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2019화 (1,999/2,000)

2019. ex wife-94-

* * *

강원도는 최근 국내 관광지 중 가장 핫한 곳이다.

인구 절반이 모여사는 수도권에서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과, 여름에는 시원한 동해안 해수욕장, 겨울에는 강원도 산지를 이용한 스키장 등이 활성화 되면서 사시사철 관광객이 모여드는 중이다.

사람이 몰리는 곳엔 돈이 몰리기 마련, 이에 힘입어 대형 숙박시설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들어섰는데, 이번에 로얄 기획이 통째로 전세를 낸 호텔도 그런 호텔 중 하나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자연 경관 하나만 믿고 관광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산 중턱에 우뚝 세운 호텔은 애매한 입지로 인해 수요 예측에 실패하고 말았다.

평소 공실이 너무 많아 경영상 어려움을 겪다보니, 로얄 기획이 제시한 <로얄 법인 전직원 단합대회 제안>을 쌍수를 들고 반긴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토요일부터 월요일 오전까지.

2박 3일간 내부 공사를 핑계로 운영중인 호텔을 임시 휴업하고 통째로 호텔을 빌려주는 방식의 계약이었다. 원래 근무하던 직원들에게도 유급휴가를 조건으로 모두 내보냈다. 그렇게 텅 빈 호텔을 고스란히 인수받은 로얄 기획 직원들은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호텔 주방을 접수한 전문 셰프들은 서울에서 공수해온 식재료를 바탕으로 이틀 분량의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객실을 담당하는 파트 역시, 클리닝 전문 업체를 동원하여 호텔내 50여개 객실을 말끔하게 청소했다.

보안팀의 경우는 호텔 주변 고지대 감시 포인트를 빠짐없이 체크하고, 호텔로 진입하는 유일한 도로까지 점거하면서 외부인이 함부로 드나들 수 없도록 통제했다.

일련의 과정은 로얄 기획의 총괄 책임자인 지실장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평소엔 정체 불명의 유령 회사처럼 존재하던 로얄 기획 직원들은, 사실 국내 외 유수의 기업에서 거액을 주고 데려온 인재들.

통상 회사라는 조직은 상위 20%의 인재들이 전체 매출의 80%를 담당한다고 하는데, 로얄 기획 직원들은 전부다 상위 20%에 드는 에이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짧은 시간동안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이 맡은 업무를 처리하는 능률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증명했다.

그중 압권은 호텔 앞 주차장에 배치되는 구조물이었다.

대형 컨테이너 트럭을 이용해 밤새 운송된 25개의 구조물은, 흡사 공중전화 박스를 연상시키는 크기였다.

박스는 위아래가 꽉 막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성인 허리 높이로 컵라면 뚜껑 크기의 구멍이 동서남북으로 뚫려 있었다.

새벽 내내 날밤을 새며 글로리 홀 박스의 설치를 전담한 김실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이, 거기! 좀 더 옆으로! 위에서 봤을 때 바둑판 식으로 배치하란 말 못들었어?"

크레인 기사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던 김실장은, 뿔테 마녀의 등장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지실장님."

"고생 많네요, 김실장님. 맡은 인원들 챙기기도 정신없을 텐데 ···."

"하하. 걱정 마십쇼. 제가 원래 어디 출신인지 잘 아시잖습니까?"

"원래는 건축 쪽 일하셨죠? 구조기술사셨던가?"

"맞습니다. 근데 원래 저희 쪽 일이라는 게 현장투입 부터 시작하거든요. 사무실에서 설계도면 붙잡고 펜 대 굴리는 일 보다는, 노가다 십장들하고 멱살 잡으면서 일을 배웠습니다."

"호오, 그래요?"

"아유, 말도 마세요. 옆에서 감시 안하면, 설계도 무시하고 지들 꼴리는대로 대충 작업을 해놓는단 말이죠. 나중에 감리할 때 다 책 잡힐거 뻔히 알면서. 그거 가지고 이 새끼 저 새끼하면서 삿대질 하고 투닥 거리는 게 일상이었죠."

"대단하시네요. 어쩐지 너무 능숙하신 것 같았어요."

"그때 경험덕에 현장은 늘 익숙합니다."

지실장은 넓은 주자창에 자로 잰듯 배치된 글로리 홀 박스를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하룻밤 만에 뚝딱 만들었다고 보기엔 마감도 상당히 매끈히 빠져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세요. 이걸 어떻게 하룻밤에 만드셨어요?"

"회의 때 말씀드렸다시피, 대한민국에선 돈만 있으면 무조건 기한 안에 납기가 가능합니다. 5명이서 할 일을 50명을 동원하고, 2배 씩 특근 수당 주면서 밤새 만들라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죠."

"아무튼 고생하셨어요. 참가자들 입장에선 급조한 이벤트인 줄절대 모르겠어요.""그럼 다행이죠. 이제 마지막 두개만 더 설치하면 끝납니다.""알겠어요. 그럼 20분 뒤에 대기하는 인원들 이쪽으로 이동시킬게요.""네. 잘 마무리하겠습니다."

호텔 준비 상황을 발로 뛰며 확인한 지실장은 손에 든 소형 무전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보고했다.

"회장님, 세팅 20분 전입니다."

-치직-. 그래. 영상팀한테 현장 실시간 중계될 수 있도록 준비해줘.

"중계요? 직접 참석 안하시고요?"

-예선전에서부터 회장이 출석하는 건 모양 빠지지 않겠어? 난 그냥 호텔 로비에서 폰으로 구경할게. 지실장이 고생좀 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 * *

"뭐야? 저쪽이 길인 것 같은데 왜 막혀있지?"

달달 거리는 차를 몰고 강원도 산골의 호텔까지 달려온 도훈은 바리케이드로 막힌 출입로를 보고 당황했다.

내비게이션을 봐선, 호텔이 위치한 산중턱으로 향하는 입구는 그곳이 유일했다. 그런데 마치 검문 검색을 하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배치된 바리케이드와 검은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쓴 인원들이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차량 속도를 줄이고 검문대에 접근한 도훈이 차창을 내리자, 선글라스를 쓴 인원 한명이 도훈에게 다가왔다.

"수고하십니다. 방문 목적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여기가 로얄 클럽 정기 모임 장소 아니에요?"

"맞습니다. 명단에 있는 인원만 참석할 수 있습니다. 신분증을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도훈은 군인처럼 딱딱하게 말하는 직원이 일전에 봤던 여경호 원과 비슷한 복장임을 깨달았다.

'저 사람들도 미선처럼 경호팀 직원들인가?'

[생각보다 철저하군요. 무슨 군사기밀 시설도 아닌데···.]

'그러게. 보안에 엄청 신경쓰네. 누가 IT전문가 아니랄까봐.'

[IT전문가는 왜요?]

'본인이 해커 출신이다보니 더 보안에 신경쓴다는 소리야. 혹시나 외부인이 들어와서 난교 파티 현장을 목격이라도 한다면 감당이 안 될테니까.'

[원래 이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어떻게 하고요?]

'아마 진즉 내보내지 않았을까?'

[인원이 150명이 넘게 모이는데, 도와주는 직원도 없이 모임을 진행할 수 있습니까?]

'나야 모르지. 다 방법이 있겠지. 이런 모임을 하루이틀 해 본것도 아닐텐데.'도훈이 신분증을 내밀자,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이 세심하게 사진과 도훈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도훈씨 본인맞죠?"

"네. 맞습니다."

"혹시 핸드폰 뒷자리가?"

"네?"

"협조 부탁드립니다. 신원 확인을 위한 절차입니다."

"흠. 010···."

도훈이 폰 번호를 말하자 경호원이 명부를 확인하더니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걸리자 도훈이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보였다.

"제 번호 맞죠?"

그때였다.

갑자기 직원이 도훈의 핸드폰을 낚아채려는 것이었다.

"···어?"

갑작스러운 기습이었지만, 도훈은 당연히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훈 정도의 무공 고수가 손에 쥔 물건을 남에게 빼앗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재빨리 핸드폰을 감싸며 뒤로 손을 뺀 도훈이 경호원을 째려보며 물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죠?"

도훈이 보여준 빼어난 반사신경에 당황한 경호원이 뻘쭘해 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아···. 당연하지만 핸드폰은 내부 반입 불가입니다."

"네?"

"혹시 정기 모임이 처음이신가요?"

"네."

"그래서 모르셨군요. 회칙에 따라 핸드폰은 모임 기간동안 압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귀가할 때 돌려드리고요."

"아니···. 그런거면 미리 말씀을 해주시면 되지."도훈이 핸드폰을 건네며 핀잔을 주자, 경호원이 민망한듯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데 폰을 압수하는 이유는 알겠는데, 다른 폰을 몰래 들고 가면 어떻게 돼요?"

"담당 매니저님께서 나중에 설명하시겠지만, 핸드폰을 비롯한 기타 영상 촬영 장비 혹은 녹취 장비가 발견될 경우엔 클럽에서 영구 제명 조치됩니다."

"그렇군요."

"당연히 소지하지 않고 계시겠지만, 혹시 빠뜨린 물건이 있다면 지금 즉시 반납해주시면 됩니다."

'로시. 내 세컨폰은 어떻게 하지?'

[아공간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물건은, 전파감지에 걸리지 않습니다. 다른 차원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상관없겠네.'

"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도훈님, 신분 확인 되셨습니다. 길 따라 쭉 올라가서 주차장에 주차하시면, 다른 직원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래요."

바리케이드가 열리자 도훈이 산길을 따라 쭉 올라갔다. 호텔로 향하면서 도훈은 생각외로 빡 샌 보안시스템에 혀를 내둘렀다.

'지독하네. 무슨 동호회 모임하면서 저렇게까지.'

[이런 철저한 보안 때문에 김희재의 난교 클럽이 세상에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거군요. 정말 대단한 정성입니다.]

'그러게. 군사 작전도 저렇게는 안하겠네.'

산길을 따라 5분쯤 올라가자 슬슬 중턱에 자리한 호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호텔이었는데, 그보다는 주차장이 광활하리만치 넓은 게 특징이었다.

'싼 땅에 건물을 올려서 부지는 엄청 넓구나.'

[근데 주차장 한 켠에 뭔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건 또 뭐지?'

도훈이 이미 주차된 차 옆에 주차를 하자, 곧 이어 정장을 입은 다른 여직원이 마중나왔다.

"이도훈님 되시죠? 이쪽으로 따라 오세요."

벌써 밑에서 무전으로 신원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생전 처음보는 직원이 도훈의 이름을 부르며 주차장 구석으로 안내했다.

"근데 호텔 로비는 저쪽 아니에요?"

"아, 가는 길에 설명 드리려고 했는데, 오늘은 특별히 남자부 예선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남자부 예선이라고요?"

도훈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묻자, 직원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네. 자세한 예선 게임 룰은 총괄 실장님께서 직접 설명해 주실 겁니다.""잠깐만요. 이 얘기는 사전에 없었는데요?"

"맞습니다. 일종의 깜짝 이벤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회원도 예선에 대해선 공지 받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도훈은 점점 의아해졌다.

로얄 클럽의 모임이라는 것이 단순히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파티를 벌이며 밥먹고 술먹고, 그러다 눈 맞으면 아무나 데리고 빈방에 들어가 섹스를 즐기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 데, 난데 없이 도착하자 마자 예선을 치른다고 하니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무슨 예선을 치르는 건데요?"

"게임 내용에 대해선 미리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게임 내용 말고요. 이걸 왜 하는지는 알려줘야죠."

도훈의 계속된 질문에 안내 직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마지못해 대답했다.

"쉽게 말씀드리면 오늘 남성 회원 중 스무명 이상은 바로 탈락할 예정입니다."

"탈락이라고요?"

"네. 남녀 비율이 맞지 않아 부득이 그렇게 되었습니다.""아니, 3시간 동안 달려서 강원도까지 왔는데···.""다들 마찬가지인 상황입니다. 대신, 예선에서 아쉽게 탈락하신 분들에겐 왕복 교통비를 비롯해 이틀간의 여비를 2배로 챙겨드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니 돈이 문제가···."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닐겁니다. 저는 여기까지밖에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 어이가 없네. 이거 잘못하면 모임에 참석도 못하고 초장 탈락하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꿍꿍일까요?]

'나야 처음 왔으니 모르지. 아씨, 미선이가 설명한 거랑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이런 게 있으면 미리 알려줄 것이지.'

[이제 핸드폰도 빼앗겼으니 따로 연락할 수단도 없겠군요.]

'뭐, 김희재가 이곳에 왔을테니 경호원인 미선이도 따라왔겠지.

나중에 찾아봐야지.'

여직원의 안내에 따라 간 곳에는 먼저 도착한 남자들이 서 있었다. 딱 봐도 십수명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었는데, 서로 구면인 사람들끼린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몇몇은 위장막으로 가려진 정체불명의 구조물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훈은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뻘쭘한 표정으로 혼자 우두커니 서서 다른 회원들을 구경했다.

처음 보는 로얄 클럽의 남자 회원들은 워낙에 각양각색이었다.

나이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직업도 서로 너무 달라 보였다.

눈에 띄게 잘생긴 사람도 드물었지만, 또 그렇다고 뚱뚱하거나 못생긴 남자들도 거의 없었다.

'근데 여자들은 대체 어디 있는거야?'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마이크를 잡고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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