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ex wife-77-
지안이 핵심을 찔렀다.
실은 도형은 담당의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
소개팅을 시켜달라는 핑계로 계속 연락을 주고 받을 핑계를 만드는 수법. 남자에 대해선 빠삭한 지안은 곧바로 얕은 수작을 눈치챘지만, 순진한 담당의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에이, 설마요. 저는 결혼할 남자도 있는데요."
"아, 그랬죠? 미안해요. 저번에 한 번 말씀하셨는데."
하지만 지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결혼하고 섹스가 무슨 상관이람? 사내 새끼들은 어차피 박을 구멍만 있으면 유부녀건 처녀건 달려드는 종자들인데. 그리고 결혼할 남자가 있는거지, 아직 법적으로 혼인을 한것도 아닌데 뭘?'
대충 견적을 낸 지안은 소개팅이 크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담당의인 여의사는 눈치없이 자신에게 작업거는 것도 모른 채 정말로 자꾸 귀찮게 구는 동기를 떠넘기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지안은 그런 상대와 만나봐야, 시간 낭비일거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김희재와 만나기 전이라면 외로워서 한 번 만나봤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었다.
딴 여자한테 마음있는 남자라면, 굳이 세컨으로 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피부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 쉬었다가 가세요. 저는 다른 예약이 잡혀 있어서."
"네, 그럴게요."
"그리고···. 소개팅 건은 여전히 유효하니까 바쁘신 상황이 풀리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제 번호 아시죠?"
"네네, 그럴게요. 감사해요. 좋게 봐주셔서."
"뭘요, 최지안님이 훨씬 아깝죠. 그래도 나름 의사니까 제가 염치없이 여쭤본 거에요. 쉬세요."
담당의가 물러나자 회복실로 들어온 세라가 물었다.
"뭐하냐 늬들?"
"뭐?"
"방금 다 들었거든? 진짜로 그 소개팅 할 생각이야?"
"아니. 대충 상황 들어보니까 텃어. 사실 안해도 그만이라."
"그래? 그럼 나한테 넘겨."
"뭐?"
"어차피 나도 결혼한 줄 모르잖아. 네가 싫으면 나한테 넘기면 그만이지."
"왜? 의사라니까 막 설레? 니가 만나는 사장님들하고는 다른 인텔리라서?"
"흐흐흐, 말하는 것좀 봐? 의사가 뭐 별거니? 연봉 좀 높은 월급쟁이지. 그게 뭐라고."
"하긴 그래. 우리가 뭐 언제부터 남자 직업 가지고 따졌다고."
"그냥, 그래도 궁금하긴 하잖아. 난 있잖아, 옛날부터 다양한 직업의 남자들을 만나보고 싶었거든."
"하긴, 너 고등학교 때 교생한테도 들이댔었지?"
"응. 그 사람 나중에 진짜로 선생 됐잖아."
"미쳤어 진짜. 그래서 잤어?"
"당연하지. 몰랐어?"
"니가 잔 남자가 한 두명이라야지 기억하지."
"선생님도 만나보고, 건축가도 만나보고, 왜 작년엔 나 목사님도 잠깐 만났었잖아."
"미친년."
세라는 지안 못지 않게 바람기가 충만한 여자였다.
사귀었던 남자들 수로만 치면, 오히려 지안보다 더 하면 덜했지 부족하진 않았다.
그녀의 특징은, 같은 직업을 가진 남자는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다신 안만난다는 것이었는데, 다양한 직업을 가진 남성들과 관계를 하는 것에 강박같은 증상이 있었다.
"왜 이래? 내 수집 콜렉션에 의사 한명 추가 하겠다는데. 어차피 너 안먹을 거면 나 주던가."
"됐어 이년아. 그리고 너 예전에 의사 만났었잖아."
"그건 치과의사고."
"치과의사는 의사 아니야?"
"다르지. 그거 기억나? 스케일링 하러 갔는데, 마침 간호가 급한 일로 조퇴하는 바람에 그 사람이 날 직접 봐줬거든."
"응. 기억나. 병원 거의 마칠 때 가서, 접수처 직원 한명 달랑 있었다며."
"응. 그렇게 누워서 입을 벌리고 있는데, 남자가 내 몸매를 대놓고 훔쳐보는 거야. 새끼, 가슴 큰 건 알아가지고."
"그래서 네가 그 새끼 좆을 콱 손으로 잡아 버렸다면서."
세라가 당시의 일이 떠오르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맞아 맞아. 어찌나 당황하던지. 그래서 내가 대놓고 말했지.
나 따먹고 싶으면 말만 하라고. 기분으로 한 번 준다고."
"진짜 세라 너도 참 또라이같단 말이야?"
"진료 대충 끝내고 바로 모텔가서 한 판 했잖아. 그렇게 6개월쯤 만났나? 은근히 그 의사가 힘이 좋았었는데."
"암튼, 소개팅은 됐어. 나 이 병원 마음에 들어서 계속 다녀야 하는데 네가 깽판치면 또 옮겨야 하잖아."
"무슨 깽판?"
"세라 네 속셈 모를 줄 알고? 나 대신 소개팅 나가서 홀랑 따먹고 버릴 거잖아."
"그럼 뭐, 총각 의사 선생이랑 사랑의 도피라도 하겠니? 몇 번 먹고나면 갈아 타야지."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해."
과거 이야기로 음담패설을 주고받던 세라는 갑자기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하아. 이런 얘기하니까 괜히 또 꼴리잖아. 안 그래도 오늘 근질근질해 죽겠는데."
"작작좀 해 이년아. 남자 못 만나서 죽을 병 걸린 것도 아니고."
"누가 할 소릴? 넌 내일 모임간다며?"
"어, 그것 때문에 아까 연락왔어. 성병 종합검사 받아오라고."
"성병 종합검사? 무슨 그런 걸 다 인증해?"
"몰라. 하도 많은 사람들이 모이니까, 필수인가봐. 괜히전염병이라도 옮으면 귀찮아 지니까."
"지안이 너 혹시 뭐 나오는 거 아니야?"
"내가 뭘? 모르나 본데, 난 너처럼 어중이 떠중이 아무나 안만 나거든? 난 검증된 사람만 만나."
"그럼 난 무슨 노숙자 만나니? 근데 언제 병원 가려고? 내일이 모임이면, 오늘 검사해도 결과 늦게 나오는 거 아니야?"
"그래서 지정병원도 알려줬어. 검사비도 내준데."
"헐. 대박이네. 어딘데?"
"그 소개팅 의사 있다는 곳."
"응?"
"나도 이름 듣고 놀랐잖아. 지정 병원이 이 피부과 근처에 있는 대물 비뇨기과야."
"와, 바로 옆이네?"
"응. 그래서 바로 또 이동해서 가보려고. 의료 쇼핑도 아니고 말이야."
지안의 얘기를 듣던 세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됐다."
"왜?"
"나도 같이 가서 검진이나 받을래."
"세라 네가? 갑자기?"
"왜? 어차피 하릴없이 너 기다릴 바에는 나도 같이 검사 받으면 되지. 그리고···. 네 말대로 살짝 불안하긴 해. 혹시나 뭐 걸렸을 까봐."
"미친년. 그러니까 작작좀 하라니까."
"누가 할 소릴? 재판만 아니었으면 너도 아랫도리 맘껏 굴리고 다녔을 거면서. 남편도 죽었겠다, 공식적으론 임자 없는 몸이잖아."
세라가 죽은 이정우 이야기를 꺼내자 지안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야. 그 새끼 얘기 말랬지 내가."
"미, 미안."
"죽은 새끼는 왜 언급해서 짜증나게."
"미안해 지안아. 난 그냥···."
지안이 정색하면 얼마나 무서운 지 알고 있는 세라가 갑자기 저 자세를 취하며 사과했다.
두 사람은 평소엔 동등한 관계처럼 보였지만, 사실 타고난 자연 미인이 지안이 성형미인이 세라를 좀 더 낮춰보는 입장이었다.
고교 동창시절부터 지안이 세라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고, 나이 들어 성형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지안은 세라보다 예뻤다.
어렸을때부터 형성된 갑을 관계는 둘 사이에 모종의 서열로 굳어졌는데, 평소에는 서로 쌍욕을 하면서 막대하다가도 지안이 진심으로 화를 내면 세라가 맥을 못추고 쭈그러드는 관계였다.
"짜증나게 진짜."
"······."
지안이 가방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더니 병원 치료실 안에서 피우기 시작했다. 세라는 안절부절한 표정으로 지안의 화가 풀리기만 기다렸다.
담배를 피우고 나면 그나마 지안의 화가 풀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너 입 조심해. 난 그 새끼 두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으, 응. 지안아."
지안이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리 악녀인 그녀라도, 눈 앞에서 사람이 죽은 모습은 태어나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달려들었다가, 역으로 상간남이었던 원준에게 급소에 칼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
심장을 찔려서 인지 방바닥에 엄청난 출혈이 일었다.
그 모습을 떨면서 지켜본 지안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올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혼돈의 와중에 자신이 무슨짓을 했는지 깨달은 원준이 손을 달달 떨면서 지안에게 말했다.
-주, 죽은 거야? 이 사람?
-아마도.
-이제 어떡하지? 죽일 생각까지 없었는데···. 무슨 이렇게 쉽게 사람이···.
-이미 벌어진 일이야.
-자, 자수할까? 어떻게 보면 정당방위잖아. 내가 칼을 들고 먼저 찌른 것도 아니고, 이 새끼가 날 먼저 찌르려고 해서 나도 모르게···.
-그 핑계가 퍽이나 먹히겠어?
-유, 윤하 네가 증인이잖아.
-그래서, 날 남편 몰래 바람이나 피우다 상간남에게 남편이 죽는 모습을 지켜본 쓰레기로 만들겠다고?
-무, 무슨 소리야? 사람이 죽었다고! 네 남편!
-어짜라는 거야? 내가 죽였어? 원준씨가 죽였잖아? 난 손도 까딱 안했어.
-이, 이 미친년이 돌았나!
-너나 정신 차려 병신 새끼야! 이대로면 아무리 정당방위라도 넌 징역이야. 깜빵가고 싶어? 고작 저 딴 새끼 때문에?
-그럼 어쩌자고? 이 시체를 어떻게 하잔는 건데?
-묻자. 시체만 완벽히 처리하면 어차피 실종으로 끝날 거야. 원준씨는 적당히 눈치봐서 해외로 잠시 나갔다 오면 될 거야.
-···윤하 너.
-왜? 그게 맞지 않아? 아님 그냥 이대로 징역받고 전과자로 평생 살 거야? 인생이 아깝지 않아? 원준씨 아직 창창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원준씨. 잘 생각해. 어떻게 보면 잘 된 일이야. 저 인간 실종신고 처리하고, 정리되면 나랑 같이 살자. 원준씨도 나랑 같이 살고 싶어 했잖아.
-으, 응.
그 날의 기억을 떠오른 지안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법정에서 밝힌것과 반대로, 도훈의 사체를 암매장하자고 적극적으로 주장한 쪽은 오히려 그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간남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남편을 묻어 버리고 둘이서 새 살림을 차릴 생각이었다.
저수지에서 부푼 시체가 떠오르기 전까지 말이다.
"너 진짜 가서 검사 받을 거야?"
"···으, 응? 응. 기다리기 지루하니까."
"그래. 같이 가자. 아까 말한 그 의사 얼굴이나 볼 겸."
"아, 그렇구나. 지정 병원이 대물비뇨기과면···."
"그래. 가서 마음에 들면 세라 너가 가지던가. 난 어차피 당분간은 희재씨한테 집중할거라 시간도 없을 것 같으니."
"고, 고마워 지안아."
"뭘 또 우리 사이에."
지안은 언제 정색했냐는 듯이 다시 표정을 풀었다.
가끔 쓸데없는 소릴 하긴 했지만, 세라는 자신의 유일한 절친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재판을 앞둔 상태에서,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었다.
남편 살해의 진실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대화를 하다보면 세라는 조금이나마 자신을 의심하는 눈치였으니까.
피부과 진료를 마친 지안과 세라는 곧바로 대물 비뇨기과로 병원을 옮겼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차를 타고 다시 주차하는 것보다 걸어가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도보로 이동한 두 사람은 5층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는 비뇨기과의 크기에 놀랐다.
"우아, 이 병원은 뭐가 이렇게 커? 보통 비뇨기과면 한층 정도 쓰지 않나?"
"국내 최대 수술 전문 병원이잖아. 좆 작은 새끼들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지."
"헐, 그럼 아까 봤던 그 대학생도···."
"대학생? 누구 말하는 거야?"
"왜, 아까 병원 앞에서 담배 피우면서 폰 보고 있던 훈남 말이야. 분명 이 병원에서 나온 것 같았거든."
"아, 니가 아까 소개팅할 의사 아니냐고 착각했던?"
당시 지안은 직접 운전중이었기 때문에 도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힐끔 보아도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라는 사실정도만 인상에 남아있었다.
"응. 근데 이 병원에서 나온 걸 보면 의외로 그게 작아서 수술상담이라도 받은 게 아닐까 싶어서."
"에이, 설마."
"왜? 남자 거기는 키랑 상관 없잖아. 난 키 작아도 큰 사람 많이 만나봤는데?"
"작아도 큰 사람은 물론 있긴 하지. 하지만 확률적으로 키가 커야 거기도 크다는 거지."
"흐흐, 만약 작은 편이면 난 별로다. 난 못 생겨도 이해는 하는 데, 좆 작은 사람은 못 참겠더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지안이 동의하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2층 안내 데스크로 가니, 굉장한 미인이 앉아있었다.
다소 피곤한 표정이었는데, 상사에게 영혼이라도 털린 것처럼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그녀는 바로 도훈에게 호되게 참교육을 당한 레이싱 모델을 닮은 은정이었다.
"저···. 검진 받으러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