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ex wife-76-
세라가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젊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청년은 손에 폰을 쥔 채 스마트 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먼 거리에서도 눈에 확 띄는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혹시 저 사람 아니야? 그 젊은 의사라는 사람?"
"···뭐?"
지안도 자신이 소개팅 할 뻔 했던 의사라는 말에 눈을 휘둥그레뜨고 청년을 응시했다.
"저기 대물 비뇨기과 앞이잖아. 저 사람 방금 저 병원에서 나온 것 같은데?"
지안도 청년을 힐끔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무슨 의사가 저렇게 젊니? 아무리 그래도 서른은 넘었다고 했는데. 쟤는 기껏해야 대학생 정도로 밖에 안 보이잖아?"
"그런가? 그래도 어린 애가 좋긴 좋다 얘. 멀리서 보는데도 잘생긴 걸 감출 수가 없네. 왠지 잦이도 클 듯."
"풉-. 우리 세라가 오늘따라 밑이 아주 근질근질 한가 보네?"
"맞아, 어제 영 시원찮게 끝내서 말이야. 마지막에 한 번 더 하자고 했는데, 갑자기 바쁜 척 핑계대고 후다닥 헤어지는 거 있지?
하여간 사내 새끼들도 늙으니까 정력 후달려서 영 못 쓰겠어. 근데 저런 애라면 내가 용돈이라도 주면서 데리고 살고 싶다. 호빠에 가면 저런 애들 많겠지?"
"호빠 같은 소리! 나 재판 끝나기 전까진 자중해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자중한다는 년이 난교 클럽에는 가네? 흐흐."
"거긴 비밀 모임이라 증거가 안 남잖아. 괜히 유흥업소 갔다가 혹시라도 CCTV에 찍혀서 재판장에서 증거로 제출된다고 생각해 봐. 으으, 그건 절대 안 돼."
"알았어, 이년아. 몸 사리기는. 여기서좌회전해. 거의 다 왔어."
피부과를 예약한 세라와 지안은 길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청년을 그렇게 지나쳤다.
차가 좌회전 신호를 받고 돌아가는 중, 그제야 도훈의 시선이 차량 쪽으로 향했다. 차도에 여러 차량이 뒤섞인 가운데 도훈의 시선이 묘하게 한 차량에 집중되었다.
'어? 저건···.'
도훈은 보조석에 앉아있던 여자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분명 본 사람 같은데, 너무 오래전이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야. 방금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네? 어디서요?]
'방금 좌회전하던 차량에 탄 사람.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
어엇, 생각났다. 혹시. 세라인가?'
[세라요? 주인님의 데이터베이스에 세라라는 이름의 여성은 없는데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당연하지. 이번 생은 아니고 전생에서 마주쳤으니까.' 최윤하는 절친이었던 세라를,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한 증인으로 적극 활용했다.
당연히 절친이다보니 결혼식 피로연에서도 도훈과 얼굴을 보면 인사를 나누었고, 결혼 후에도 가끔 마주치는 경우가 있었다.
윤하는 이룹러 세라와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면서 알리 바이를 착실하게 쌓았던 것.
순간 깜짝 놀란 도훈은 자신이 우연히 닮은 사람을 봤거니 생각했다.
세라가 나름 예쁘게 생기긴 했지만, 강남 미인도를 본 떠 고친 사람처럼 성형을 과도하게 하는 바람에 닮은 꼴이 은근히 많았던 것이다.
[근데 이 거리에서 보조석에 탄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 알아 봤다고요? 거의 40m는 떨어져 있는데요?]
'내 시력 몰라서 물어? 거리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야. 근데 얼핏 옆 모습만 봐서 내가 착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다만 차가 좀···.'
[차는 왜요? 보조석에 타고 있었다면서요? 남의 차에 얻어 탄 상황 아닌가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도훈은 세라를 닮은 여자가 타고 있던 차가 하필 전 마누라가 끌던 차와 동일한 모델이라는 걸 밝힐 수 없었다.
요즘 시대에 외제차가 드문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해 빠진 차량인 것이다.
우연이 겹쳐 오해를 했을 확률이 높지, 설마하니 전 마누라가 자신의 절친인 세라와 함께 차를 타고 나왔다는 무리한 억측을 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그 말을 꺼냈다가 되려 로시에게 한 소리 들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냥 입 다무는 편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비슷한 사람이었나봐.'
[흐음, 주인님 답지 않게 애매하게 말씀하시는 군요.]
'내가 뭘?'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전생의 인연은 절대 가까이 해선 안 됩니다. 전생의 기억을 남겨줄 때 약속한 거의 유일한 조건이니까요.]
'아니, 방금은 내가 일부러 찾은 것도 아니잖아. 길가다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는 거니까.'
[그건 당연히 문제가 안됩니다만, 괜히 붙잡고 말을 걸거나 혹은 전생의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신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는 신벌은 진짜 신께서 내리는 게 아니라며?'
[어떤 신이든 주인님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신께서 처벌을 내릴 겁니다. 굳이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마십시오.]
'위험이라고? 신벌이 위험하기까지 한가? 그냥 고자 일주일 되는 정도 아니었어?'
[전생의 기억과 관련된 부분은 무척이나 예민한 사항입니다.
주인님 뿐만 아니라, 어떤 환생자라도 과거를 발설해선 안된다는 규칙에서 예외일 순 없습니다. 인간들에게 혹여 사후 세계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면···.]
'어차피 사후 세계를 믿는 사람들이 몇십 억명은 되잖아? 대부 분의 종교가 사후 세계를 가정해서 설교하니까.'
[이는 단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증거의 문제죠. 환생자의 존재는 사후 세계가 실존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니까요. 이 사실이 알려지만 세상에 일대 혼란이 찾아올 겁니다. 마치 외계인의 존재가 입증된 것처럼요.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뭐···. 굳이 감당까지.'
[그러니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절대 벌이지 마십시오. 다른 건 몰라도 괜히 전생의 인연과 얽혀 신벌을 받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 기억 소멸까지 염두해 두셔야 할 겁니다.]
'기억 소멸이라고?'
도훈은 소름이 쫙 돋았다.
전생의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지금의 도훈에겐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도훈으로서 살아온 삶에 비하면 이정우로서의 정체성이 그의 삶의 9할이 넘었으니까.
[네. 전생의 기억을 모두 날려버리는 겁니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면, 두 번 다시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테니까요.]
'···그건 너무 끔찍하군. 이정우의 기억을 잃어버린 내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이건 죽이는 거나 다름 없잖아?'
[그러니 제발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주인님이 그런 끔찍한 형벌을 받기를 원하지 않으니까요.]
'아니, 내가 대체 뭘 했다고?' 도훈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솔직히 방금 본 사람이 세라가 맞는지도 확실치 않을 뿐더러, 설사 맞다고 하더라도 전생의 인연이라기에도 애매한 스쳐간 사람일 뿐이었다.
전 마누라와 친구라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평생 따로 만날 이유도 없는 사람이었다.
[주인님이 혹시라도 허튼 생각을 하실지도 몰라 미리 경고 드리는 겁니다.]
'허튼 생각이라니?'
[주인님이 환생 하신지 정확히 얼마나 지났죠?]
'1학기 개강 한 달전 이도훈의 몸속으로 들어왔으니···. 대충 10개월 다 되어가나? 1년은 안 됐고. 근데 그건 왜 물어?'
[플레이어가 되고나서 가장 위험한 시기가 최초 한 달, 그리고 1년이 가까워지는 시점부터거든요.]
'왜 그렇지?'
[처음 한 달은 능력을 사용하는데 조심성이 부족한 나머지 PK 단의 추적에 쉽게 노출됩니다. 가령 요즘 같은 시기엔 너튜브같은 개인 방송 매체가 발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대중들 앞에 능력을 보이는 버리는 바람에 사달이 나곤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상이 조작이라고 무시하고 넘어가겠지만, PK단 소속의 감시원들은 그런 이들을 절대 놓치는 법이 없으니까요.]
'흐음. 그렇군. 그럼 1년 즈음에는?'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시기죠.]
'자신감이 지나쳐서?'
[플레이어는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인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런 플레이어가 스스로의 능력에 도취되어 가장 안일해지는 시기가 1년에서 3년차 거든요.]
'듣고보니 무슨 운전 면허 같네.'
[운전면허요?]
'왜, 운전면허 따서 차 사고 나면 가장 위험한 시기가 초보시절 일랑, 자신감이 붙은 2~3년차 라고들 하잖아. 플레이어도 이와 비슷한가 보네.'
[네. 마침 주인님이 딱 그럴 시기거든요.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해 선을 넘기는 순간 무척 곤란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알았어. 알아 들었으니까 잔소리 그만해. 늘 경계하고 있으니까.'
[잔소리 같겠지만···.]
'제발 그만! 나 이제 집에 돌아갈래.' 도훈은 듣기 싫다는 듯 두 손으로 귀를 틀어 막았다.
로시와의 대화는 청각기관을 거치지 않고 뇌로 바로 전달되는 음성이었지만, 그만큼 대화를 중단하고 싶다는 의사를 온 몸으로 전달한 것이었다.
로시가 말을 멈추자 도훈이 혼자 생각했다.
<아까 본 차량 번호라도 확인하면 확실해 지겠는데, 역시 쓸데없는 짓이겠지?>
아까는 경황 중이라 차량 번호를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만약 자신이 본 차가 전마누라의 차가 맞다면 번호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다만, 로시의 경고도 있으니만큼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에이, 됐다. 내가 잘 못 봤겠지. 전 마누라가 여기까지 올 일이 뭐가 있다고?>
도훈은 찝찝함을 남긴 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그럼 정말 소개팅은 안 하시는 거예요?"
피부과 시술을 마치고 잠시 차를 마시며 담당의와 담소를 나누던 지안이 대답했다.
"아···. 요새 조금 개인적으로 바쁜 일도 있고 해서··· 누굴 만날 여유가 안되서요."
"아쉽네요. 정말 괜찮은 친군데."
"그래요?"
"네. 전문의를 그렇게 빠르게 딴 애도 없거든요. 군 면제를 받는 바람에 3년이나 시간을 줄였으니까요."
"근데, 면제를 받을 정도면 혹시 몸에 무슨 문제가···."
"에이, 아니에요. 부동시라고 아시죠? 그냥 양안의 시력 차이가 심한 증상인데 일상 생활에는 크게 지장 없어요."
"그런 걸로 군면제가 돼요?"
"음, 병역법 강화되기 전에 신검을 받았을 거예요. 요즘 은 기준이 강화되서 면제까지 안되고 공익 판정 나왔을 테지만, 뭐 어쨌든 그것도 다 자기 복이죠."
"아하. 근데 왜 아직까지 만나는 사람이 없데요? 미혼에 나이도 어린 총각 선생님이면 인기도 많을 것 같은데."
"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여자보는 눈이 높은 것 같기도 하고.
암튼 가끔 만날 때마다 저보고 친구 좀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거든요. 저는 최지안 환자분하고 딱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나이도 더 많잖아요."
"에이, 요새 연상 연하 커플이 대세라잖아요. 지안님이 3살 연상일텐데, 그 정도면 얼마 차이는 나는 것도 아니에요."
"근데 그 의사 선생님이랑 많이 친하신가 봐요."
"네?"
"아니, 가끔 만나신다는 거 보면···."
지안은 담당의가 어쩌면 자신에게 설거지를 시키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예전에 만나던 남자친구가 하도 성가시게구니 자신에게 떠넘기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러자 담당의가 곧바로 부정했다.
"아, 아니에요. 의대 졸업할 때 안면만 있던 사이였어요. 졸업하고 인턴 근무를 같은 대학병원하면서 조금 친해지긴 했는데 ···. 그때도 딱히."
"그래요? 그럼 어떻게."
"근데 얘가 글쎄 최근에 저기 사거리 건너편에 비뇨기과로 병원을 옮긴 거에요. 커피 사러 갔다가 우연히 만났잖아요."
"아하. 오는 길에 몇번 본 것 같아요. 대··· 무슨 비뇨기과 말이죠?"
"네, 푸흡. 대물 비뇨기과요."
"근데 대물이 뭐예요?"
지안은 뻔히 알면서도 괜히 순진한 척 물었다.
표정이 너무 순수하고 연기력이 뛰어난 편이었기에, 담당의는 지안이 정말로 몰라서 묻는 줄 알고 굳이 설명했다.
"음, 그러니까···. 실은 그 병원이 전국적으로도 엄청 유명한 확대수술 전문 병원이거든요, 그래서 대물이라고···."
"확대 수술요? 무슨 확대요?"
"음음, 여자들이 가슴 수술하는 것처럼 남자들도 성기 확대 수술을···."
"어머나!"
지안이 가증스럽게 입을 틀어 막으며 화들짝 놀란 척을 했다.
화장실을 다녀온 세라가 그 모습을 우연히 보고는 속으로 기가찬듯 썩을 표정을 지었다.
'또 시작했네 저 미친년. 순진한 척 사람 홀리기.'
지안은 예쁘기도 했지만, 이미지가 무척 단아하고 청순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런 전략이 잘 먹히는 편이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쑥맥처럼 연기하는 편이었는데, 나름 연기력도 출중한 편이라 모르는 사람들은 깜빡속아 넘어갔다.
"아, 암튼. 그 뒤로 몇번 우연히 만났는데, 자꾸 소개팅 시켜달라고 조르더라고요. 귀찮게서리."
"혹시 의사선생님한테 관심있는 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