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생존본능(生存本能)
"신입생 신명철! 덕성 중학교 출신입니다! 축구를 했습니다."
"신입생 김광수! 광산 중학교 출신입니다! 태권도랑 유도를 했습니다! 공부는 몰라도 싸움만은 자신있습니다!"
"오, 그래? 나도 광산 중학교 나왔는데! 그러고 보니 옛날에 얼굴을 본 것도 같다. 야무져 보이네! 앞으로 잘 하자!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넵! 잘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광수란 저놈은 나와 같은 반이다.
어깨가 딱 벌어진 것이 한눈에 봐도 힘깨나 쓰게 생겼다.
반편성이 끝나고 배정받은 학급으로 이동하고 나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동급생들의 상태를 파악하느라 바쁘더라.
자기가 짱을 먹을 수 있는지 아닌지가 궁금했나 보다.
다짜고짜 나를 견제하더라.
기 싸움을 걸어오고, 자기 편을 포섭하느라 바쁘더라.
나?
놈에게 관심도 주지 않았다.
학급에서 짱을 먹으면 자다가 떡이라도 생기나?
아이구, 의미없다! 의미없어!
너는 그러고 살아라.
나는 내 인생 살련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들 하더라.
머리가 나쁘면, 힘이라도,
힘이 없으면 인맥이라도 필요하단다.
누가 들었으면 보험 아줌마들 이야긴줄 알겠다.
하지만 여기는 광산 상고다.
광산 중학교 출신이 주류(主流)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다 그럴듯한 양아치 경력까지 더해지면 성골은 몰라도 진골쯤은 된단다.
여기가 신라 시대냐?
역사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어디서 줏어들은 것들은 있어 가지고서...
아무튼 광수 놈의 눈빛이 밝아지고 살기가 등등해진다.
하긴, 똥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더구나 새로이 모실 주인이라도 보이면 강아지 새끼의 기세가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광수 놈이 으스대면서 나를 내려다 본다.
"신입생 강석현! 백제 중학교 출신입니다."
"......"
"......"
"뭐야? 그게 끝이야? 네놈은 운동할 줄 아는 거 없어?"
"없습니다."
"이 새끼가 어디 뻥을 치고 있어? 선배님들이 우습지?"
"뻥 아닌데요?"
"너 깡석현이잖아? 백제 중학교 짱!"
"짱 아닙니다. 그냥 백제중학교 출신입니다. 평화주의잡니다. 개인주의자기도 하고요."
눈치 없는 놈 몇몇이 킥킥대며 웃는다.
선배놈, 아니 선배님들이 발사한 레이저 광선을 쳐맞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이놈이 겸손한 거야? 아님, 선배들을 놀리는 거야?"
"숨쉬기 운동은 열심히 합니다. 국민학교 때는 새마을운동도..."
킥킥 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하늘 같은 선배님의 얼굴이 벌개진다.
"너, 복싱 하잖아? 권투 말이야."
"......"
"네가 그리 잘 친다며? 중학교 때 인근에 적수가 없었다며? 소문 이미 좌악 났는데 어디서 헛소릴!"
아니다.
내가 복싱을 배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다.
주먹을 쓸 줄 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다.
더구나 링 밖에서 주먹을 쓰겠다는 생각 따위는 없다.
링 밖에서 주먹을 휘두르면 그것이 깡패새끼지 운동선수인가?
어린 학생이 뭐 대단한 지킬 것이 있다고 권투까지 배웠냐고?
모르시는 말씀!
세상은 정글이다.
학교도 정글이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나는 중학교 때 배웠다.
학교생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고자 한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부를 잘하던지,
집안이 잘 살던지,
아니면?
주먹이라도 강해야 한다.
공부잘 못하는 놈이 부모님 없이 할머니 밑에서 혼자 컸다고?
그놈의 학교생활은 피곤하기 마련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굽히고 사는 방법도 있건만!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려는 욕망이 터무니 없이 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적당히 맞춰주며 사는데 너무도 미숙했다.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은 두 가지였다.
맞춰주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개인주의자로 살 것인가?
내 선택은 후자였다.
조금의 고민도 없었다.
그리고,...
인생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어리다고 봐 줄 자비로운 사람은 적어도 내 주위에는 없었다.
복싱을 배웠다.
도저히 체육관비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헌책방에서 복싱 교본을 사서 혼자 익혔다.
우선 체력이란다.
로드워크(Road Work)가 중요하단다.
그정도야 뭐,...
혼자서 뜀박질하면 되는 거지?
새벽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뛰었다.
이왕 하는 거 돈도 벌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조간신문 배달이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뛰고, 또 뛰었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뛰었다.
힘들지 않았냐고?
천만에!
나에게는 꿩 먹고 알 먹기였다.
처음에는 조금 힘이 들었다.
처음 삼일 동안은 뛰고나서 토악질을 해댔다.
너무 힘이 들면 토하게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다음부터는, 조금씩 조금씩 편해졌다.
뭐든지 처음이 힘든 법인가 보다.
체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배달을 마치면 신문보급소에서 빵과 우유를 준다.
혹시라도 다른 배달원들이 남기는 우유가 있으면 그것은 내 차지였다.
힘과 체력에 자신감이 생기고 나서야 복싱 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두려움 반 설렘 반을 가지고...
살아 생전 처음으로 타인에게 인정을 받았다.
복싱을 하기에 그야말로 타고난 체격이란다.
말라깽이인 내가 체급 경기인 복싱에 안성맞춤이란다.
말랐으면 체력이나 힘이 떨어지기 마련이라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단다.
당연한 이야기다.
내가 일 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은 이제 자신이 있다.
"야, 강석현! 선배들이 장난하는 걸로 보이나?"
"아닙니다. 진지하시다는 것 압니다."
"일단 이 자리에 네 발로 왔지만, 가는 건 네 마음대로 못 가! 깡석현 너는 우리 광풍(狂風)에 들어와야겠다."
"......"
"좀 있다 선배님들이 열어주는 환영식이 있다. 빠지지 말고 참석해!"
"전, 가야 됩니다."
인사를 꾸벅하고 자리를 뜰 것이다.
나는 아주 예의 바른 신입생이니까.
"어쭈? 주는 술잔을 마다하고 꼭 벌주를 마시겠다는 거지? 야! 김광수! 네가 광산중학교 짱 출신의 실력을 보여라!"
태권도와 유도를 배웠다는 동급생 김광수가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하아!
세상을 예의 바르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
광수라는 놈, 키는 크지 않지만 체격이 좋다.
운동을 장난으로 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제법 움직이 좋아 보인다.
광산중학교 출신 선배들의 열화와 같은 응원 속에 나를 잡겠다고 나선다.
아마 이 자리에서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모양이다.
나를 바라보는 놈의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에서 욕을 뱉어낸다.
나에게 적대감이 무럭무럭 솟아나는가 보다.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지만 그런 인간이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수준급의 유술가와의 싸움은 곤혹스럽다.
혹시나 그의 손에 잡히게 되면 복싱 선수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게 된다.
다행히 광수라는 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어쩔 수 없다.
녀석의 싸움 상대가 되어야 할 모양이다.
나도 슬슬 스텝을 밟으며 광수 녀석의 주위를 맴돌아 본다.
오래지 않아 광수가 내 팔을 움켜잡으려고 들어올 것이다.
놈은 지금 마음이 급해 보이니까...
딱 한 방이면 충분하다!
깨끗한 스트레이트 한 방!
광수 녀석이 내 손을 잡으려고 들어올 때 카운터 펀치를 녀석의 턱에 꽂아줄 것이다.
아니, 스트레이트까지도 필요 없다.
체중이 조금 실린 잽 한 방이면 된다.
녀석은 멧돼지 같이 나를 향해 돌진할 테니까...
나의 주먹 끝에 묵직한 감촉이 온다.
광수 녀석의 턱에 가볍게 내지른 내 주먹이 꽂혔다.
"어억!"
광수 녀석이 받침대 빠진 통나무처럼 무너져내린다.
더는 손을 쓸 필요가 없다.
다행이다.
내 생각처럼 되어서...
선배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니, 설마 나 강석현이 이런 놈한테 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선배님들, 나를 너무 우습게 본 것 아냐?
아무튼 되었다.
코메디언 이주일 씨의 말처럼, 나는 조용히 살고 싶다.
"선배님들, 저 가보겠습니다."
이 시점에서 나를 보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허세 가득한 선배들의 자존심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역시 잘 치네! 광풍회에 들어와라!"
"싫은데요?"
"좆만한 새끼가 감히!"
하늘 같은 선배님들은 입에다 좆을 물고 사신다.
입만 열었다 하면 좆부터 튀어 나온다.
그만큼 좆에는 자신이 있다는 것이겠지?
"이렇게 하시지요? 누워서 키를 재 봅시다. 그래서 저보다 키가 큰 선배님이 계시면 제가 광풍회에 들어가지요."
좆을 물고 사시던 선배님들께 내 말이 접수가 안되는 모양이다.
"여기 나 보다 좆 큰 사람 없으십니까? 없으면 대물 후배놈은 이제 이만..."
"이 새끼! 완전히 또라이 아냐?"
"선배님이 도전해보시는건 어떻습니까? 저는 이 정도 밖에 안됩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나, 변태 아니다.
보여주는데 쾌감 느끼고 그런 스타일 아니다.
남자의 거시기를 흉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나는 단지 평화를 위해서 무기를 쓸 뿐이다.
내가 광산상고의 간디라니까?
'헉!'
'어흠, 어흠!'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외면한다.
흔히들 보이는 반응이다.
목욕탕에서 나를 마주친 남자들이 나를 아래 위로 훝어보고서는 꼭 헛기침을 하더라?
왜 그런건데?
내 물건을 보고나면 기관지가 안좋아지나?
아예 경고문을 부착해야겠다.
폐병이나 기관지계통이 약한 사람은 보지 말라고!
"선배님 차롑니다. 까 보시죠?"
"미친 새끼! 또라이 중에서도 상 또라이잖아?"
"선배님께는 특별히 한 수 접어드리죠. 저는 까진 부분은 빼고 잴게요. 그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설마! 그 정도도 안되는건 아니죠?"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분위가 좋잖아?
이렇게 웃으며 대동단결하면 얼마나 좋아?
나는 집으로, 당신들은 어디 공터에서 소주나 빨고.
괜히 본드 같은 것을 빨지 마시고.
007 제임스 본드도 아니면서 오공 본드 그런 짓은 하시 마시라.
뼈 삭는다.
"이 새끼! 너 오늘 내 손에 죽었어! 이 시건방진 새끼를 짓밟아 버릴거야! 저 새끼 그냥 보내면 내가 사람이 아냐!"
이렇게 평화주의자의 뜻은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해 두자.
나는 평화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늘이 주신 귀한 물건을 나쁜 곳에 쓰지 않고 평화를 위해 쓰기위해 노력했단 말이다.
이 정도면 착한 사람 아닌가?
중학교 때 내 별명이 간디였다니까?
혹은 전구자지...
키는 크나 다른 중요한 곳이 부실한 것으로 학교 차원에서 공식 인정을 받은 선배님께서 화를 참지 못하고 나에게 달려 드신다.
그냥 까면 될것을 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작은 거야?
살짝 궁금하기도 하고...
선배놈은 팔자 걸음이었다.
걷는 모양으로 보아 발길질에 능한 놈이다.
걷는 품새로 보아 태권도를 오래 한 모양이다.
무에타이는 아니다.
"원기야! 강석현 저놈은 펀치력은 별로야. 네 발차기 한 방이면 나가떨어진다. 한방만 제대로 맞춰!"
맞다.
내가 펀치력이 뛰어나지는 않다.
선배들이 나에 대해서 제법 조사까지 하고 나오신 모양이다.
황송하게도...
하지만 그건 8온스 글러브를 끼고 헤드기어를 하고 링 위에서 스파링을 할 때나 적용되는 이야기다.
맨주먹에 아무런 보호장구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학교 선배님에 대한 대접에 소홀함이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한 방!
옳지 명치가 비었다.
"우, 우욱!"
광산고등학교 3학년 김원기 씨가 옥상 바닥에 자신이 점심때 먹은 것을 늘어놓는다.
옥상이 조용해진다.
"야, 태식아! 안되겠다. 아무래도 복싱을 하는 네가 나서야겠다."
무리 뒤 편에 있어서 미쳐 확인하지 못했던 선배 하나가 껄렁한 걸음으로 나온다.
응?
시합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웰터급의 박태식!
이제 고등학교 삼학년인가?
"깡석현! 나 알지?"
"네."
"그럼 그만 숙이고 들어와라. 긴 말하고 싶지 않다, 엉?"
박태식이 눈을 부라리며 협박을 한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무엇보다도 나와는 체급 차이가 난다.
내가 밴텀급이니 체급차이가 꽤 난다.
고교 복싱계에서도 펀치력 하나는 인정받았던 박태식이다.
그렇지만 이대로 숙이고 들어갈 생각은 없다.
내가 질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나는 깡석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