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ex wife-92-
"난 솔직히 미선이 너한테 실망했어."
"정말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그때는 너무···."
"아니. 내가 왜 실망했는지 이유도 모르고 무작정 사과하지 말라고. 엉뚱한 사과를 받는 것은, 사과를 안 받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럼 혹시 저에게 실망하신 이유가···."
"이도훈이 회장한테 개인적인 감정이 있냐고 물었을 때 말이야."
"아···."
"그때 네가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고 했잖아. 난 그게 너무 서운하더라고."
"그것은···."
김희재는 미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시가 케이스를 열어 시가를 꺼냈다. 시가 끝을 가위로 싹뚝 자른 그는 오랜 시간 시가에 불을 붙이며 미선의 변명을 대충 흘려 들었다.
"···회장님에 대한 저의 충성심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대답 다 했어?"
희재가 시가 연기를 내뱉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선의 대답은 전혀 듣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오직 자신이 말할 타이밍만 기다린사람 같았다.
"난 말이지, 사실 미선이 너 좋아했다."
"예, 예? 아니···."
"못 믿겠다는 표정이네? 정말이야. 매일 섹스타에 올리는 영상에 좋아요 버튼도 제일 먼저 눌렀다니까? 몰랐지?"
"그건···."
"이렇게 뜨거운 여자가 회사에만 나오면 차가운 가면을 쓰고 감정없는 로봇처럼 일만 열심히 해대는데, 그 반전 매력이 어찌나 섹시하던지. 미선아, 솔직히 나 너 상상하면서 딸친 적도 있었다."
"회, 회장님!"
희재의 낯뜨거운 자백에 미선은 몸둘 바를 몰랐다.
괴짜, 혹은 괴인으로 불릴만큼 평소 기행을 일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노골적인 모습은 상상도 못해본 경우였다.
동시에 미선은 도무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희재가 자신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대체 왜 도훈의 집에 가라고 명령했다는 말인가? 면접 당시에 도훈의 좆까지 빨게 해놓고, 집에 따라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았으면서.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네?"
"아, 아니 저는 그것이 아니라···."
"하긴, 좋아한다면서 왜 도훈이 그 자식을 밀착감시 시켰는지 이해가 전혀 안 되겠지? 심지어 놈이랑 붙어먹으라고 직접 내입으로 명령까지 내리고 말이야."
"······."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난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다른 새끼들한테 따먹힐 때 너무 흥분돼. 아까 몰래 녹음했던 파일에서 미선이 네 신음소리 찾아 듣는데, 진짜로 잦이가 터질 뻔 했다니까?"
"···회, 회장님!"
미선은 당혹감을 넘어 패닉에 빠질 것 같았다.
'벼, 변태 정도가 아니야. 이건···.'
미선은 희재가 사이코로 보였다.
정상인의 반응이라곤 볼 수 없는 광인의 정신 세계였다.
"난 그래도 미선이 네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는지 알았지. 몸은 다른 놈한테 대줄 수 있어도, 마음을 내주는 건 반칙아닌가?"
"회, 회장님···."
"그래서 묻는 거야. 이도훈 그 새끼가 그렇게 좋았냐? 한번 자보고 푹 빠질 정도로?"
"아, 아닙니다."
"좆까는 소리 말라고! 다시 한 번 들려줘? 미선이 네가 얼마나 개처럼 헐떡거렸는지? 아주 미치고 환장한 여자처럼 따먹히던 소리를?"
난데없이 급발진한 희재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하지만 어지간한 녹음실 이상으로 방음 설계된 사무실에선 밖으로 조금도 소리가 새어 나갈 수 없었다.
"이러면 내가 너한테 왜 비싼 연봉을 지급해야 할까?"
미선은 도저히 버티기 힘들었다.
변태 상사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미치광이 밑에선 일하고 싶지 않았다. 김희재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그만 두겠습니다."
"뭐?"
"정말로 죄송합니다. 회장님이 절 아끼고 거두어 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못 했습니다. 경호원으로서 자격 상실입니다. 저는···."
"에이, 그건 아니지."
언성을 높이던 희재가 갑자기 부드러운 말투로 바뀌었다.
"미선아. 잘못은 누구나 하는 거야. 그런 실수 한 번 했다고 내가 너를 자를 사람으로 보였어?"
"아, 아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드라이하게 사무적으로만 접근해 보자. 너한테 나 좋아해 달라는 얘기는 안 할테니까."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신지···."
"이도훈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점이 너무 많거든."
"네?"
"그냥 이건 내 짐작인데, 이 새끼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아."
"······."
미선은 이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이라기 보단, 자유자재로 텐션을 조절하는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이렇게 순식간에 태도를 바꿀거면 뭣하러 방금 전까지 길길이 날뛰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선이 충격을 먹은 것도 아랑곳 않고 희재가 혼자 얘기를 시작했다.
"잠깐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줄게. 내가 미국에 있을 때 있던 일인데···."
김희재가 실리콘밸리에 있을 때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동나이 대 적수가 없을 정도로 촉망받던 IT천재였던 그였지만, 막상 미국에 가니 괴물같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처음으로 벽을 느낀 그는 날 밤을 새가며 프로그래밍에 매달렸고,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세계적인 천재 개발자들 사이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근데 말이야, 우리 옆집에 호주에서 온 개발자 녀석이 하나 있었단 말이야? 맨날 집으로 여자 불러다 떡치고, 밤새 파티 하면서 술만 처먹던 녀석이었어. 그런 새끼가 뭐하러 호주 시골에서 실리 콘 밸리까지 넘어왔나 의심스러울 정도였어. 그냥 여자 만나러 미국왔나 싶었지."
"······."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야기에 미선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 새끼가 어플 하나를 공개하고는 주변 개발자들에게 SNS로 소개를 하더라고. 시장에 출시하기 전 마지막 베타 테스트인데 제대로 작동하는 지 한번만 봐달라고 말이야.
난 속으로 잔뜩 비웃었지. 평소에 제대로 일도 안하는 놈이 만드는 어플이 과연 어떤 수준일지 짐작이 되잖아. 보나마나 겉만 뺀지르르한 정크 어플 하나 만들었겠거니 하고."
"······."
"그런데 이게 왠열? 씨발, 좆나 욕 나오게 잘 만든 거야. 이전까지 있던 동종의 어떤 어플보다 직관적이고, 편리했어. 그냥 세대를 뛰어넘은 수준이었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코드를 열어 일일이 점검했단 말이야? 솔직히 말도 안되잖아. 매일 펑펑 놀면서 제대로 일도 안하던 놈이 어떻게 그런 천재적인 어플을 뚝딱 만들었는지 말이야."
"······."
"물론 그 새끼가 단순히 천재일 수도 있겠지. 그냥 줄글을 쓰는 대로 언어를 짰는데, 한번에 그렇게 나올 수도 있었을 거야. 내가 자질이 모자라서 천재를 시기하고 질투한 것일 수도 있어. 근데 이해가 안가서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내가 원래 뭔가에 꽂히면 다른 일을 손에 못 잡거든."
"······."
"그래서 내가 뭘 했는지 알아? 놈의 컴퓨터를 해킹했어. 어떻게 보안을 뚫었냐고? 물론 옆집이라 가능했지. 아예 물리적으로 해킹을 시도했거든. 쉽게 말하면 놈의 모니터를 우리집 모니터에 복제한 것과 같은 거야. 해킹이라고 말하기도 유치한 수준이지."
"······."
"어쨌든 그렇게 놈이 프로그래밍을 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었지. 그때 내가 뭘 봤는지 알아?"
"···뭔데요?"
"그건 천상의 기술이었어."
"···예?"
"도저히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었어. 놈은 우리같은 인간 프로그래머들이랑은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프로그램 코드를 짜고 있더라고. 마치 미래의 기술을 고스란히 베낀 것처럼 말이야."
"어떻게 그게···."
"이상하지? 나도 어디가서 한번도 꿀려본 적 없는 천재중에 천재였단 말이야. 내 자랑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지간한 IT분야 천재들도 내 앞에선 명함도 못 내미는 수준이야. 근데 그 새끼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니까? 태어나서 본적도 없는 방식이었어."
"······."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고 놈에게 직접 가서 물어보려고 했지.
대체 뭘 보고 배끼는 거냐고. 그런 기술이 어디서 난 거냐고."
"근데요?"
"갑자기 사라졌어."
"네?"
"출시를 앞두고 베타 테스트를 진행하던 중에 하루 아침에 실종되어 버렸다고. 그뒤로 거짓말처럼 베타 테스트하던 페이지는 완전히 폐쇄되고,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어. 놈의 어플에 영감을 얻은 다른 개발자가 겉모습만 비슷한 다른 어플을 만들어서 대박을 내긴 했지만, 원본을 본 입장에서 보면 비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지."
"······."
"아마 그때부터 였을 거야. 이 세상엔 내가 모르는 존재가 있고, 그것이 어쩌면 미래의 기술을 이용하는 자들이 아닐까 하는."
"어떤 말씀인지 대충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이야기가 이 도훈과 무슨 관계가 있는줄 잘 모르겠습니다."
"그치? 모르겠지? 한 명은 미국에서 실종된 프로그래머고, 또한 놈은 그냥 섹스만 잘하는 난봉꾼 대학생이니까. 둘 사이에 어떤 접점도 없어 보이잖아."
"···네."
"근데 왜 그 두 놈이 똑같은 스마트워치를 차고 있었을까?"
"···스마트 워치요?"
김희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나도 긴가민가 했어. 스마트 워치야 요샌 워낙 흔한 물건이잖아. 원리도 단순하고, 마음만 먹으면 좆소기업에서도 금방 만들 수 있지. 부품은 널렸거든. 중국 선진에 주문만 넣으면 그만이야."
"······."
"근데 없어. 놈이 찬 스마트워치 디자인은 전 세계를 다 뒤져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는 거야. 그냥 흔해 빠진 물건이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건이라는 소리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실종된 프로그래머가 차고 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아···."
"내가 하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예전에 우연히 놈과 함께 찍은 사진을 뒤져 봤거든. 운 좋게 놈이 반팔을 입고 있었고, 당시엔 흔치않던 스마트워치가 또렷히 찍혔지. 그리고 그걸 이도훈이 면접 보러 왔을 때 CCTV에 찍힌 사진과 비교해 보니까···."
"설마···."
"똑같아. 완전히 똑같은 제품이었어."
"세, 세상에···."
"이제 좀 이야기가 이상하지? 한국에 있던 이도훈이, 10년 전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있던 프로그래머가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를 무슨 수로 물려 받았을까?"
"······."
"아니면 세상엔, 그와 비슷한 기계를 찬 인물들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이 세상 기술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능력을 발휘하는 미래인들이 말이야."
"그, 그것은···."
"그래서 미선이 너에게 묻는 거야. 이도훈의 집에 갔을 때 특이한 점은 없었어? 아니면 이도훈과 섹스했을 때 다른 사람과 다른 점 못 느꼈어? 너는 그에게 최대한 가까이 간 사람이잖아. 네 관찰력으로 봤을 때 이도훈이 뭔가 숨기는 눈치는?"
"···자, 잘은···."
"아니야. 서두를 필요 없어. 나는 그냥 궁금한 거야. 이도훈이 그 사라진 프로그래머랑 무슨 관계일까하는."
"···죄송합니다,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그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야. 다만, 네가 이도훈을 계속 추적 관찰해줘야 겠어."
"추적 관찰이라뇨?"
"내일 이도훈이 클럽 정기모임에 올 거야."
"하지만 이제 이도훈에 대한 관리는···."
"알아. 너는 이제 그를 관리할 필요는 없어. 다만 몰래 그의 행적을 관찰하고 기록하도록 해."
"관찰···. 기록이라면···."
"너는 어차피 경호원이니까 보안을 위해서 모임에 계속 참석할 거 아니야. 그?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히 확인하라는 소리야.
특이 사항이 있으면 나에게 최우선으로 보고 하고."
"···음."
"어때? 홧김에 경호원일을 그만두는 것 보다, 이게 더건설적이지 않겠어? 딱히 무리한 임무도 아니고."
"저는···."
"미선이 너 조만간 은퇴하고 경호학원 차리고 싶다며? 지금 그만두면 그 시간이 훨씬 오래걸릴걸?"
미선은 희재가 자신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을 듣고도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래. 미선이 네가 나의 경호원으로 충실히만 한다면, 나도 더 이상 이번 일로 너를 추궁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알아 들었으면 그만 가봐."
용무를 마친 희재가 미선을 쫓아냈으나, 이번에는 미선이 희재에게 되물었다.
"저, 회장님. 물러나기 전에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
"수상한 점이 있다는 건 저도 알겠는데, 이도훈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시는 이유가···."
김희재가 씨익 웃었다.
그는 사실 아직 말하지 않은 사실이 있었다.
사라진 프로그래머가 베타테스트를 공개한 사람이 주변에 사는 몇 안되는 동네 주민들이었으며, 그가 사라진 후 그의 원본을 벤치마킹해 만든 어플로 대박을 낸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도.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