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Z 의 전쟁 ( War of Z- boys! )
피가 끓는다.
지금까지 링 위에 서는 것을 스포츠라고만 생각했다.
운동경기는 운동경기일뿐 싸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생각이 바뀌고 있다.
권투(拳鬪)의 투(鬪)란 글자가 싸움을 의미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뇌리를 스친다.
스포츠란 생각은 사치다.
싸움이다!
싸우면 일단 이겨놓고 보아야 한다!
지기 싫다!
그 비참함을 감내해낼 자신이 없다.
복싱을 시작한 이래로 사각의 링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다는 사실이 이렇게 흥분된 적이 있었던가?
상대인 권순찬은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아주 나를 잡아먹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지금껏 스포츠맨이었다.
투사가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달라질 생각이다.
나는 권순찬이 걸어오는 그 눈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권순찬의 훅은 빨라! 거리가 있다고 방심하면 안 돼!"
"......"
"녀석을 알폰소 사모라(Alfonzo Zamora)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권순찬은 도망 다니는 놈을 잡는데 귀신 같은 놈이라구!"
"......"
"하지만 석현이 너는 카를로스 사라테(Carlos Zarate)야!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면 석현이 네가 이겨! 나는 확신해! 강석현 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남자야!"
나도 명색이 복서다.
그 유명한 Z-boys 의 전쟁을 왜 모르겠는가?
28전 28승 28 K.O 의 사모라(Zamora)와 51전 51승 50 K.O 의 사라테(Zarate) 간의 통합 밴텀급 챔피언 결정전!
두 전사의 이름을 따서 Z 의 전쟁이라고 부르는 그 명승부를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자신의 시합을 모두 K.O 승으로 장식한 인기절정의 미남복서 알폰소 사모라.
4전 5기의 대한민국의 영웅 홍수환을 2번이나 K.O로 누르며 피눈물을 흘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두 전사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처절한 인파이팅을 구사했다.
키가 큰 사라테가 아웃복싱을 전혀 구사하지 않고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만약 사라테가 아웃복싱을 구사했으면 승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라테가 아니라 사모라가 이겼을지도.
복싱이 상대적인 스포츠라고는 하지만 상대를 너무 의식하며 스타일을 생각없이 바꾸는 것도 현명한 판단은 아니더라.
한국 아마추어 복싱의 대부 김 교수는 권순찬을 한국의 사모라(Zamora)라고 부르더라.
내 기를 죽이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한국의 사모라에 맞서는 나는!
오늘 인파이팅으로 승부를 볼 것이다.
비록 나를 미래의 사라테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아직 없겠지만 말이다.
아, 한 사람 있긴 있구나!
우리 관장님!
그 관장님을 위해서라도 이겨야 한다.
관장님의 안목이 옳았다는 것을 복싱 관계자들에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
긴장을 너무 한 것일까?
자꾸 호흡이 가쁘다.
적당한 흥분과 긴장을 유지하는 것도 복서의 실력이다.
크게 한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억눌러 본다.
어렵다.
상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면 억눌러두었던 흥분이 다시 삐져 나온다.
땡!
1라운드가 시작된다.
가벼운 탐색전도 거치지 않고 권순찬이 파고든다.
나에게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주지 않고서 말이다.
양훅을 휘둘러 나를 뒷걸음치게 만든 후 링 사이드나 코너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일 거다.
인파이터들이 즐겨 채택하는 전략이다.
나는 잽으로 견제하면서 녀석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절대 코너에 몰리면 안 된다.
녀석의 훅은 빠르다.
생각보다 반 박자 정도 빠르게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 빠른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복싱이 작전대로만 되면 세상에 이기지 못할 상대가 있겠는가?
그리고 무슨 재미가 있을까?
복싱은 상대성이 강한 스포츠다.
같은 전략, 같은 주먹도 상대에 따라서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태어날때부터 인파이터인 권순찬은 내 주먹을 전혀 겁내지 않는다.
맷집에 자신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주먹이 솜방망이인 것인가?
뭐 아무래도 좋다.
이제 곧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 볼 것이니까!
녀석은 주먹이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저렇게 턱을 드리대며 들어오는 것일까?
자신의 주먹을 두려워해서 상대방이 맞받아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내 잽이 수차례 녀석의 안면을 때렸다.
권순찬 녀석의 훅이 내 가드 위를 때린다.
내 잽이 포인트로 연결이 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고 믿지만 심판을 믿어도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모르긴 해도 심판들은 권순찬에게 호의적일 것이다.
링 코너에 앉아있는 S체대 김 교수의 존재감이 대단하다.
판정으로 갔을 때 권순찬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니까.
내 스타일대로 이렇게 갈까?
아니면 지금 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한번 그것을 시도해 볼까?
원래 계획대로라면 1라운드 종료 30초 전에 시도하기로 했다.
자칫 잘못되더라도 1라운드는 곧 종료될 것이니까 위험 부담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그런데,...
원투 스트레이트!
녀석의 얼굴이 뒤로 젖혀진다.
한번 더 원투스트레이트를 날린다.
녀석이 가드를 올린다.
덕분에 녀석의 복부 수비가 허술해진다.
라이트 어퍼컷을 녀석의 복부에 꽃아 넣었다.
주먹에 묵직한 감촉이 온다.
나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권순찬 녀석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는다.
아니 못하는지도 모른다.
상대편 코너에서 욕설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나온다.
내 인파이팅에 당황하던 권순찬이 다시 전열을 정비해서 들어온다.
이제는 턱에다 가드를 단단히 하고서 들어온다.
녀석의 가드 위에 원투 스트레이트 콤비를 쉴 새 없이 퍼부었다.
녀석이 멈칫거린다.
생각보다는 내 주먹이 매운지도 모른다.
가드 위지만 충격이 있는 눈치다.
일 라운드 공이 울린다.
내 정신은 말짱하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다.
나는 1 라운드를 권순찬과 난타전을 벌였다.
"강석현! 잘 했어! 굉장했어!"
최 관장님이 나를 격려한다.
어깨를 주무르고 혹시 아픈 곳은 없는지 체크한다.
맞은편 코너의 권순찬이 보인다.
쉴 새 없이 질책이 쏟아진다.
녀석의 얼이 빠진다.
"석현아! 너 하고 싶은 데로 싸우고 돌아와! 후회없이!"
맞는 말씀!
바로 그것이 나 강석현의 생각이다!
"땡!"
2라운드 공이 울린다.
성큼성큼 권순찬에게 다가간다.
녀석도 물러서지 않고 다가온다.
녀석은 인파이터니까.
그리고, 나는 오늘 아웃복서가 아니다.
내 리치가 놈의 것보다 길다.
더구나 스트레이트 쪽이 훅 보다는 레인지가 길다.
녀석이 공격을 시도하느라 얼굴이 비면 그 틈으로 원투 스트레이트를 찍었다.
녀석의 가드가 점점 단단해진다.
아무렴 어떤가?
가드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가드 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투 스트레이트를 퍼부었다.
권순찬 녀석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이제 조건 반사적이다.
내 원투 스트레이트가 발사되면 녀석이 가드 뒤에 웅크리고 나오지 않는다.
"강석현! 네 원투 스트레이트는 최고야! 상대는 쫄았어! 계속 밀어붙여도 돼!"
그럼!
내 원투 스트레이는 최고다!
내가 누구의 제자인데?
대한민국 최고의 스트레이트를 자랑하던 최 관장님의 수제자다.
그에게서 배운 주먹이다.
"권순찬! 뭐 해? 물러나면 안 돼! 거리를 주지 마! 파고들어서 놈의 보디(Body)에 한 방 먹여! 배를 때려서 놈의 발을 무디게 만들어!"
파고들어서 내 복부에 어퍼컷을 먹이려는 권순찬의 시도는 번번이 무위로 돌아간다.
발 빠른 아웃복서의 복부를 공략해 다리를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너무나도 뻔하다.
그 정도를 예상하지 못하겠는가?
녀석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짙게 배어 나온다.
턱을 중심으로 단단하게 채워둔 내 가드는 서서히 내려온다.
자신감의 발로다.
권순찬의 주먹은 이제 훤히 보인다.
반대로 권순찬의 가드는 굳게 채워져 있다.
내가 이기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옆구리를 슬쩍 비워두었다.
권순찬이 이에 반응한다.
내 옆구리를 노리느라 녀석의 턱이 비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짧게 휘두른 내 훅이 녀석의 턱에 얹혔다.
녀석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다운이다.
내 코너의 최 관장님의 입에서 환호성이, 권순찬 측 코너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체육관을 찾은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언더독(Under dog)의 반란은 관중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심판이 카운터를 센다.
7에서 녀석이 일어난다.
경기는 속개된다.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권순찬은 뒤로 물러난다.
로프에 기댄 녀석에게 원투 스트레이트에 어퍼컷이 곁들어진 콤비블로를 선보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심판이 다가와 나를 녀석에게서 떼어 놓는다.
내가 이겼다.
밴텀급 최강자 권순찬을 이겼다.
그것도 K.O로!
갑자기 대접이 달라진다.
내가 맛본 인생의 달콤함이다.
아주 짧은 순간의...
시합이 끝난 후 S체대의 김 교수가 다시 찾아왔다.
아까와는 다른 사람처럼 군다.
거만함은 찾아볼 수 없고 자상한 눈빛으로 무엇이든 해 줄 것처럼 말한다.
"강석현! 아까 원투 스트레이트에 이은 어퍼컷 콤비블로는 그야말로 명품 중에 명품이었어! 안그래?"
"......"
"아니, 이런 인재를 내가 왜 몰라보고 있었지?"
"그 콤비블로는 오늘 처음 써 보는 겁니다."
말이 서툰 나를 대신해서 최 관장님이 말씀해 주신다.
"응? 정말이야?"
"아웃복서에게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요. 석현이는 오늘 처음으로 인파이팅을 보인 겁니다. 지금껏 전통적인 아웃복싱을 구사하던 아이라서요."
"역시 최철의 제자야! 원투 스트레이트로 한 시대를 풍미하던 동양 챔피언 최철의 제자 다워!"
최 관장님이 국가대표 하나 배출하지 못한 무능한 지도자에서 최고의 지도자로 뒤바뀌고 만다.
역시 이기고 봐야 하는 것이다.
"최 철! 너도 이제 제도권으로 들어와야지? 야인 생활은 이제 청산하고 말이야. 아! 강석현이 이놈 물건이야. 잘 키웠어!"
"교수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어, 그래? 뭐 할 수 없지. 강석현! 너 나를 찾아와라. 아니, 내가 빠른 시일 내에 한 번 찾아가지. 몸 관리 잘해! 아 이건얼마 안 되지만 쇠고기라도 사 먹어!"
"......"
"뭐 해? 어른이 주는 건데 고맙습니다 하고 받지 않고서?"
"......"
"이놈 고집불통이네? 최 관장! 이거 가지고 얘들 고기나 먹여. 최 관장 뻔한 수입에 이놈 먹을거나 제대로 챙기겠어? 고집피우지 말고 이놈 데리고 나한테 와!"
"죄송하지만 저는 교수님과 함께 하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머리 나쁜 나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김 교수라는 사람과 최 관장님이 껄끄러운 사이라는 사실을...
인사를 하고 대접은 하고 있지만 함께 일을 할 일은 결코 없을거라는 사실도 말이다.
나는 두 사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운명이었고, 내 선택은 최 관장님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 인생의 짧은 달콤함은 끝나고 말았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후회 따위는 전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