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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2018화 (1,998/2,000)

2018 ex wife-93-

* * *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미선이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김희재의 사무실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는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급히 비상계단으로 뛰어가더니 핸드폰을 꺼내 집어 던졌다.

벽에 부딪힌 핸드폰이 박살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미선은 그마저도 성에 안차는지 액정을 내리 찍듯 구둣발로 짓밟았다.

콰직-!

"···씨발. 거지같은."

김희재 앞에 서있던 10분여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24시간 감시하는 사이코 상사 앞에서, 알몸으로 내던져진 심정이랄까?

도청되는 핸드폰을 완전히 박살내고도 미선은 좀처럼 안심할 수 없었다.

보안 의식이 나름 철저한 자신의 핸드폰마저도 부지불식간에 도청 어플이 설치될 정도면, 다른 경호 장비에도 벌써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하아···젠장. 새로 산지 반년도 안 된 폰이었는데···."

미선이 벽에 기대있다가 힘이 쭉 빠진 듯 주르륵 미끄러졌다.

배신자로 몰린 채 하도 시달린 탓에, 긴장이 풀리는 순간 온몸의 힘이 쭉 빠져버렸던 것.

'···회장은 상상 이상으로 사이코야. 이대로 두면 도훈이가 위험하지 않을까?'

사실 그녀는 회장 앞에서 충성을 맹세 했지만, 속으로는 그의 타킷이 된 도훈을 걱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회장은 마음만 먹으면 눈 하나 깜빡 않고 도훈을 담가버릴 사람이었다. 막대한 자금력은, 현대사회에선 절대권력과 동의어니까.

돈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엔 너무 많았다.

'어서 경고해줘야 할 것 같은데, 다른 연락수단은 너무 위험해.

역시 직접 만나러 가야 하려나?'

계단참에 주저앉은 미선이 초조한지 손톱을 물어뜯으며 고민했다. 긴장하면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당장 도훈에게 달려가려던 미선이 뭔가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만, 이거 혹시···.'

미선은 문득 이마저도 희재의 흉계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김희재라면, 마치 함정을 파듯 자신을 미끼로 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었다.

'아무래도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하겠어. 어쩌면 함정일지도 ···. 도훈이한테 김희재 회장이 노리고 있다고 알리는 건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해야겠어. 지금 나섰다간 오히려 도훈일 더 곤란하게 만들거야.'

생각을 정리한 미선은 파손된 핸드폰을 태연하게 집어 들더니 경호팀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팀장에게 보고했다.

"팀장님, 계단에서 폰을 떨어뜨려서 이렇게 돼버렸습니다."

"뭐? 아무리 바닥에 떨어졌어도 이렇게나 박살이 났다고? 무슨 트럭이 깔고 간 거 아니야?"

"계단 틈 사이로 빠져서 3층 높이에서 추락했습니다."

"이런. 내일이 정기 모임날인데 연락을 무전으로만 할 거야?

예비 수단을 확보하는 건 기본이잖아."

"네. 그래서 당장 개통가능한 공기계를 구해보려고 합니다. 잠시 외출 좀 가능할까요?"

"얼른 다녀와. 자네답지 않군."

"···송구합니다."

* * *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김희재가 피식 웃었다.

"이야, 이걸 안 낚이네? 곧바로 연락할 줄 알았더니, 정말 공기계만 구하고 오는 건가?"

"그게 무슨 소리세요, 회장님?"

"오빠, 우리 말고 요새 다른 여자랑 썸타는 거 아니죠?"

회사에서 퇴근한 뒤 호텔 스위트 룸으로 간 희재는 나린과 민하와 함께 나란히 킹 사이즈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귀찮은 게 질색인 희재는 곧바로 폰을 덮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장난감이 원하는대로 안 움직여서 짜증날 뿐."

"장난감이라뇨? 기껏 불러 놓고선 아까부터 폰만 들여다 보고 계시잖아요."

"맞아. 간만에 보자고 해서 잔뜩 기대했는데···."

"미안. 설마 삐진 거 아니지? 욕조에 물 다 채워졌겠다. 기분 전환 겸 셋이 목욕이나 할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희재가 샤워 가운을 좌우로 펼치며 훌렁벗더니, 창가에 설치된 욕조로 걸어갔다. 속옷도 걸치지않은 그의 알몸은 보기보다 단단해 꽤 육감적으로 느껴졌다.

"꺄아, 오빠 뭔데!"

"변태다, 변태!"

희재는 자신을 향해 꺅꺅 거리는 두 비서를 돌아보며 방긋 웃더니 욕조에 발끝을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민하와 나린도 재빨리 탈의를 마치며 순식간에 알몸으로 변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호텔 꼭대기층 창가에 배치된 욕조안에 몸을 담갔다.

주변에 높이 솟은 마천루는 이곳이 서울 스카이라인의 최첨단임을 상기시켰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이 반딧불처럼 반짝였고, 멀리 보이는 한강역시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빛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이곳은, 하룻밤에 천만원도 훌쩍 넘는 최고급 스위트 룸.

하지만 김희재에겐 그런 비용도 3만원짜리 여인숙과 다를바 없었다.

누군가에겐 평생 경험도 못해볼 온갖 사치스러운 것들이, 그에겐 편의점에서 파는 껌을 싸고 있는 껌종이만도 못했다.

욕조는 실내에 설치된 것치고는 지나치게 넓었고, 각종 입욕제와 꽃잎이 펼쳐져 있었다. 간이 테이블 위에세팅된 최고급샴페인 역시 호사스러움의 극치였다.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현장에서, 민하와 나린은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우린 모임을 왜 강원도까지 가서 해요? 그냥 이 호텔 빌렸으면 서울에서 쭉 기다리면 되는데."

"음, 그건 너무 비싸지 않을까? 다른 예약도 밀려 있을 테니 통으로 빌리는 것도 어려울 테고."나린과 민하가 각자 의견을 내자 희재가 말끔하게 정리했다.

"가격은 딱히 문제가 아니야. 임대가 안된다고 하면 통째로 사버리면 그만이니까.""와우, 역시 우리 회장님 클라쓰!"

"그렇군요. 사버리면 되는 거구나."

"근데 서울 한복판은 아무래도 보안 문제가 제일 걸리지. 도심중심가에서 스테프 포함 거진 200명의 사람들이 호텔을점거하고 난교 파티를 벌인다고 하면 과연 보안이 지켜질까? 아무리 통제해도 빈 틈이 생기기 마련이거든."

"그렇구나. 하긴 강원도는 많이 외진곳이니까···."

"그것도 있고.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어."

"무슨 이유요?"

"주기적으로 회원을 정리하려는 목적이지."

"회원 정리라면···."

"아하, 최대한 먼 곳으로 모임 장소를 정해서 참석자들에게 부담을 주려는 거죠?"

"맞아. 어차피 차비는 우리 쪽에서 다 대주니까 돈의 문제는 아니고."

"그럼요?"

"시간."

"시간요?"

"우리 회원으로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돈보다는 시간이 넘치는 사람이야. 언제 모임을 열어도 재깍재깍 모일 수 있는.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임에 참석할 의지가 있거나."

"호오. 그런식으로 떨궈내는 거군요?"

"하긴, 고인물이 너무 많아져도 재미 없죠. 멤버도 가끔 물갈이 돼야지."

"이번엔 그래도 신입 회원 둘이나 들어오잖아요. 여자 한명 남자 한명 맞죠?"

"남자 회원이면 이도훈 말이지?"

희재가 씩 웃으며 민하와 나린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는 두 사람이 이미 도훈과 붙어 먹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네. 꽤 괜찮던데요?"

"저도 동의해요."

다만 두 사람이 도훈을 만났을 때는, 그가 스마트워치의 소유자라는 걸 알기 전이었기 때문에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도훈과 둘이서 떡을 쳤다는 소식에 기뻐하기까지 했던 그였다.

"너희들···. 혹시 이상한 점 못 느꼈어?"

"무슨 이상한 점이요?"

"이도훈요?"

"응. 저번에 만났었다며?"

"그쵸."

"음, 물건이 너무 크다는 거?"

"그거 말곤?"

"섹스를 무척 잘해요."

"아주 잘하죠."

"정력도 좋고."

"정말 그게 다야?"

"네?"

"아니면 뭐요?"

희재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었다.

그가 아는 스마트워치의 소유자는 천재적인 프로그래머였다.

천재 중의 천재라는 그마저도 열등감을 느끼게 할만큼.

'이쪽 계열이랑은 거리가 너무 멀어 보이는데?'

심지어 해킹을 통해 파악한 도훈의 신상은 더욱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인서울 턱걸이 수준인 국성대, 그것도 전공은 사범대 체육교육과. 학점이 제법 높긴 했지만, 3류 대학에서 받은 성적 따위야 희재에겐 관심 밖이었다.

그가 일했던 실리콘밸리에선, 대학교 성적 따위는, 전날 술마시며 날 밤을 새고도 올A+로 졸업한 괴물들이차고 넘쳤기때문이었다.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들에게 학점 따위는 어떤 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대체 뭘까? 분명 그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희재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10년 전 실종된 호주 출신의 프로그래머와, 이도훈 사이에선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도훈이 가진 특이한 점이라곤, 커다란 대물의 소유자란 것과 보기 드문 섹스 능력을 갖췄다는 것 뿐.

나린과 민하가 욕조에서 서로 물장난을 치고 노는 사이, 고심하던 희재가 뭔가를 떠올렸다.

'가만, 설마 그럼 섹스 자체가 능력인건가?'

"꺄아, 뭐야. 내 가슴을 왜 만지는데?"

"네가 먼저 가랑이 사이에 발을 밀어 넣었잖아!"

두 사람이 계속 음탕한 짓을 벌이는 중에도 희재는 점점 생각을 확장시켰다.

'하긴. 놈을 만난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건 기가 막힌 섹스 능력이긴 했었지. 만약 진짜로 놈이 섹스에 특화된 능력을 갖고 있다면···. 근데 그게 말이 되는 건가?'

10년 전 실종된 프로그래머는 희재에게 있어서, 평생동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그가 큰 부자가 되고나서도 별도의 정보원을 고용해 전 세계를 뒤져 행방을 수소문했을 만큼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희재는 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그를 납치해 땅 속 깊이 파묻거나, 시체마저 태워버린 것처럼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는 사실만 재확인했을뿐.

그렇게 영영 풀지 못할 것 같은 퍼즐의 조각이 우연히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가 차고 있던 독특한 스마트워치를 손목에 찬 상대가.

'어쩌면 혹시 그런 건가? 스마트워치가 일종의 강화물이라면 설명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소유자가 원하는 능력을 무한대로 증폭시켜 해당 능력을···.'

"어엇?"

생각을 이어가던 희재는 갑자기 물속에서 벌어지는 소동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욕조 밑으로 잠수한 나린이 난데없이 자신의 잦이를 입에 넣고 빨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민하가 욕조에서 반쯤 몸을일으키더니 희재의 뒤로 다가가며 말했다.

"회장님. 일은 그만하고, 이제 저희랑 같이 놀아요.""아니 나는···.""쉿-. 아까부터 계속 딴 생각만 하시니까, 저희가 너무 섭섭해요. 저흰 회장님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고용된 비서들인걸 까먹으신 건 아니죠?"

"으, 음···."

"저희도 이제 월급 받은 값어치를 하게 해주셔야죠."

"굳이 안 그래도 난···."

"내일 모임 때 되면, 다른 놈들이 저흴 실컷 따먹을 거니까 얼른 먼저 맛 보세요."민하의 마지막 말에 희재는 자기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물속에서 나린이 빨고 있던 잦이에 갑자기 힘이 가해지며딱딱해진 것이다.

"크흠. 어쩔 수 없구먼. 들어오라고."

"히히, 이제야 좀 회장님 같으세요."

세 남녀가 욕조 안에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희재는 점점 혼탁해지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만약 내 추론이 맞다면, 내일 모임에서 이도훈 그 놈을 시험해 보면 알게 되겠지. 그 시계가 가진 능력이 진짜로무엇인지 말이야.'

* * *

도훈은 아침 일찍부터 강원도로 달려갔다.

"에이 빌어먹을 똥차 같으니."

도훈은 잘 나가지 않는 중고차를 원망했다.

위장을 위해 싸구려 국산차를 산 것이 화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기어 변속할 때 탁탁 튀는 거 모르겠어? 자동 변속기 맛이 간 것 같아.'

[이런···. 그러니까 좋은 차로 바꾸시라니까요. 돈도 많으신 분이 이게 뭡니까?]

'그렇다고 무작정 고급 스포츠카로 바꿀수도 없잖아. 남들이 보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숨겨진 재벌 3세?]

'재벌 같은 소릴···. 아, 맞다. 그렇게 하면 되겠네.'

[뭘 말씀입니까?]

'차를 두대 모는 거야. 평소에는 위장용 국산 중고차. 그리고 필요할 땐 최고급 외제 스포츠카로.'

[호오. 필요에 따라 바꾸시는 건가요? 차고는 어떻게 하고요?]

'돈만 주면 월주차 끊고 세워둘 데 구하는 건 일도 아니지. 이번 원정 끝나면 딜러 한 번 알아봐야겠다.'

[차는 새로 사셔도 좋지만, 주인님 명의로 하시는 건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김희재 같은 놈들 때문에?'

[네. 주인님의 재산을 추적하면 가장 먼저 눈에 띌 테니까요.]

'근데 김희재 그 새끼는 속을 알 수 없단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번에 만나면 속마음부터 읽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지. 어차피 민간인 따위가 나한테 위협이 될 일이야 없겠지만.' 속도를 더 낸 도훈이 강원도 모 호텔에 도착한 것은 모임 시간을 10분 남짓 남겨놓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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