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인파이터 ( In-fighter )
광산상고 선배님들, 아니 선배놈들이 내 주위를 빙 둘러싼다.
결국 일대 일의 대결이 아니라 일대 다수의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내가 박태식을 눕혔을 때만 해도 기가 팍 죽어 보였던 놈들의 눈에 다시 살기가 돈다.
역시 싸움은 자신감이다.
그리고, 자신이 다수에 속했다는 것을 알면 기가 살아나는 놈들이 있다.
어쩌면 그게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열한 동물이다.
갑자기 옛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오래전 일도 아니다.
겨우 작년의 일이다.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중등부 결승전이었으니까...
애시당초 우승은 꿈도 꾸지 않았다.
복싱 경력도 길지 않았고, 이전까지 큰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으니까.
더구나 체급까지 플라이급에서 밴텀급으로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결승 상대는 권순찬이다.
작년 중등부 밴텀급 왕자 말이다.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자신 조차도...
아니, 딱 한 사람은 빼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내 스승인 최 관장님이었다.
"강석현! 너는 무적의 복서가 될 놈이야! 이길 수 있어! 나만 믿어!"
"......"
관장님의 말씀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가?
상대는 중학교 최고의 하드펀처(Hard Puncher)다.
더구나 아웃복서를 상대하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놈이다.
막강한 체력과 맷집을 바탕으로 쉴 새 없이 파고든다.
아웃복서가 그 정도를 겁내느냐고?
빠른 풋워크는 뒀다고 뭐하냐고?
모르시는 말씀이다.
중등부 경기는 살인적인 일정을 자랑한다.
특히 밴텀급에는 참가 선수가 제일 많다.
64강, 32강, 16강, 8강, 4강, 준결승전까지...
하루 쉬고 하루 경기하는 촉박한 일정이다.
경량급 아웃복서는 꼬박 3라운드를 다 뛰고 판정까지 가야만 하는 운명이다.
결승전 당일에는 사실상 체력이 고갈된 상태다.
오직 정신력으로 버텨야 한다.
상대방도 같은 조건 아니냐구?
맞는 말이다.
그렇긴 하다.
그렇지만 상대는 강타자 권순찬이다.
'아웃복서 킬러!' 라는 별명의 강타자다.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시드 배정을 받아서 16강 경기부터 시합에 참가했다.
더구나 권순찬은 모든 상대를 K.O 로 제압하고 결성에 선착해 있다.
혈전을 치르느라 체력이 고갈된 나와는 컨디션 자체가 많이 다르다.
"어이! 최 관장! 이놈이야? 우리 권순찬이랑 결승전 치를 놈이?"
왠 중년남자가 일군의 건장한 사내들을 거느리고 황제처럼 걸어온다.
딱 들어도 거만한 목소리!
내 취향이 아니다.
이런 남자야 말로 나와 상극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아, 김 교수님! 석현아! 인사 드려, 이분이 S체대 김 교수님. 우리 나라 아마추어 복싱의 대부이시다."
"안녕하세요?"
높은 분이라고 하길래 나름 예의 바르게 인사를 드린것 같은데 김 교수님이란 사람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대한다.
뭐, 상관없다.
나하고 엮일 일이 없는 높은 분이라는데, 굳이 그런 사람의 눈에 들어서 뭐 하겠는가?
"이놈, 약골이네? 몸이 이렇게 부실해서야 우리 순찬이 주먹을 한 라운드라도 버티겠어?"
"......"
할 말이 있겠는가?
복서는 링에서 주먹으로 말하면 되는 법이다.
입으로 떠들어 봐야 소용없는 것이다.
"걱정이에요. 이놈이 처음 출전하는 대회라... 운 좋게 결승까지는 꾸역꾸역 올라왔는데 하필 상대가 교수님이 아끼시는 권순찬이라서..."
"하긴, 권순찬이가 물건이긴 하지. 오죽했으면 대학감독인 내가 중학생인 놈을 스카우트 하려고 벌써부터 침을 발라놓았겠어?"
"그럼, 권순찬이는?"
"맞아. 놈은 S체고로 갈 거야. 그다음엔 우리 S체대에 와야지. 가능하면 일찍 국가대표에 발탁할 생각이야. 올림픽 보낸 다음 프로 전향 시켜야겠지?"
"아, 네!"
관장님은 김 교수라는 사람의 말을 열심히 듣는 척 하신다.
아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계실 것이다.
권순찬에게 눈인사를 해 보았는데, 괜한 짓을 한 듯싶다.
놈은 나를 원수라도 보듯 노려본다.
건방진 놈이다.
권순찬이란 놈도, 저 김 교수라는 사람도...
"박 관장도 어제 순찬이 이놈 시합 봤지?"
"봤죠. 우리 석현이 결승 상대인데, 당연하죠."
"그럼 순찬이 훅 봤겠네? 전직 페더급 국가대표인 최 관장 눈에는 어떻게 보였어?"
"권순찬이 훅이야 뭐, 일품이죠."
"일품 정도가 아니지! 순찬이 이놈은 한국의 '사모라'야! 멕시코의 복싱 영웅 알폰소 사모라(Alfonzo Zamora)말이야. 이놈은 결코 판정까지 가지 않아. 언제나 K.O로 눕혀 버리지. 이놈의 상품성은 최고야!"
"아, 예. 그럼요! 복싱은 역시 K.O 죠."
"그럼, 나중에 봐. 순찬이가 멋진 K.O 쇼를 보여줄 테니까. 아 참! 상대가 최 관장네 선수였나? 그 참 미안하게 됐는 걸?"
말로 사람 기분을 나쁘게 하는 재주가 탁월하신 김 교수님을 따라 모두들 우루루 나간다.
권순찬이도, 그의 트레이너도...
"야, 강석현! 너무 긴장하지 마! 괜찮아. 그냥 좋은 시합을 한다고 생각하면 돼!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
"야! 너무 긴장하는 거 아냐? 이기고 지는 건 너무 걱정하지 마. 원래 권투라는 것은 지면서 배우는 거야! 너의 첫 밴텀급 대회야. 편안하게 하면 돼!"
"긴장한 거 아니에요. 이기고 싶어요!"
"응?"
"이기고 싶다구요! 저 권순찬이라는 놈! 아니, 저 김 교수라는 사람 말이에요!"
"......"
나중에 최 관장님이 말씀하셨다.
너란 놈이 복싱을 시작한 이래 승부욕이라는 것을 보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고...
"이 자식, 당연한 소리를 왜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당연히 이겨야지! 이길 수 있어! 걱정 마!"
"그렇지요? 이길 수 있겠죠?"
"그럼!"
"작전을 알려 주세요. 권순찬의 저돌적인 인파이팅을 이길 작전 말이에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석현이 너 하고 싶은대로 해 봐! 해답은 너 머리속에 있어."
"......"
이것이 우리 최 관장님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나쁜 점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신다.
환상적인 작전지시 같은 것은 기대하면 안 된다.
그래서 무능한 코치라는 오명을 쓰고 떠나 보낸 선수도 많다고 알고 있다.
좋은 점은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은 모두 시도해 볼 수 있다.
다른 코치였으면 작전 지시를 따르지 않고 선수 마음대로 시합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다.
다른 선수들의 생각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최 관장님의 스타일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다.
하지만 결승전이다.
뭔가 대단한 작전으로 승리에 목마른 제자를 도와주셨으면 하는 기대가 어찌 없을까?
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해 보라신다.
하긴, 그래야 우리 최 관장님이다.
"첫 라운드에는 내 스타일대로 아웃 복싱을 할 겁니다. 그러다가 30초 남기고부터는..."
"좋은 생각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
무엇이 좋은 생각이란 건가?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혹시, 관장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신가?
그렇다!
생각해보니 관장님은 진작부터 나에게 그 길을 권했었다.
인파이터의 길 말이다!
"석현이 넌 타고난 인파이터야!"
"네?"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누가 봐도 타고난 아웃복서였으니까.
키가 크고 잽과 원투 스트레이트가 좋다.
거기다 발도 빠르다.
대신 파워는 좀 떨어진다.
이런 내가 아웃복서가 아닌 인파이터라니!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 눈이 정확해! 고등학교를 가고 성인이 되면 육체는 바뀔 거야. 키는 더 크고 체중도 늘겠지. 아마 180cm 정도까지 키가 크게 될걸? 그때가 되면 페더급, 어쩌면 라이트 급으로 뛰어야 될 거야!"
"그게 좋은 건가요? 체급 올려서 망가진 선수가 한 둘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보통 체급을 올리는 경우는 감량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니까. 감량 대신에 손 쉬운 체급 올리기를 선택한 대가를 치러야지! 한 체급 위의 선수들의 파워와 내구성은 엄청나거든?"
"그런데 왜죠? 저는 감량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요?"
"석현이 넌 달라! 넌 몸의 성장이 느린 편이니까. 아직 근육이 여물지 않았어! 몸이 계속 성장할 거야. 내 눈을 믿어!"
맞다.
나는 최 관장님을 믿는다.
최 관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체급을 올리게 될 날이 오면 어쩌면 그때는 인파이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큰 키에 최고급 테크닉을 가지고 있지만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어떤 자세에서도 위력적인 펀치를 내밀 수 있는 그런 인파이터 말이다.
마치 전설적인 밴텀급 세계 챔피언, 멕시코의 K.O 아티스트 카를로스 사라테(Carlos Zarate) 처럼...!
그 가능성을 대한민국 중등부 밴텀급 중등부 최강자라는 권순찬을 상대로 시험해 볼 것이다.
무모하지 않냐구?
아니! 좋은 기회가 아닐까?
사실, 나도 계속 궁금했거든.
나에게 인파이터의 소질이 있는지.
정확히 말하자면 인파이터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