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ex wife-91-
지실장은 안 좋은 의미로 뿔테 마녀로 불렸지만, 뒤끝 없기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방금 정실장을 달달 볶은 것도 잊고 금세 의기투합하며 회의를 마무리했다. 심지어 개처럼 닦이던 정실장 역시 딱히 앙금이 남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들은 프로 중에 프로였고, 회사의 위계질서를 충실히 따르는 성실한 일꾼이었다. 상사가 까라면 까는 것이 고액 연봉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기도 했다.
회의 결과를 서류로 정리한 지실장은, 아래층 사무실에에 앉아 있던 김희재를 찾아갔다. 김희재의 법인은 같은 건물의 다른 층에 입점해 있었다. 물론 건물 전체가 어차피 김희재의 소유였기 때문에 아무 의미는 없었지만.
"회장님. 업무 보고 드리려고 왔습니다."
"어, 왔어, 지실장? 잠깐만 기다려. 지금 중요한 미팅 중이라."
희재는 모니터 위에 설치된 캠으로 화상회의를 하고 있었는지, 영어실력을 뽐내며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유학파 출신에, 실리콘밸리 경력 때문인지 현지인 못지 않은 유창함이 돋보였다. 5분 가량 지나 화상회의를 마친 김희재가 지실장을 쳐다보며 방긋 웃었다.
"미안. 오래기다렸지?"
"아닙니다."
"그래, 보고서 결재 올린 건 확인했어. 이중으로 보고하지 말고 그냥 서류만 올려놓으라니까. 이러면 내가 굳이 전자결제 시스템을 만든 이유가 없잖아. 하루 꼬박새서 만든거라고."
"아···. 이번에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서 설명을 드려야 할것 같아서···."
부하 직원들 앞에선 폭군처럼 굴던 지실장이었지만, 김희재 앞에서는 유독 기를 못 폈다.
"이벤트? 아, 글로리 홀인가 뭔가 말이지? 대충 훑어 보긴 했어."
"네. 한실장의 아이디어 였습니다. 초과되는 남자 회원을 걸러내기 위해서요."
"한 번 그럼 들어볼까?"
중역 의자에 앉은 김희재가 다리를 꼬더니 두 팔을 머리 뒤로 받쳐 팔베개를 했다.
셔츠를 받쳐 입은 김희재가 가슴을 쫙 펴는 모습에 순간 설렌지실장이 얼굴을 붉히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뭐야? 지실장. 얼굴이 왜 빨개지는데?"
"아, 아닙니다."
"후훗-. 하여간 귀엽단 말이야? 편하게 해, 편하게. 난 딱딱한 분위기 싫어한다고. 괜히 서 있지 말고."
"저는 괜찮습니다."
"보는 내가 불편해서 그래. 잠깐 이리 와 봐."
김희재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지실장을 불렀다.
지실장은 영문을 모른 채 김희재 옆으로 다가갔다.
"왜··· 꺄, 꺄악!"
지실장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김희재가 갑자기 팔로 허리를 감싸 앉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지실장을 앉힌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품에 껴안긴 지실장의 얼굴이 터질것처럼 빨개졌다.
"왜? 놀랐어? 편하게 앉아서 보고 하라고."
"회, 회장님···."
"뭘 또 부끄러워해 우리 사이에. 그래서 글로리 홀이 뭔데?"
김희재가 허리를 꽉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실장은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희재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지실장도 굳이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으음, 그러니까 글로리 홀은···."
"영광의 구멍이라···. 혹시 보짓구멍 말하는 건가?"
"예, 예?"
"아니야? 그냥 아무 말이나 지껄여 본 거야."
김희재는 가끔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상스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편이었다. 지실장은 ?이라는 말에 흠칫 놀라면 설명을 계속했다.
"실은 그 반대 입니다. 그러니까···."
지실장은 회의에서 한실장이 설명한 것을 김희재에게 전달했다. 이해가 빠른 김희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흡족한 듯 웃었다.
"괜찮네. 사실 좆 작은 멤버들은 이런 게임을 통해서라도 조금은 걸러낼 필요가 있어. 명색이 난교 클럽인데, 좆도 작은 새끼들이 테크닉이 어쩌니, 정력이 어쩌니 하면서 눌러 붙어 있는 거 별로 였거든. 안 그래 지실장?"
"저, 저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그치? 지실장도 기왕이면 묵직한 좆이 좋잖아."
"아···."
오늘따라 유난히 짖궂은 김희재의 희롱에 지실장은 몸둘 바를 몰랐다. 늘 회사에선 공사를 구분하자면서 먼저 선을 그어놓고선, 종종 이렇게 자기가 먼저 선을 넘을 때가 있었다.
'아아···. 회장님 향수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아···.'
지실장은 김희재를 흠모했다.
훈훈한 외모도 그렇지만, 그의 대단한 능력을 눈 앞에서 지켜보기 때문에 그가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클릭질 몇 번으로 순식간에 200억을 버는 사내.
전 재산이 얼마인지 가늠도 안되는, 국내 최고 부자 중 한 명.
단순히 재미를 위해 로얄 클럽을 진심으로 운영하는 똘끼까지.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하는 지실장이라도 종잡을 수 없는 괴짜부자에게 끌리는 것은 어쩌면 인진상정이었다.
"회, 회장님···."
"아, 미안. 내 질문이 불편했나 보구나."
김희재가 갑자기 정색하더니 허벅지에 앉혔던 지실장을 밀어냈다. 그에게 좀 더 안겨 있고 싶었던 지실장은, 마지못한 척 밀려나며 자세를 꼿꼿이 했다.
"아닙니다."
"혹시나 직장 내 갑질 같은 걸로 신고하는 거 아니지?"
"그럴리가요, 회장님."
지실장은 절대 김희재를 배신할리 없었다.
부하 직원이기에 앞서 누구보다 그에게 푹 빠져 있는 극성 팬이었으니까.
"그래, 그래. 난 지실장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너무 섹시하더라."
"아···."
"늘 그렇듯이 수고가 많아. 이번 모임 끝나면 로얄 기획 직원들 돌아가면서 해외여행이나 다녀오라고. 특별 상여금 쏠테니까."
"안 그러셔도 됩니다, 회장님. 다들 과한 연봉을 받고 있으니까요."
김희재의 사생팬이나 다름없는 지실장은, 그가 돈을 헤프게 쓰는 것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써도 써도 쓰는 속도보다 재산이 늘어나는 속도가 더 빠른 것을 알지만, 그가 로얄 기획의 직원들에게 뿌리는 돈은 너무 과했다.
"괜찮아. 한 달에 한 번씩 날 밤 새며 고생하는데, 가끔 쉬는 날도 있어야지. 원하는 곳은 어디든 왕복 비행기 표 끊어 줄 테니, 장소만 정하라고 해."
"회, 회장님···."
지실장은 김희재의 통 큰 씀씀이에 놀라면서도, 속으로는 근사한 해외 여행보다 김희재와의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희재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컴퓨터를 잡았다.
"아무튼 알겠어. 모임이야 지실장이 알아서 하겠지 뭐. 믿고 맡길테니 늘 그렇듯이 수고하라고."
"네, 넵. 회장님."
"이만 가봐. 난 코인 시세 좀 확인해 볼테니까."
"···그럼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지실장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김희재의 사무실을 나왔다. 김희재가 천장에 달린 씨씨티비를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야. 너네 경호팀. 방금 영상은 지워라."
김희재의 말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회전형 씨씨티비가 위아래로 까딱까닥 움직였다.
"하여간 저놈들도 관음증 환자같은 놈들이라니까? 말도 없이 계속 훔쳐보기나 하고."
김희재는 감시 카메라를 두고 경호팀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혼잣말을 지껄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누군가를 호출했다.
"아, 그리고 양미선 좀 여기로 오라고 해봐."
미선은 이도훈의 집까지 따라가 라면(?)을 먹고 온 김희재의 여성 경호원이었다.
잠시 후 경호팀에서 대기 중이던 양미선이 김희재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녀는 상시 연결된 무전기를 귀에 꽂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무전기 꺼."
"네?"
"지금부터 나랑 나누는 대화는 아무도 못 듣게 하라고."
"아, 네넵."
미선이 무전기를 끄는 사이 김희재도 컴퓨터 통제 프로그램을 통해 사무실에 설치된 3개의 감시카메라를 모두 중지시켰다.
천재 해커인 그에게 있어서 통신망에 연결된 장치를 통제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자. 카메라도 모두 껐고, 무전기도 껐어. 이제 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이도훈을 밀착감시하라고 했다가, 갑자기 담당을 바꾼 이유가 궁금했을 텐데?"
"아···."
미선은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움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도 훈을 전담 마크하라는 명령을 내린지 하루도 되지 않아, 임무를 해제하며 다시 경호팀으로 복귀 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훈은 다른 남성 멤버들처럼 전담 매니저의 관리로 들어갔다.
"아닙니다. 저는 분부하신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아니던데? 재민이 말로는 이도훈 감시 업무에서 해제되니까 엄청 당황했다고 하던데? 왜 그랬어?"
"아, 아니 그건···. 다소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짓말 하고 있네. 너 진짜 나한테 그럴거야?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보다 훨씬 연봉도 많이 주고 있잖아."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행동을 했다면 모두 저의 실책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지.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야. 대체 무슨 수로 이도훈이 우리 경호팀의 홍일점을 순식간에 홀렸냐는 거야."
"그, 그게 무슨···."
"왜?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이도훈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느낀 거 아니야?"
"아닙니다."
"아닌데? 이도훈을 밀착 감시하라고 맡겼더니, 놈한테 푹 빠져서 이중 스파이 노릇을 할 줄은 몰랐지 뭐야?"
"그, 그걸 어떻게!"
실제로 도훈에게 이중 스파이 제안을 받았던 미선은 진심으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김희재가 갑자기 스마폰을 터치하더니 녹음된 음성을 들려주었다.
-내가 시키는 거 다 할 수 있겠어?
-뭐, 뭘 시키시려고···.
-대답이 그게 아니지.
-하윽!
-다시 대답해봐. 내가 시키는 거 다 할 수 있겠어?
-흐, 흐에엥, 네, 뭐, 뭐든 말씀만 하시면···.
-좋아. 이제 좀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군.
놀랍게도 그것은 미선이 도훈의 집에 갔을 때 섹스 중 나누던 대화의 일부였다. 두 사람의 음성은 마치 옆에서 도청장치로 녹음한 것처럼 완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한 증거에 미선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는···."
"얼씨구? 뭘 또 무릎까지 꿇어?"
"정말 회장님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이도훈이 앞으로 클럽 내에서 자신의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으로 이해하고···."
"알아."
"예?"
김희재가 다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알았어. 대충 필요한 건 다 물어본 것 같아.
-네, 근데···. 정말로 저한테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걱정마. 경호활동에 지장을 주는 일은 없을테니까. 말했듯이 난 김희재에겐 별로 흥미 없거든.
-아···. 그, 그러면 괜찮아요.
-넌 근데 왜 그렇게 회장한테 쩔쩔 매는 거야? 회장한테 감정있는 건가?
-그, 그럴리가요. 양심상 경호하는 대상을 배신할 수 없으니까 ···.
김희재가 거기서 녹음된 파일의 재생을 중단했다.
"캬, 다음날 녹음된 파일을 듣다가 여기서 감동해버렸지 뭐야?
진짜 난 이도훈에게 붙은 줄 알고 얼마나 섭섭했던지."
"회, 회장님···."
"놀랐지? 내가 실은 우리 회사 직원들 폰에 불법 녹음 프로그램을 심었어. 휴대폰 주변의 모든 소리를 녹음해서, 취짐시간 동안 내 서버로 파일이 전송되도록 말이야."
"아, 아니···."
"왜? 난 프로그래머잖아. 이 정도야 껌이지. 혹시나 싶어서 미선이 너랑 이도훈이 나눈 대화를 들어보니까 이런 게 있더라고."
"······."
"미선이 네가 날 배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 다만 이 도훈이 대체 왜 너한테 그런 제안을 했는지 궁금해. 그리고 놈이 얼마나 섹스를 잘하길래, 우리 미선이 마음을 단숨에 빼앗았을까 하고."
"그, 그건···."
"그러니 얼른 일어나. 누가 보면 니가 내 좆 빨아주는 지 알겠다."
"아, 아앗."
희재의 엉뚱한 색드립에 미선이 놀라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알게 된 이상 미선이 너한테 계속 이도훈을 전담마크시킬 순 없더라고. 놈이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지만,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하니까."
"···저, 저를 부르신 이유는 그럼···."
"걱정 마. 너를 추궁하려는 게 아니야. 어차피 이 녹음된 대화를 들은 사람은 나 뿐이니까. 정말이야. 재민이도 모른다니까?"
"아···."
"그러니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봐. 소리로는 듣긴 했는데, 놈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겠더라고. 직접 받아본 소감이 궁금해서 물었어."
"그, 그게···."
"왜? 나한테 말하려니까 갑자기 창피해서 그래?"
김희재는 지금 부탁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 실실거리던 그의 눈꼬리가 묘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는데, 이는 그가 과감한 결단을 할 때 보이는 눈매였다.
그런 또라이같은 눈매를 보일 때면, 김희재는 누구보다 단호하고 칼 같아졌다. 그제야 미선은 김희재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심문의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만약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간, 김희재가 정말 화를 낼 수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