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화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 (3) (13/88)



〈 13화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 (3)

오늘은 준결승전 경기가 열리기 때문인지 체육관의 관중수가 확실히 늘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영향이다.

다가오는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들을 예측해 볼 수 있는 대회다.


관중이 많으면 함성이 커지고, 그 함성은 누구에게는 부담으로, 누구에게는 격려가 된다.


나는 아무래도 프로 체질인가 보다.


보는 사람이 많으면 힘이 난다.

그중에 이쁜 여자라도 있으면 더더욱 말이다.


오늘도 민예린이 링 사이드에서 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권순찬! 너 오늘 죽었다!





******



시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권순찬은 대단히 소극적인 자세로 시합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심판이다.

주심이 노골적으로 권순찬에게 호의적이다.


바꿔 말하자면 나에게 적대적이다.

링 안의 적은 권순찬 만이 아니다.

심판도 권순찬과 함께 나와 싸우려 든다.



조금만 거리를 좁히면 권순찬이 나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주먹이 아닌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온다.

녀석의 머리에 눈두덩이를 부딪혔고 살짝 찢어졌다.



피가 흐른다.

덕분에 거리 측정이 어렵다.

권순찬 놈은 다부진 체격에서 나오는 힘이 좋다.

한마디로 말해 장사다.


 힘으로 나에게 복싱이 아니라 씨름 기술을 펼친다.


덕분에 두 번이나 캔버스 바닥에 뒹굴었다.

어이 없게도 그중 한번은 나의 다운으로 처리 되었다.

아무리 아마추어 경기에서 다운이 득점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는 하지만 무척 기분이 나쁘다.

관장님이 격렬하게 항의를 했다.

'홍 코너 테크니컬 파울!'

혹 때려다  붙이고 말았다.


어이 없는 일이지만 악법도 법이란다.

지하의 소크라테스가 땅을 치며 통곡할 일이다.


이렇게 되면 판정으로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내가 착각하고 있었다.

채점을 맡은 부심들은 모두  교수의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판정으로 가면 무조건 내가 지게 되어 있다.

판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

"우우! 심판 뭐 하는 거야? 눈 똑바로 떠!"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진다.

다행히도 관중들은 내 편이다.

하지만 관중들이 채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길이 하나 밖에 없다.

권순찬을 기어이 쓰러뜨려야 한다.


아직 3 라운드가 남아 있다.

"석현아! 괜찮아? 앞은 잘 보여?"


"괜찮아요. 잘 보여요! 이 정도 성처 쯤은!"

권순찬의 머리에 부딪혀 찢어진 상처가 생각보다  모양이다.

상처를 지혈하는 관장님의 표정이 좋지 않다.

"권순찬 저 자식! 엄청난 돌대가리에요! 아파 죽겠네! 에이씨!"


"무리할 필요 없어. 시합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상태가 좋지 않으니까 무리하지 마. 기회는  오는거 알지?"

글쎄?

기회가 또 올까?


날이면 날마다 기회가 온다면 뭐가 걱정일까?

"머리에부딪힌 상처가 깊어. 자칫하며 눈에 부상이 번질수도..."


"걱정 마세요!  괜찮으니까!"

관장님의 말씀이 틀렸다.


이 시합이 전부다.

오늘 이기지 못하면 올림픽은  건너간다.


그러면 4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4년 동안 배고픈 선수 생활을 지탱할 여력이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오늘 이겨야 한다.


반드시!


3분 남았다.

아니, 어쩌면 그전에 심판이 경기를 중지시킬지도 모른다.

내 찢어진 눈 상처를 이유로 말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끝장을 보아야 한다.

그것도 이른 시간 내에!

'땡!'


 소리와 함께 마지막 3 라운드가 시작되었다.



가드를 아예 내려 버렸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권순찬에게 도발을 해 본다.

권순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쩌면 굴욕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제작년까지만 해도 나 같은 놈은 권순찬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패배했었고, 오늘은 도망만 다니고 있다.


아무리 코치의 지시라고는 해도 열패감을 느끼지 않을  없다.

"홍 코너! 강석현 파울!"

또다시 나에게 파울이 주어진다.

상대를 조롱하는 비신사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이 이유다.

다시 1점 감점이다.


누적 파울이 3개니까 도합 3점 감점, 이대로 판정으로 끌려간다면 결과는 뻔하다.


그리고 그것을 권순찬도 알고 있다.


3분만 버티면 자신이 이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권순찬의 수비는 수준급이다.

녀석은 얼굴 쪽에 가드를 단단히 하고서 내가 들어오는 길목을 지켜 카운터만 틈틈이 날린다.

그나마 수비가 허술한 곳은 녀석의 복부뿐이다.


하지만 녀석의 복부는 잘 단련되어있다.

연속적인 공격이 아닌 단발 공격으로 침몰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녀석의 복부를 공격하려면 녀석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서 오랫동안 머물  있어야 한다.


결코 남는 장사가 아니다.

권순찬이 이런 작전으로 나올 때는 아웃복싱을 펼치며 포인트를 쌓아가는 전략이 가장 합리적이다.

그런데 그 작전이 봉쇄되어 버렸다.

어느 누구도 아닌 심판의 손에 말이다.

덧없이 1 분이 지나가고 말았다.

남은 시간은 2분!


이제 승부를 걸어야 한다.

밴텀급에서도 가장 강한 복근을 자랑하는 권순찬을 복부 공격을 통해 침몰시켜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내 펀치가 통해야 한다!

그리고, 접근전을 펼치는 동안 녀석의 카운터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녀석의 사정거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권순찬의 카운터펀치 두 방을 슬쩍 얼굴을 틀어서 가까스로 피했다.

이제 녀석은 클린치를 하려고 엉겨 붙을 것이다.

이 틈이다!

녀석의 복부가 틈을 보였고 내 어퍼컷을 쑤셔 박아 넣었다.

하나! 둘! 셋!

용수철 같은 레프트 어퍼컷만 세 차례 연속해서 권순찬의 복부에 우겨넣었다.


처음 한 방은 녀석도 대비를 했다.

내 주먹을 놈의 복근이튀겨 내는 느낌이다.

두 번째 어퍼컷은 놈이 예상하지 못한 눈치다.


똑같은 레프트 어퍼컷이 연속해서 강하게 들어올 줄은 몰랐던지 참았던 숨이 흐트러진다.


내 주먹을 튕겨내지 못하고 충격을 받는다.


세번째 어퍼컷이 치명타였다.


녀석이 배를 움켜잡고 앞으로 꼬꾸라진다.

권순찬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뒹군다.

끝났다.

놈은 일어나지 못한다.


심판의 카운터가 천천히 진행된다.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치다.


그렇다고 결과가 바뀔 상황은 아니다.

최 관장님이 링 위로 올라와 펄쩍펄쩍 뛰더니 나를 번쩍 들어 올리신다.


나이도 있으신 분이 주책이다.


그리고, 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관중석에서 낯이 익은 여인 하나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예린이다.

오늘 내가 그렇게 고전한 것인가?

다들 내가   알고 있었던 거야?


설마!


나, 강석현이야! 깡석현이라구!





******




준결승전 시합을 마친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민예린도, 고일상 기자도 아니었다.

김광수였다.

광산상고 2학년 같은 반. 그 중에서도 광풍회(狂風會) 2학년 대표를 맡고 있는  말이다.

"깡석현! 축하한다! 대단하던데?"

녀석이 웬일인지 고운 말로 축하를 다한다.

하지만  마음까지는  수가 없는 노릇이다.


녀석에게 내가 고운 놈은 아닐테니까.

"고맙긴 한데, 여긴 무슨 볼 일이 있어서  거야? 본론부터 말해!"

"어어! 괜히 나한테 성질 부리지 말어! 난 심부름 온 거야. 회장님 심부름!"


녀석이 말하는 회장님은 3학년의 최욱이다.

또 무슨 일일까?


버팅 때문에 다친 눈두덩이의 상처가 녀석의 말을 듣고 나니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뭐긴 뭐겠어? 원터치 한   달라고 하신다.  알잖아?"

"싫은데? 나 바빠!"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명색이 재벌 3세가 아닌가?

조용히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모셔 줄 것인데  들쑤시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누구랑 시비가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문제인지는 알 것 같다.


분명 여자 문제일 것이다.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다가 문제가 커진 것일 거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니까.

"강석현! 회장님께서 이번  번만 부탁하신다잖아.  번만 뛰어주라!"

"싫어! 이번에도 여자 문제지?"

"재벌이시잖아? 능력 있어서 여러 여자 만나겠다는데 누가 말려?"

"아무튼 난 빠질래! 광수 네가 한  붙어 줘! 혹시 아냐? 회장한테 총애를 받게 될지?"


마침 최 관장님과 고일상 기자가 들어온다.

광수 녀석은 입맛을 다시며 물러난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최욱이 아니다.

또다시 나를 귀찮게 것이 틀림없다.

"강석현 선수! 아주 잘했어!"


고일상 기자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아, 네! 그런데 잘 하진 못했잖아요? 바보같이 시합을 풀어가는 바람에..."


나는 시합 내용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복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게  선수 잘못인가? 심판 놈들이 그렇게 보는데 어떡할 거야? 손만 뻗어도 파울을 불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보기엔 분명히 먹었어. 김 교수한테!"


"고 기자님! 기자님이 보기에도 그렇지요? 우리 석현이가 오늘 졌으면 내가 링에 들어가서 드러누울 생각이었어! 나쁜 놈들!"

"그런데, 마지막 어퍼컷 3연타는 어떻게  거지? 강 선수 어퍼컷이 그렇게 좋았었나? 주무기인 원투 스트레이트 못지않던데? 어퍼컷 메커니즘이 기가 막혔어! 완전히 돌고래 처럼 솟구치듯 말이야!"


"사실, 나도 놀랐어요. 권순찬이 맷집이 보통이 아닌데 석현이 어퍼컷을 못 견디더군요."


민망한 칭찬들이 이어진다.


사실 이겼으니 망정이지 졌으면 어떡할뻔 했나?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시합이 은퇴 시합이 될 뻔했다.

"빨리 병원 가자! 찢어진거  매야지? 결승전에 지장 없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안 맞으면 되죠."

"허이구! 상대가 그냥 둘 거 같아? 찢어진 곳만 골라 때리지! 나라도 그러겠다."

"......"

"최 관장님은 왜 선수 기를 죽입니까? 강석현 선수! 결승전에서 이기기만 해! 내가 기사 멋지게 써  테니까!"

최 관장님과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는 내 팬클럽 회장님께서 먼저 와서 수속을 마치고 기다리고 계셨다.


단지 세 바늘 꿰맬 뿐인 작은 상처인데도 팬클럽 회장님은 눈물을 보이신다.

괜히 내 가슴이 뭉클하다.


관장님은 체육관으로 돌아가시고 그녀와 둘만 남았다.

"결승전이 모레라구? 이 상처를 해 가지고? 그건 곤란한데? 더 맞으면 상처가 크게 벌어질 수 있어요! 잘못하면 실명이야, 실명!"

의사 선생님이 겁을 준다.

나는 괜찮은데 민예린이 겁을 먹는다.

하얗고 커다란 반창고가 내 눈두덩이에 터억 붙었다.

괜히 크게 다친 사람처럼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스테이크 먹고 가!  오피스텔로 가자!"

늘 그렇듯 민예린이 나를 잡는다.

그녀의 말이 묘하게 섹시하게 들린다.

민예린은 나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한다.

최신형 엑셀 자동차가 도로 위를 질주한다.

기름 한 점 없는 살코기 스테이크에 버터를 두르고 소금, 후추를 절묘하게 곁들여 맛있게도 만든다.


먹으면 바로 힘이 난다.


피로가 풀린다.

맛있게 먹는 나를 민예린이 곁에 붙어서 지켜본다.

"혹시, 최욱 녀석이 석현이  찾아오지 않았어?"

"최욱은 아니고, 광수 녀석이 찾아오긴 했는데..."

"최욱 그놈도 참,...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하다못해 대회가 끝날  까지라도 내버려두라고 했는데도!"


민예린이 한숨을 내쉰다. 뭔가 답답한 일이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일이야, 뭐 뻔하지. 또 여자 문제지 뭐! 하여간 그 집 남자들은 못 말린다니까! 휴우!"


"......"

"일단, 석현이 너는 결승전만 신경 써! 다른 건 생각하지 말구!"

말을 꺼내 놓고 어떻게 신경을 쓰지 말라는 건지 모르겠다.


최욱은 자기 눈에 들어오는 여자를 그냥 두고 보지 않는 놈이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여자일수록 더더욱 성욕을 느끼는 변태같은 놈이다.


내가 본 최욱이란 놈은 그런 놈이다.

혹시?


최욱 그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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