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재벌 2세들의 유흥
"어? 이게 뭐야? 웬 수표야? 그것도 백만 원?"
"회비에요. 아직 한 번도 못 드렸잖아요. 그리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 말씀을 드려야 될 거 같아서..."
"......"
응?
관장님이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눈이 바알갛게 충혈이 되신다.
한참을 그러고 계시다가 입을 여신다.
"내가 더 고맙다. 강석현!"
"......"
"너 같은 놈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내 인생의 기쁨이다. 언제까지 이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무슨 말씀이세요? 평생 함께 해야죠! 기사 보셨잖아요? 나도 알렉스시 아르게요처럼 될 겁니다. 세 체급, 아니 네 체급을 석권하는 슈퍼 스타가 될 거예요!"
"원, 녀석도! 말이라도 고맙다."
"말만이 아니라 꼭 그럴 겁니다."
"석현아! 복싱이란 게 그런 것이 아니다. 너도 다음에 프로복서가 되면 알겠지만, 복싱에서 제일 중요한 건 프로모터야! 아무리 좋은 선수라도 프로모터가 빅 매치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
"붙는 시합마다 전부 이기면 되죠! 그것도 K.O 로!"
"원, 녀석! 아주 기가 살았네, 살았어!"
"......"
"너, 미들급의 슈퍼스타 마빈 헤글러( Marvin Hagler) 알지?"
"알죠! 헤글러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구."
"그 헤글러가 50번이 넘게 싸우면서도 세계 챔피언 근처에도 못 간 이유가 뭔지 알아?"
"......"
"너무 강해서 그래! 헤글러가 터무니 없이 강해서 그런 거야! 너무 강하니까 챔피언이 도전을 받아주지 않아!"
"......"
"복싱은 비즈니스거든! 나도 그 말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결국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어! 세상에 패배한 거지!"
"결국 헤글러는 챔피언이 되었잖아요? 나는 관장님과 함께 갈 겁니다. 시간은 좀 많이 걸려도 상관없어요!"
관장님이 나를 꽈악 안아준다.
왜 이러시나?
쪽팔리게?
설마 계집애들처럼 눈물을?
설마!
"강석현! 잘 들어! 나는 진정 믿을 수 있는 프로모터만 있으면 그 사람에게 너를 보낼 거다.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그때까지 네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저는 관장님이 아무리 저를 싫다고 떠밀어도 결코 떠나지 않을 겁니다. 제 고집 아시죠?"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지금 최 관장님은 울고 계신다.
왜 이렇게 약해지셨나?
혹시, 티브이 건강프로에서 말하던 갱년기 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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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있다.
하나는 중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소한 것이다.
자꾸 키가 크고 있다.
175cm를 결국 넘더니 177cm에 육박한다.
내년이면 키가 더 클지도 모른다.
키가 크면 좋은 거 아니냐구?
체중도 함께 느니까 문제다.
지금까지 나는 감량이란 것은 걱정도 하지 않고 살았다.
대회를 앞두고 맹훈련을 하다 보면 체중은 절로 한계 체중 근처로 왔으니까.
이제는 문제가 다르다.
체급을 올리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밴텀급(54kg)에서 체급을 올려 페더급(57kg)으로 뛰어야 하나?
그것도 나쁘지 않다.
조금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페더급을 지나 라이트급(60kg)까지도 내 주먹이 통한다는 자신이 있다.
"무조건 올려야 해! 석현이 너 나이를 생각해! 올림픽은 내년이야! 그때까지 키가 계속 클걸? 지금은 감량을 한다지만 그때는 어떡할래?"
문제는 페더급이 되면 올림픽 대표 선발의 기회가 없어질 수도 있다.
내가 선발전 참가 자격을 확보한 것은 어디까지나 밴텀급이니까!
관장님이 여기저기 알아보고 계시지만, 아마추어 복싱협회에서 아직 허락하지 않는단다.
하긴 기대도 하지 않았다.
S체대의 김 교수께서 누구 좋으라고 그러겠는가?
그래도 고일상 기자가 기사도 쓰고 해서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체급은 올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페더급 선수다.
선발전 참가가 안된다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프로 무대로 갈 것이다.
그때는 주니어 페더급부터 시작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관장님이 말씀하신다.
뭐 알아서 챙겨주실 거다.
관장님을 믿으니까!
사소한 문제는 진짜 작은 문제다.
체급을 올리는 중대한 문제에 비하면 별것 아니다.
최욱 녀석이 부탁한 원터치 말이다.
아무래도 상대가 조직 폭력배인 모양이다.
여자들에게 폼을 잡기 위해 광풍회라는 조직을 운영하시는 최욱 녀석, 아니 선배님 께서 신인 여배우한테 푹 빠지셨단다.
그런데 재벌 3세의 애정 행각에 왜 나란 놈이 필요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설마하니 그 여배우를 마음에 둔 남자들끼리 결투를 별이고 승자가 그 여자를 차지하는 시스템인가?
그거 옛날 유럽식 아닌가?
기사 둘이서 백마를 타고 결투를 벌이고는 공주님께서는 숨 죽이며 그 승부를 지켜보는 그런 짓 말이다.
알고 보니 최욱 그 자식, 대단한 로맨시스트다.
무식한 내가 몰라뵈었다.
다 좋은데 왜 엉뚱한 사람을 끼워 넣고 그러시나?
자기 혼자서 그냥 로맨틱하게 사시면 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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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특급호텔 나이트 클럽 VIP 룸이란 곳에도 다 와본다.
그야말로 별천지다.
터무니없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양주와 맥주병이 주욱 늘어섰다.
별별 과일과 비싸 보이는 안주가 세팅된다.
예쁜 꽃들도 테이블 위에 멋지게 차려진다.
그리고 자리에는 진짜 꽃들이 활짝 피었다.
여자들이다.
처음에는 연예인처럼 예쁜 여자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연예인들이란다.
최욱과 그의 친한 친구들의 모임 자리다.
다들 유력한 집안의 자식들이란다.
나는 어디 앉았냐구?
앉기는!
우두커니 서서 문 앞을 지키고 있다!
말 그대로 나이트 클럽 문지기다!
보디가드라는 좋은 표현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그리 좋게 들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일 대 일 싸움판보다는 낫지 않느냐구?
뭐 그럴 수도 있다.
아직까지는!
최욱은 내일 학교를 졸업한다.
대학을 가야 한다.
그래서 몇 달 전에 학력고사도 쳤단다.
엄청난(?) 성적을 받아내고야 말았단다.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국내 대학은 도저히 불가능한 성적이란다.
전문대도 어렵단다.
대단한 머리다!
하긴 공부 쪽은 내가 뭐라고 할 형편은 아니다.
아마 나도 올해 학력고사를 칠 것이고 만만치 않은 성적이 나올 것이니까!
그래도 최욱 보다는 일 점이라도 더 받고 싶다.
사나이의 자존심, 뭐 그런 거?
하위권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최욱은 이길 자신이 있다! 헤!
"최욱 너, 유학 간다며?"
"그럴 거 같아! 한국 대학들은 너무 후지잖아? 미국 대학 보다 훨씬 후진 것들이 들어가기는 더럽게 어려워요! 하여튼 대한민국 좆같아!"
최욱 녀석, 학력고사는 지게 좆같이 쳐 놓고 엉뚱한 대한민국한테 화풀이다.
나는 최욱 같은 저런 놈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시험만 좆같이 칠 것이다.
입구를 지키는 보디가드는 몹시 지루했고, 그래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며 혼자 실실 웃고 있었다.
나만 지루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이 자리에 불려오신 아름다운 꽃들도 심심해하신다.
하긴 이해가 간다.
그들의 대화 수준은 높지가 않다.
오히려 저렴한(?) 편이다.
아니 높낮이가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말들이 아니면 도저히 대화를 이어가지 못한다.
연예인인지 일반인인지가 무척 궁금했던 모 여 가수께서는 그들의 놀림과 조롱을 견디지 못하시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그 부끄러움은 보디가드인 내 몫이다.
사실 궁금하긴 했다.
잘난 재벌 3세께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겨우 차지했다는 미모의 신인 여배우 말이다.
어느 정도길래 최욱이가 칼침을 맞을 각오를 하고 쟁탈전에 나선 것일까?
TV 에서 본 것보다 더 예쁘다는 말이 사실일까?
사실이다.
예쁘긴 진짜 예쁘다.
민예린 보다도?
그건 대답하기 어렵다.
여자들은 다들 자신만의 매력이 있으니까...
혼자 묻고 혼자 답을 한다.
그리고 혼자 웃는다.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다.
"최욱 씨! 저 사람 누구야?"
"응, 내 고등학교 동아리 후배 놈이야. 오늘 저놈이랑 같이 술이라도 마시자고 불렀는데, 하늘 같은 선배랑 합석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면서 기어코 저러고 있네? 혹시 나를 해코지하려는 놈이라도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저러는 거야 글쎄!"
"우와! 착하다!"
"그렇지? 그래서 내가 귀여워하고 있어! 집안이 어려운거 같아서 용돈도 주고!"
"우와! 최욱 씨 되게 멋있다!"
아주 년놈들이 쌍으로 지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냐?
최욱의 귀여운 후배가 되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으니 말이다.
"저 후배라는 사람 복싱 선수라며?"
"응, 아마추어 밴텀급 챔피언이야. 3학년도 아닌 2학년이 아마추어 무대를 완전히 평정했어! 앞으로 세계 챔피언이 될 놈이야! 물론 내가 잘 키워준다는 전제하에 말이지."
"그런데 최욱 씨도 엄청 강하다면서? 그러면 누가 더 강해? 저 복싱 선수랑 최욱 씨랑!"
"하하! 유치하게 그런 것이 뭐가 궁금해?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주먹보다 머리! 의리! 그런 게 훨씬 중요해."
아주 지랄을 한다!
그래서 머리 좋은 놈이 학력고사 340 점 만점에 120 점을 맞았냐?
체력장 20점 빼면 니가 받은 점수는 단 100점!
그리고 최욱 네가 의리를 말하면 안 되지.
이 의리없는 새끼!
"그래서 누가 더 세단 말이야? 대답해 줘, 응?"
"최욱 선배님이 더 강하십니다!"
으아!
결국 오늘 내 임무의 절반은 수행을 한 기분이다.
최욱이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한테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펴 보인다.
나 지금 아부한 거 맞지?
몸에 닭살이 돋는다.
그러니 이제는 좀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최욱 놈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다.
최욱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인다.
그가 기분이 좋아지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것 같아 무척 가슴이 아프다.
"깡석현! 이리 와서 내 잔 받아라!"
"괜찮습니다. 형님을 모시는 놈이 술을 마셔서는 안됩니다!"
신인 여배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나는 복싱 선수로서 몸을 만드는 데 해가 되는 어떤 짓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술!
담배!
절대 가까이하지 않는다.
내가 즐기는 유일한 낙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기름기 없는 살코기 스테이크 하나다.
그런데 내 대답이 신인 여배우를 감동시켰고, 그것이 최욱을 더더욱 기쁘게 한 모양이다.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일까?
아니면 나쁜 날일까?
아무튼 어떤가?
최욱이 놈의 기분은 최고다.
나는 놈에게 받은 이백만 원 수표의 값을 주먹이 아닌 말과 연기력으로 때운 것 같다.
나는 혹시 복싱이 아니라 연기에 소질이 있는 것이 아닐까?
더욱 좋은 것은 최욱이가 이제는 민예린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은 순전히 내 육감이다.
맞았으면 좋겠다.
"욱이 너 유학 가면 자주 못 보겠네!"
"걱정 마! 틈틈이 와야지! 한국보다 놀기 좋은 데가 세계에 어디 있어?"
"대학은 어디로 갈 거야? 하버드?"
"처음에는 아무 곳이나 가도 된데. 좀 있다가 학교 옮기고, 기부금 착실히 내고하면 하버드도 가능하다고 그러더라?"
"공부 열심히 해야겠네!"
"기부금을 열심히 내야지! 낄낄!"
"한국 대학들은 너무 고리타분해! 왜 기부금 입학을 금지해서 우리 최욱이 같은 능력있는 청년을 외국으로 공부하러 나가게 만드냐?"
"그러게 말이야! 이게 다 외화 낭비야, 외화 낭비!"
"맞아! 기부금 입학 반대하는 놈들이 멍청한 거라니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지!"
"지금은 군인 출신 대통령이 꽉 잡고 통제를 하니까 그나마 나라가 돌아가는 거래! 만약 민주화랍시고 개 돼지 같은 놈들이 설쳐 되면 진짜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냐? 바로 남미 꼴 나는 거라니까?"
최욱이 친구들 중에는 나름 공부를 하는 놈도 있는 모양이다.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며 자신의 유식함을 과시한다.
뭐 그게 정상이 아니겠나?
무슨 말인지 나는 잘 알아들을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라를 걱정하는 젊은 예비 재벌들의 모습이 기특해 보인다.
그런데, 최욱이를 괴롭히는 놈이 과연 어떤 놈일까?
누가 감히 재벌을 괴롭힐 수 있단 말인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걱정도 되지 않는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내가 나서면 되니까!
사실, 이상한 점이 많지만 더 이상 생각하다가는 가뜩이나 나쁜 머리 깨지고 말 것이다.
사람은 능력껏 살아야 한다.
그래야 탈이 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