의 쌍검이 최욱의 머리통을 겨냥한다.
위험하다!
어쩌면 최욱이 죽을 지도 모른다.
나는 몸을 날려 최욱을 밀어낸다.
그리고 그 쌍검을 내 몸으로 대신 받아 내었다.
고수의 목검은 내가 상상한 이상의 위력이다.
그리고 고수의 손속은 맵고 잔혹하다.
조금의 인정도 보지 않고 내 약점을 정확히 가격해 들어온다.
나는 바닥을 기었다.
낭만검객의 구둣발이 내 목을 밟고 있다.
그가 박선호 쪽을 돌아 본다.
내 운명은 이제 박선호의 손에 달려 있다.
콜로세움의 고대 검투사 경기가 이랬다고 하던가?
승부가 나면 그 경기를 주관한 로마 황제가 패배한 검투사의 생사 여탈권을 가진다고 한다.
황제가 엄지손가락을 세우면 살아남고, 땅을 향해 내리 꽂으면 죽어야 한다.
나는 지금 패배한 검투사다.
이제 모두 끝이 나고 말았다.
"꺾어!"
내 어깨를 구둣발로 밟고 오른 팔목을 잡고 있던 낭만검객 이상훈이 고개를 들어 박선호를 쳐다본다.
"저, 도련님! 이놈 하고는 승부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목검을 쓰지 않고도 이런 애송이는 언제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어이! 이상훈 씨! 사람들이 낭만검객, 낭만검객 하니까 진짜 무사라도 된 걸로 착각하는 거 아냐?"
"하지만, 팔을 꺾어 버리면 이놈은 다시는 복싱을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꺾으라는 거잖아!"
박선호의 말에도 이상훈은 머뭇거린다.
"참! 우리 낭만검객 님의 무사도 정신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좋아! 우리 무사님 체면 한 번 세워 줄까?"
"도련님, 감사합니다!"
"아, 아직은 아냐! 최욱 저놈 이야기도 들어 봐야지! 야! 최욱! 네가 결정 해! 저놈 팔을 꺾어버릴까? 아니면 이년을 내가 이 자리에서 따먹어 버릴까?"
최욱은 망설이지 않고 나를 버린다.
당연한 선택이다.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거 너무 재미없잖아? 주군과 장수와의 의리? 뭐, 그런 것이 나와야 흥정하는 재미가 있을 텐데 말이야! 이건 주군 쪽이 너무 그릇이 작지 않나? 자기를 지키려다가 대신 맞아서 쓰러진 장수를 너무 쉽게 버리는 거 아냐? 저런 충성스러운 놈도 구하기 힘든데 말이야!"
"......"
"우리 낭만검객 님은 어떻게 생각해? 저 최욱이란 놈이 나쁜 놈이지?"
"도련님이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저는 따를 뿐입니다."
"그래? 그게 정답이지! 아주 좋아!"
박선호가 신인 여배우 설유연을 테이블에 엎어 놓는다.
하얀 그녀의 엉덩이가 VIP 룸의 화려한 조명 아래에 꿈틀거린다.
"아얏!"
설유연의 비명소리다.
박선호가 손바닥으로 설유연의 허여멀건 궁둥짝을 갈긴 것이다.
여자의 여린 엉덩이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남는다.
"야! 설유연! 들었지? 저 최욱이란 놈이 저런 놈이야! 내가 어떻게 할 거 같아?"
"내가 저딴놈 팔 꺾어 봤자 뭐 하겠냐? 내가 뭘 원하는지는 당연한 거 아냐? 그런데 저 병신같은 최욱 놈은 선택을 해도 꼭 좆같은 선택을 한다니까? 대가리 나쁜 놈은 역시 안돼! 큭큭!"
박선호가 설유연의 옷을 하나씩 찢어 발긴다.
불빛 아래 그녀의 허연 나신이 드러난다.
"설유연 너도 혼 좀 나야지! 안 그래? 어디 감히 나 박선호랑 저 최욱 같은 좆같은 놈을 놓고 저울질을 해?"
"아악! 사람 살려!"
박선호가 필사적으로 몸을 빼서 달아나려는 설유연의 뺨을 왕복으로 갈긴다.
설유연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겁을 집어먹은 여자가 달아나려 한다.
"이게, 오빠가 훈계를 하시는데 감히 도망을 쳐? 엉?"
박선호가 어퍼컷을 설유연의 배에 쑤셔 넣는다.
어설픈 주먹이지만 여린 여자의 몸은 그 주먹을 감당하지 못한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캑캑 거린다.
이제 여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
박선호가 잡아 끄는 데로 끌려 다닌다.
박선호는 여자를 테이블에 올려 놓는다.
여자가 꿈틀거린다.
하얀 몸뚱아리와 대비되는 검은 풀숲이 이채롭다.
그 아래로 벌건 속살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거듭한다.
"야! 카메라 들고 오라고 그래! 이 년 사진 좀 찍어 두자! 계집애들 따먹어 보니 나중에 남는 건 사진뿐이더라!"
설유연이 수치심으로 사색이 된다.
"뭘 그렇게 놀라? 배우가 사진 찍는게 부끄러우면 어떻게 배우질을 하냐?"
"그것만은 안돼! 제발!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늦었어!"
"시키는 것은 뭐든지 다 할께요. 사진은 찍지 말아요, 네?"
"설유연 너는 어차피 내가 시키는 데로 다 해야 해! 클클클!"
"아악!"
박선호가 여자의 두 다리를 찢어버릴 듯 활짝 벌린다.
벌건 속살이 아낌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최욱은 체념이라도 한 듯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으악! 켁!"
이 비명소리는 설유연이 아닌 박선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이상훈이 카메라를 가져오라고 지시하는 틈에 그의 구둣발이 내 몸에서 떨어졌고 나는 온몸의 힘을 모아 용수철 같이 튕겨 올랐다.
내 주먹에 이상훈이 바닥에 나뒹군다.
나는 그대로 박선호의 목을 잡아챘다.
내 팔에 목이 감긴 박선호가 켁켁거린다.
"빨리 옷 입고 내 뒤를 따라와요! 어서!"
넋이 빠져 있던 설유연은 아직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만 있다.
최욱이 뒤늦게 일어나 설유연에게 옷을 챙겨 준다.
낭만자객 이상훈이 목검을 들고 나에게 달려들려 하지만 이미 승부는 끝났다.
나에게는 최고의 인질이 있다.
"아악! 사람 살려!"
박선호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진다.
나는 한 손을 놈의 뒤어서부터 넣어 놈의 불알을 움켜쥐고 있다.
"한 놈이라도 움직이면 이놈 고자로 만들어 버린다! 알겠어?"
박선호가 데리고 있는 어깨들이 룸 안으로 들이닥쳐서 박선호를 구하려 한다.
"아악! 움직이지 마! 제발! 이놈이 말하는 데로 해! 으.허.헉!"
영장류가 낼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비명 소리가 박선호의 입에서 터져 나온다.
창자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가래 끓는 소리같이 들린다.
"야! 강석현! 이 바보같은 놈! 멍청한 자식! 하아!"
이상훈이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감히 어떻게 손을 쓰지는 못한다.
얼굴에 당혹함이 역력하다.
이상훈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되었다.
나도 안다.
낭만검객이 나에게 호의를 보였다는 것은!
하지만 나 혼자 무사히 나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최욱 놈에게 저 여자를 구하라는 의뢰를 받았고, 그 의뢰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무사히 복싱을 할 수 있고, 민예린 그녀가 무사할 수 있다.
나에게는 애초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VIP 룸 밖에 펼쳐진 풍경은 살벌하다.
사시미 칼에 야구 방망이로 무장한 건달들이 득실거린다.
하지만 나에게는 인질이 있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나는 주저 없이 놈의 불알을 터뜨려 버릴 것이다.
박선호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손수 손을 휘저어 길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