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현대판 검투사 ( Gladiator )
가난한 복서와는 상극이라는 돈 많은 놈을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관장님이 가르쳐주시지 않은 것이 있다.
돈이 많은 놈은 권력도 가지게 되어 있고, 그런 놈이 힘센 놈을 부리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 말이다.
돈이란 놈이 힘이 세다는 것은 이제 알겠다.
하지만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깡석현의 체면이 있지 결코 무릎을 꿇지는 않을 것이다.
돈 있는 자는 여유가 있어서일까?
위압적인 말로 협박을 하지 않는다.
달콤한 말로 회유하는데 더 능하다.
"깡석현 너, 대회 준비한다며? 올림픽 나갈 생각이라며?"
"......"
재벌3세 께서는 아는 것도 많으시다. 괜히 비밀이라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다.
"권투부도 없는 학교에서 운동하는게 어렵겠구나! 학교에 권투부라도 창단해달라고 해볼까?"
"그,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이 학교를 천년만년 다닐 것도 아니고 일년만 더 다니면 졸업이야. 졸업하기 전에 후배들을 위해 뭔가는 해 줘야지."
"......"
"하긴 좀 늦었다. 너도 이제 2학년이 되잖아? 그러니까 진작 내가 손 내밀때 잡았으면 좋았지!"
"......"
"그럼 이건 어때? 석현이 네가 다니는 체육관이 은행 융자라도 받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데... 뭐, 융자가 그렇다면 투자를 받는 것도 괜찮을테고..."
"그건, 제 일이 아니라서 모르겠습니다."
내 일이 아니긴 하지만 나에게도 좋은 일인 것은 알겠다.
더구나 최 관장님한테는 정말 좋은 일일 것이다.
돈에 항상 쪼들리는 분이니까...
기분이 이상하다.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지만 무릎을 꿇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느낌이다.
"광풍회 회원들은 마음껏 먹고 마셔라! 좋은 시간 보내야지? 내가 사는 새학년 축하주다!"
카페 안에 함성이 터져 나온다.
모두들 이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카페의 문이 잠긴다.
외부 손님은 더 이상 받지 않겠다는 거다.
사실 광풍회 회원들 빼놓고 다른 손님들은 애초에 없었다.
하긴 누가 이런 분위기에서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고 싶겠는가?
"어머! 이 학생은 잘 생겼네? 체격이 너무 좋다! 누구야?"
웬 여자가 다가와서 나를 보고 뭐라고 한다.
최욱과는 잘 아는 사이인 눈치다.
"우리 광산상고 후배야. 운동하는..."
"무슨 운동?"
"복싱!"
"아! 어쩐지. 몸이 군살 하나 없이 잘 빠졌더라니...! 이름이 뭐에요?"
"저, 저요? 강석현 이에요. 광산상고 이학년..."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갑자기 여자가 나한테 말을 걸어온다.
그것도 엄청난 미인이 말이다.
"나는 이 카페를 경영하고 있는 '민예린' 이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이 여자,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악수까지 청한다.
얼떨결에 그 손을 잡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 있는 줄 몰랐다.
그리고 따뜻하다.
악수라는 것이 원래 이렇게 오래 하는 것인가?
여자는 내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지긋이 힘을 주어 누르기까지 한다.
나한테 힘 싸움이라도 걸어오는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꽉 잡아서 내가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나?
당혹스럽다.
"어? 둘이서 뭐 하는 거야? 무슨 악수를 그렇게 오래 해?"
최욱이 뭐라고 했고, 그 바람에 나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듯이 놓아버렸다.
여자는 최욱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나를 지긋이 한 번 더 바라본다.
괜히 부끄럽다.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그래도 여자의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카페에 술판이 벌어진다.
시원한 맥주와 비싸 보이는 양주가 테이블마다 가득 차려진다.
스테이크 안주와 과일이 민예린의 지시로 세팅된다.
괜히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고 말았다.
이제 집에 가야 한다.
광풍회와는 그간의 묵은 감정을 모두 풀었다.
앞으로의 학교 생활만은 좀 더 평온해질 것이다.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다.
좋게 생각하자.
이것은 화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행동이다.
"저 먼저 갑니다."
"어, 깡석현! 벌써 가려고?"
"새벽에 신문배달을 해야 해요. 그럼 이만..."
"이대로 가면 내가 미안하지!"
최욱이 내 소매를 잡는다.
그러면서 하얀 봉투를 건넨다.
뭔지 모르지만 내가 받을 이유가 없다.
민예린이 봉투를 낚아채더니 내용물을 확인한다.
십만 원 권 자기앞 수표가 세 장 들어있다.
"삼십만 원이네?"
민예린이 봉투를 잽싸게 내 호주머니에 찔러 넣어 준다.
"택시비야! 깡석현 너한테 특별히 주는 거야. 한 시간만 더 있다가 가! 술은 안 마시더라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
"받아 둬! 저 귀한 도련님한테는 푼돈이야. 하지만 학생한테는 큰돈이잖아?"
내 귀에다 들릴듯 말듯한 나즈막한 목소리로 민예린이 속삭인다.
그 숨결이 너무도 감미로와서일까?
엉겁결에 돈을 돌려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강석현이라고 했지? 아무것도 안 먹던데... 스테이크 가져다줄까?"
민예린이 내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발걸음을 주방으로 향한다.
'쾅! 쾅!'
누군가 카페의 문을 거칠게 두드린다.
민예린이 문으로 다가가 누구인지 확인한다.
저 여자, 보통내기가 아니다.
전혀 서둘지 않는다.
침착하기 짝이 없다.
"최욱이 어디있어?"
다섯 명의 덩지 큰 사내들이 문을 밀치듯 열고 들이닥친다.
카페에는 스무 명이 넘는 광풍회 회원들이 있지만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다짜고짜 최욱만을 찾는다.
오히려 위축되어 보이는 쪽은 최욱이다.
"아, 김정필! 오랜만이다!"
"오랜만? 최욱 네놈이 아주 간 덩어리가 부었더라? 그 간 덩어리 배 밖으로 꺼내서 얼마나 큰지 확인해 볼까? 어디 감히 나 김정필의 여자를 건드려?"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내 새끼라면 행동에 책임을 져야지? 어때? 나랑 한판 뜰까?"
"김정필! 얘들이 보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말로 풀자! 말로!"
"아하! 맞다. 최욱 너는 주먹 쓸 줄 모르는 약골이지? 가진 건 돈 밖에 없는 놈이잖아? 그래서 맞장을 떠야 할때는 꼭 대타를 쓰는 거잖아? 오늘은 어떤 놈을 대타로 내세울래? 너야? 아니면 너?"
김정필이라는 사내가 최욱의 주변을 빙 돌며 싸늘한 눈빛을 쏜다.
나름 광산상고에서 방귀 깨나 뀐다는 놈들이 찍 소리도 못한다.
김광수가 내 귀에다 소곤거린다.
"저놈이 김정필이야!"
"그게 누군데?"
"세상에! 김정필을 몰라?"
"응, 몰라!"
"......"
"김정필이 누군데?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이야? 중요해?"
"그, 그런 건 아니지만 서울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이면 모두 들어본 적은 있을걸? 김정필이라는 이름 정도는..."
김광수의 말에 의하면 김정필은 서울 시내에서도 알아주는 싸움꾼이란다.
유급을 했고, 그래서 아직도 고등학생이지만 나이는 스무살이란다.
주먹 좀 쓴다는 놈들도 김정필 앞에서는 꼬리를 내린다고 한다.
그야말로 스트리트 파이터!
좋게 말해서 스트리트 파이터지 흔히 하는 말로 깡패 아닌가?
미래의 조폭 행동대장이다.
이미 조직에 발을 반쯤 담근 놈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해 보이는데?
그와 맞서 싸우겠다는 간큰 놈이 아예 없단다.
광풍회 회장 최욱이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여자 하나를 건드렸는데 그 여자가 하필이면 김정필의 여자였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정필이 진작부터 최욱을 찾아다니고 있었단다.
최욱도 나름 김정필과 화해를 하기 위해 애를 써 보았지만 그를 달래는데 실패했단다.
그래도 요리조리 용케 피해다녔는데 하필이면 오늘 김정태가 어찌 알았는지 여기까지 찾아왔단다.
'최욱 이놈이 드라마 쓰고 있네!'
이제야 비로소 일의 얼개가 보인다.
최욱이 왜 나를 광풍회에 끌어들이려 했는지, 그리고 오늘 떠들썩하게 시내 한복판에서 환영식을 열었는지 알 것 같다.
또 있다.
아까 나에게 준 삼십만 원!
한 시간만 더 있다가 가면 그 돈이 내 것이라고 한 이유까지도 모두!
'교활한 놈!'
최욱이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히 접수했다.
나는 검투사의 자격으로 오늘 이 자리에 불려 나온 것이다.
그런데 꼭 기분나쁜일만은 아니지않나?
삼십만 원이라!
큰돈이다.
내가 한 달 신문을 배달해서 받는 돈보다 큰 액수다.
그리고, 나는 지금 돈이 궁하다.
그것도 무척...
최욱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김정필과 대치하고 있다.
명색이 광풍회의 수장이다.
더구나 머리수에서도 이쪽이 훨씬 많다.
스무 명의 광풍회 회원들도 모두 일어서서 김정필로부터 회장님을 보호하려고 한다.
김정필 일당은 불과 다섯!
하지만 기 싸움에서 광풍회가 밀리고 있다.
김정필 일당은 그야말로 일당백이다.
현역 조직폭력배들이다.
김정필이 눈을 부라리며 째려보면 다들 그의 눈을 피한다.
혹시라도 김정필과 주먹을 섞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씩씩대는 김정필이 한걸음 다가가기라도 하면 흠칫 놀라 뒷걸음을 친다.
자연스럽게 최욱을 둘러싸고 있던 자들의 동선이 뒤로 밀린다.
덕분에 자리에 앉아서 유리컵의 물을 마시며 스테이크를 기다리던 내가 최일선에 위치하고 말았다.
최욱은 나름 조직의 위엄을 세우느라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하지만 힘겨워 보인다.
자꾸 나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나는 배가 고파 죽겠는데, 왜 자꾸 나를 쳐다보는거야?'
민예린을 쳐다 보았다.
빨리 스테이크나 가져다 달라는 뜻이다.
"이 애송이는 뭐야? 무슨 배짱으로 여기 터억 앉아서 폼을 잡고 있나?"
"......"
"설마, 이 말라깽이가 오늘의 대타라고? 하! 최욱이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 김정필이야!"
"맞아! 이놈이 우리 광산상고 루키 강석현이다. 만만치 않을 걸?"
이건 무슨 상황인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있다.
'쨍그랑!'
김정필이란 놈이 기어이 도발을 해 온다.
나에게 맥주병을 던졌고, 병은 내 뒤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은 이를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나무는 괴롭다.
무척이나!
"여기서들 이러지 말아요! 여긴 내 사업장이야!"
카페 사장인 민예린이 사내들 싸움에 끼어든다.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무척이나 도발적이다.
"그래! 여기서 이러는 건 민폐지! 경찰이 들이닥칠 수도 있고..."
최욱이 드디어 기력을 되찾았다.
싸움을 말리는듯하지만 아니다.
싸움을 부추기려는 것이다.
"이건 어때? 이 건물 15층에 복싱 체육관이 있어. 그곳의 링을 잠시 빌리는 건 어떨까?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어때?"
"난 상관없어. 이 말라깽이 놈을 짓이겨 놓은 다음에는 최욱, 너 차례야!"
"아! 그건 김정필 네가 우리 석현이를 이긴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아!"
이제 결정되었다.
나는 거구의 김정필이란 놈과 싸워야 한다.
동작 빠른 놈 하나가 복싱 체육관으로 올라가서 특설링을 만든다.
나는 광풍회 멤버들을 뒤따라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그 엘리베이터에 민예린이 함께 한다.
이 여자는 왜 따라오는 것일까?
좋은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는 걸까?
웃기는 일이다.
이 와중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김정필도 최욱도 아닌 바로 이 여자 민예린이다.
이 여자 괜히 나한테 친한 척을 한다.
"석현이 너, 돈 필요하지? 이 누나가 한몫 챙기게 해줄까?"
"......"
뜬금없는 곳에서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그것도 조용히, 귓속말로...
"걱정 마! 이 누나만 믿어!"
황당한 여자다.
그리고 그 황당함이 그녀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지도 모른다.
내 싸움 상대인 김정필은 전형적인 스트리트 파이터라고 들었다.
말이 좋아 스트리트 파이터지 냉정하게 말하면 막싸움꾼이 아닌가?
두려워할 것 없다.
더구나 나에게 익숙한 사각의 링이다.
문제 없다.
"이건 복싱이 아니야! 싸움이라구! 그리고 기절하거나 항복하면 승부가 나는 걸로, 알겠지?"
알고있다.
이것은 복싱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여기는 검투장이고 나는 검투사다.
검투사는 이겨야 한다.
지는 순간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김정필은 그야말로 거구다.
얼핏 보아도 190cm 에 가까운 키에 100kg 이 넘는 체중이다.
이렇게 큰 남자와 사각의 링에 함께 서 본적은 없다.
하지만 마음만은 평온하다.
내 주먹에 자신이 생겼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