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개인주의자(個人主義者)
내 이름은 강석현.
1980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고교생이다.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자다.
전체주의, 집단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타인이 내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와 어떤 분쟁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행복이란 것이 엄청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작은 행복, 작은 평화다.
적어도 학창시절의 나는 그랬다.
세상일이란 게 우습다.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인과의 아무런 분쟁을 원하지 않는다.
나를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
그야말로 평화주의자다.
남이 나를 건드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만큼 내가 남을 건드리거나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쉽게도 세상 인심은 그렇지 않더라.
개인주의자이면서 평화주의자인 한 인간이 평화롭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세상에는 호전적인 전체주의자들이 있는 법이니까.
특히 내가 입학하게 된 광산상고(光山商高)에는 그런 인간들이 득실거린다고 들었다.
공부라도 잘했으면 좀 나았으려나?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공부를 조금 더 잘했으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곳은 좀 더 형편이 나았을 것이니까.
더구나 거기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면 대학생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다.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이 어디 장난인가?
중학교 우리 반 65명 중에서 무려 25등 안에는 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세상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도 있는 법이다.
내 학습능력은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무리다.
반에서 삼십 등이 고작인 내 성적으로는 광산상고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그래도 많고많은 실업계 고등학교들 중에서는 나름 명문이다.
열심히 공부하면 은행이나 농협 같은 곳에 취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를 한다!' 는 것이 만만한 작업은 아니란 걸 잘 알지만 말이다.
"자, 이제부터 교장선생님께서 식사(式辭)를 하시겠습니다. 학생 모두는 자세를 바로 하시고 경청을······."
난 또 교장선생님께서 밥을 먹는다는 줄 알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곳곳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물론 그 웃음소리는 오래지 않아 학생들을 통솔하는 교사들에게 간단히 제압된다.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자랑스러운 광산인의 일원으로서, 타의 모범이 되고, 그리하여 다가올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제 5공화국의 역사적인 사명을······."
교장선생님의 훈시가 이어진다.
세상은 온통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난다.
1988년이 과연 내 인생에 오기나 올지 의심스러울 만큼 먼 세월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2년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입학식사는 좋은 말씀인듯하나, 너무 길다.
입학생들의 오와 열이 흐트러진다.
이는 하이에나 같은 선생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질서를 잡는다는 이름 하에, 혹은 교육이란 이름 하에 폭력이 가해진다.
분노 했냐구?
전혀!
그 정도의 폭력에 분노해서야 올림픽 개최를 눈앞에 둔 상위 중진국의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다.
그저 내 한 몸 건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선생들이 가하는 폭력이란 것이 뭐 대단한 것인가?
기껏해야 교장 선생님 말씀 중에 자세가 흐트러진 놈들의 뒤통수를 한대씩 갈길 뿐인데······.
"다음은 이사장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아! 교장선생님 말씀이 입학식의 끝이 아니었다.
지친 학생들의 입에서 한숨소리가 나왔지만 도끼눈을 뜬 선생들의 눈빛에 금방 제압된다.
그 후에는 육성회장님의 말씀이 있었고, 이어서 자신을 학생주임이라고 밝힌 인간의 협박(?)에 가까운 말씀이 이어진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대 광산상업고등학교의 입학식이 드디어 끝났다.
오늘의 공식적인 학교생활은 모두 끝난 것이다.
빨리 집으로 갔으면 좋겠는데 집에 가지 말란다.
남아야 한단다.
하늘 같은 선배님들께서 귀여운 신입생들을 좀 보자고 하신단다.
신입생들은 잔뜩 긴장해서 교실에 앉아있고 그 교실을 선배들이 차례로 돌아다닌다.
동아리 홍보의 시간이다.
선배님들이 자신들이 속한 서클에 가입을 하라고 권하는 순수(?)한 홍보행사라고 한다.
고등학생들은 중학생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키도 훨씬 크고 덩치도 크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긴장한 눈치다.
하여튼 한심하다.
내가 이들과 같은 반의 일원이라는 것이 조금 부끄럽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나는 서클활동 따위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으니까...
우락부락하게 생긴 일군의 선배들이 떼를 지어 들어온다.
신입생들이 갑자기 각을 잡고 바로 앉는다.
지금껏 고운 얼굴을 한 선배들이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들어온 선배들은 그 기세가 확연히 다르다.
신입생들도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들이 수컷 특유의 거친 성정을 온몸으로 뿜어댄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말을 이렇게 몸으로 배우고 있다.
"반갑다. 나는 '광풍(狂風)' 22기 한석호라고 한다!"
교단에 서서 일장연설을 하는 선배는 그다지 거친 말을 하지 않는데도 나름 위압감이 있다.
덕분에 신입생들이 잔뜩 쫄아붙는다.
마음 약한 몇몇은 거의 울상이 된다.
광산상고의 '광풍(狂風)'이라면 나도 진작부터 들어서 알고 있다.
좋은 쪽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다.
말 그대로 불량 서클!
그러니까 광산상고 학생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존재다.
타 학교 학생들도 광풍이라고 하면 다들 알고 있다.
내가 들어서 알 정도면 그 악명이 대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신입 회원을 뽑으러 온 것이리라.
귀찮은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는 개인주의자니까······.
"어이, 너!"
"예! 신입생 김광수!"
"너 끝나고 옥상으로 와!"
"넷!"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매서운 눈빛으로 동급생들을 훑어보던 놈이 선배들의 간택을 받는다.
놈은 그것이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처음부터 나를 견제하던 눈을 가진 놈이 앞으로 더욱 설치게 될 것 같다.
피곤한 일은 도처에 널려 있다.
선배들은 매의 눈을 해가지고 야무진 후배를 찾아다닌다.
이른바 스카우팅(Scouting)이다.
그리고 나는 그 스카우트란 단어와 별로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것 때문에 인생이 아주 조금은 꼬였다고 생각하는 놈이니까.
체격이 좋거나 눈빛이 날카로운 놈들이 선배들의 부름을 받는다.
가끔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선배들의 부름을 기다리는 예비 광풍 회원들도 나온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눈을 아래로 깔아야 한다.
괜히 눈이 마주치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어이, 너!"
"······."
"이놈 봐라? 선배 말이 안 들려? 너!"
덕분에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
"저 말씀입니까?"
"그래, 너! 이놈이 귀가 먹었나? 선배가 부르면 재깍재깍 대답을 해야지!"
"······."
"이놈 봐라? 선배가 지명하면 이름부터밝혀야 한다는 거 몰라? 관등성명!"
"예! 일학년 강석현!"
여기가 학교지 군대냐?
한심한 집단 속에 떨어지고 말았다.
살짝 짜증도 나고.
"너도 끝나고 옥상으로 와!"
"전, 끝나고 집에 가야 하는데요? 그리고 광풍(狂風)에 가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선배들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실소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동급생들이 모두 나를 쳐다본다.
그들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다.
'저놈, 미쳤구나! 이제 죽었다!'
개인주의자의 삶은 피곤하다.
바람은 고요하고자 하나 나무가 그냥두지 않는다.
아니, 꺼꾸로던가?
방과 후의 학교 옥상은 조용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공부를 업으로 삼지 않는 실업계, 상업고등학교의 방과 후는 더 말을 보탤 것도 없다.
그런데, 오늘 입학식 날의 광산상고 옥상은 소란스럽다.
제법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다.
그중 몇몇은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두발 자유화에 교복이 없다고는 하지만 지나치다.
머리는 너무 길고 복장은 학생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성인의 그것에 가깝다.
그것도 뒷골목의 양아치.
"자! 네놈들은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해 보도록 해!"
"출신 중학교, 해 본 운동, 뭐든지 좋아! 누나나 여동생이 있으면 그것도 이야기해도 좋아! 그러면 여기 계신 선배님들한테 사랑받을 수 있어. 아, 대신 예뻐야 해! 안그러면 말도 꺼내지도 말고! 알았나?"
"넷!"
뽑혀온 신입생들이 고함을 지르듯 대답한다.
우습다.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지금껏 참아온 각고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갈 뻔했다.
조심하자.
인상들을 보아하니 힘깨나 쓰게들 생겼다.
아마도 중학교 때 좀 놀던 놈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지만 선배들의 위세에 눌렸는지, 아니면 본성은 소심한 놈들인지 선배들의 말을 참 잘 듣는다.
'결심했어! 나도 오늘은 이놈들처럼 순한 양이 되자!'
매사에 첫인상이 중요하다.
괜히 첫날부터 소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
조용히 물처럼 흘러가자.
있는 듯 없는 듯 삼 년만 버티자.
그것이 개인주의자 강석현이 이 거친 광산상업고등학교에서 살아가는 방법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