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광풍회(狂風會) 회장 최욱
어려운 문제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패싸움이다.
문제는 나 하나에 비해서 상대가 좀 많다는 것일 뿐이다.
그래봤자 고등학생의 싸움 아니겠는가?
대장을 잡아야 한다.
그러면 끝난다.
누가 대장일까?
우선 이 싸움판에 나선 대장은 저놈이다.
수제비 귀! 레슬링을 한 놈!
체격이 좋다.
내 주먹이 놈에게 통할 수 있을까?
딱 한 방으로 놈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어설프게 타격을 가해서는 놈에게 붙잡히고 만다.
발을 쓸 수 없는 복서는 무력해진다.
수제비 귀를 가진 놈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수비를 단단히 하고 급소인 턱을 절대 노출시키지 않으려 할 것이다.
놈이 턱을 노출하게 만들면 이기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진다.
결국 시간 싸움이다.
다행히 다른 놈들이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는다.
나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다.
고등부 웰터급 3위 복서 박태식이 꼬꾸라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거다.
괜히 나섰다가 망신을 당하면 광풍회 내부의 입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까지도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여튼 모두들 잔머리들은 기가 막히게 굴린다.
나는 이놈들의 모든 것을 알고 이용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승산이 희박하다.
수제비 귀를 가진 놈의 턱 방어는 너무 단단하다.
틈이 보이지 않는다.
녀석도 내 주무기가 원투 스트레이트라는 것을 철저히 알고 싸움에 임한다.
일 대 일 대결이라면 문제없다.
시도해 볼만한 수가 여럿 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패싸움이다.
한방에 놈을 침몰시켜야만 한다.
길은 하나다.
작전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철저하게 막고 있는 녀석의 턱을 버리고 상대적으로 허술한 명치를 노릴 것이다!
팽팽한 긴장 속의 대치 국면을 내가 먼저 깨뜨리고 치고 들어갔다.
수제비 귀에게 질풍같이 들어갔다.
녀석은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내가 스트레이트를 날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긴 녀석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원투 스트레이트를 어떻게든 견뎌 내면 놈이 이기는 것이니까!
수제비 귀가 예상한 것보다는 내가 두 뼘 정도 깊이 파고들었다.
살짝 굽혔던 무릎을 용수철처럼 튕겨 올리며 내 주먹이 반원을 그린다.
라이트 어퍼컷이다.
내 주먹이 놈의 명치 깊숙이 꽂힌다.
놈이 배를 움켜지며 앞으로 쓰러진다.
이겼다!
생각보다 내 주먹이 강하다.
최 관장님 말씀대로 나이를 먹고, 체중이 증가하니까 파워가 나오는 걸까?
이 기회에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려버려?
그다음은 싸움이 아니라 학살에 가깝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괜히 약한 마음을 먹었다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럭키 펀치에 판이 뒤집힐 수도 있으니까.
한 방에 한 놈씩!
턱이 빈 놈은 턱에, 복부를 비워둔 놈은 복부에 한방씩 꽃아 넣었다.
기가 꺾인 놈들이 내가 주먹을 내밀자 제풀에 주저앉는다.
역시 기가 꺾인 양아치 놈들은 오합지졸이다.
이제 대장만 쓰러뜨리면 된다.
뒤에서 눈빛만으로 놈들을 제어하고 있던 놈!
그 유명한 광풍회(狂風會)의 회장 최욱 말이다.
과연 놈은 무슨 재주를 가졌을까?
얼마나 잘 난 놈이길래 이런 놈들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부린단 말인가?
레슬링?
복싱?
아니면 유도?
그것도 아니면 타고난 스트리트 파이터?
무척 궁금했었다.
이제 확인해 보련다!
폭풍 같이 몰아치는 내 기세에 놀라, 광풍회 회장 최욱을 둘러싸고 있던 보디가드 같은 호위조가 일순 무너진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처럼 그놈에게 가는 길이 훤하게 열린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보통 놈이 아니니까!
그리고 신중해야 한다.
잘못하면 한방에 내가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아이고! 사람 살려! 강석현 내가 잘못했어! 그만!"
내가 최욱의 턱에 원투 스트레이트를 작렬시키려는 순간 놈이 얼굴을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입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나에게 빌다시피 한다.
난 내 주먹에서 장풍이라도 나간 줄 알았다.
"강석현 너를 우리 광풍회에 가입시키려고 한 일이다. 너를 좋게 보았으니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나를 때리지 마! 잘못했어!"
맥이 탁 풀린다.
겨우 이런 놈 때문에 이 난리를 겪었단 말인가?
좋게 생각하자! 이걸로 모두 끝났다.
나는 무사히 집에 갈 수 있고 나머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옥상에서 내려가는 길이 다시 홍해처럼 갈라진다.
많은 학생들이 여기저기 숨어서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오늘 기적을 여러차례 연출한다.
******
"야! 깡석현!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집으로 가는 나를 부른 것은 박태식이었다.
조금 전에 나랑 원터치 맞대결을 펼친 웰터급 복서다.
"왜 그래요? 나는 선배하고 할 이야기 없습니다."
"야, 두들겨 맞은 건 난데 석현이 네가 왜 신경질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그래도 내가 같은 복싱을 하는 선배다! 말이나 좀 들어주라!"
"일 없습니다. 그래도 복싱을 했다는 사람이 저런 수수깡 같은 놈의 똘마니 노릇이나 한답니까?"
"그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최 욱 저놈은 재벌이야! 정확히 말하면 재벌 3세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립니까? 광산상고에 왜 재벌 손자가 다닌답니까?"
"그게 말이야. 그런 사연이 있어!"
난 또 대단한 사연이 있는 줄 알았다.
공부를 못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떨어졌단다.
참으로 대단한 재벌 3세이시다.
한 마디로 돌대가리란 말이다.
"여기서 일 년 다니고 나면 인문계 고등학교로 전학을 갈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전학을 안가고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죽치고 계신답니까?"
"그렇긴 하지. 그런데 최욱이가 광산상고 학교 생활에 너무 만족을 하는거야! 사실 여기는 자기 세상이잖아? 다들 최욱이 말이라면 껌벅 죽거든?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 전학가봤자 꼴지야! 여기서 내신 관리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더라구. 나도 들은 이야기야. 이 박태식이도 공부랑은 담쌓은 놈인데 뭘 알겠냐?"
박태식 선배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재벌 3세인 최욱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떨어져서, 광산상고에 입학을 했고 광풍회를 완전히 장악했단다.
주먹의 힘이 아니라 돈의 힘으로 말이다.
"이해가 안 되는데요? 돈이 그렇게 무섭습니까?"
"무섭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런 거지 뭐! 학교에서 센 척 해봤자 사실 별 거 있냐? 교문 밖에 나가면 아무도 안 알아주는데? 하지만 돈은 다르지. 다들 알아서 기어!"
"난 돈 앞에 무릎 꿇는거 싫습니다. 박 선배나 돈 앞에 무릎 꿇고 사시우!"
"야, 강석현! 네가 아직 어려서 돈 많은 놈 무서운 걸 모르는구나!"
하여튼 선배라는 인간들이란!
겨우 두 살 차이인데, 세상을 엄청나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한다.
"맞아요. 어려서 모릅니다. 나이 많은 선배님이나 잘 알고 돈 많은 놈 모시면서 사시구려!"
"석현아! 그러지 말고 최욱이에게 한 번만 고개 숙여라! 그러면 석현이 너 학교 생활 활짝 피는 거야! 아니, 최욱이 눈에 들면 인생이 피게 될지도 몰라!"
이제 알 것 같다.
광풍회란 조직은 최욱의 힘을 두려워하거나, 그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자들의 모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나 '강석현' 이라는 놈과는 애시당초 어울릴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나는 집으로 가야 한다.
할머니가 많이 기다리신다.
그리고 체육관으로 갈 것이다.
오늘 싸움판에서 뭔가 배운 것이 있는 것 같다.
복싱에 응용해 볼 기술이 있다.
최 관장님과 의논해 봐야겠다.
******
타학교 학생들이 두려워하는,
다니는 학생들이 거칠다고 소문난 광산상고지만 나 강석현의 학교생활은 평온하기만 하다.
시비를 걸어오는 놈이 하나도 없다.
불량 동아리인 광풍회 회원인 김광수가 우리반의 짱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나를 건드릴 리 만무한 일이다.
나는 내 나름의 생활과 규칙에 충실하고 녀석들은 녀석들의 생활이 있으니까...
광풍회 회장 최욱에 관한 이야기가 간헐적으로 내 귀에 들어왔다.
광산상업고등학교는 사실상 그의 손아귀에 있다고 봐야 한다.
학생들도, 그리고 선생들도 말이다.
그에게는 충실한 사조직인 광풍회가 있고, 돈 많은 아버지가 있다.
선생들도 최욱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학교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광산상고는 최욱의 사설왕국이다.
최욱이 왕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꾸만 나를 찾는다고 한다.
최욱은 집요했다.
나와 친하게 지낼만한 사람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들을 통해서 자꾸만 나를 회유한다.
나를 회유하고자 나선 이들은 동급생이나 선배들만이 아니었다.
내 담임선생 까지도 최욱과 잘 지낼 것을 종용하고 나선다.
선생들도 최욱의 편이다.
하긴 재단을 통해서 조금만 이야기하면 선생들은 사냥개처럼 그 명령을 따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강석현! 너 학교에서 폭력 사태 일으킨 적 없어?"
"없습니다."
"어쭈? 내가 다 알고 하는데 시치미를 떼? 너 입학식 날 교내 옥상에서 선배들을 구타했다면서?"
"아니, 그건!"
담임은 다 알고 있었다.
아니 누군가가 정확히 밀고를 한 것이다.
누굴까?
"너 복싱한다면서? 중학교 때 우승도 했다면서?"
"네."
"혹시 폭력사태로 정학이라도 먹으면 대회에 참가 안될 텐데?"
"......"
"왜 대답이 없어? 선도 위원회 한 번 열어볼까?"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다행히 네가 징계를 받을까봐 3학년의 최욱 선배가 나서서 학생들을 잘 무마한 모양이니까, 가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도록 해!"
"......"
"왜 대답이 없어? 말로만 죄송하다고 하는 거야? 이러면 곤란하지!"
"알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내가 이런 것 가지고 이사장님한테 한 소리를 들어야겠냐? 잘 좀 하자! 눈치껏!"
피곤한 일이다.
어쩌다가 최욱, 그 인간이랑 얽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내가 피해자 아닌가?
결국 최욱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서로 좋게좋게 끝내는 일이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나를 보자고 하는 건가?
나는 광풍회에 가입해서 최욱의 졸개가 될 마음이 전혀 없다.
광풍회와의 감정은 풀어두는 편이 좋긴 하다.
그것뿐이다.
광풍회 회장 최욱이 통이 크긴 큰 모양이다.
광풍회 회원들과 화해하는 자리를 만든다고 나를 불렀다.
자기들의 신입생 환영회도 겸한다고 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고등학교 불량서클의 모임 아닌가?
한강 고수부지 어딘가에서 모이리라고 짐작을 했는데 내 상상력이 부족했다.
대한민국 10대 그룹 회장님의 손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시내 한복판의 그럴듯한 카페를 전세 내어서 모임을 갖는다.
광산고교에서 제법 논다는 놈들이 모두 최욱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육체적인 힘도, 지식의 힘도 보통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남자에게 말이다.
"야! 깡석현 이리 와봐!"
입학식 날 내 주먹앞에서 벌벌 떨던 약골 최욱이 아니다.
자신의 힘을 한껏 과시하며 목에 힘을 준다.
관장님의 말씀이 다시 기억난다.
"복서에게 레슬링 선수보다 더한 상극이 누구인지 알아? 바로 돈 있는 놈하고 권력을 가진 놈이야!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길 수가 없어, 이길 수가...!"
"관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석현이 너도 내 말뜻을 알게 될 날이 올 거다. 아니 너에게는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후후후!"
관장님이 걱정하셨던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도 훨씬 빠르게 말이다.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것 보다도 불공평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