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 ex wife-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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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은 간만에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동탄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축 처져있던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하여간 지긋지긋한 촌동네 같으니···.'
서울 부촌의 사모님에서 순식간에 경기도 신도시민으로 전락한 지안은, 삭막한 신도시의 풍경을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푸념을 내뱉었다.
이는 마치 자신이 와서는 안될 곳에 유배를 당해 있지만, 언젠가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의식의 발로같았다.
'하여간, 촌스럽단 말이야? 아파트만 더럽게 많이도 처 지어서는. 그래놓고 부동산 가격 올리려고 부녀회에서 담합하는 꼬라지하고는.'
지안 자신도 동탄시민인 주제에, 마치 유체이탈을 해서 같은 지역 주민을 깔보는 태도였다.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데, 세라에게서 전화가 왔다. 청담동에서 샵을 운영하는 그녀는, 일주일에 반 이상은 부하 직원에게 가게를 맡기고 외출하는 편이었다.
-오고 있지?
"그래. 곧 고속도로 올릴 거야."
-넌 진짜 이사를 가도 그런 시골 촌 구석으로 가서는···. 쯧쯧.
서울 한 번 나오려면 이렇게 날까지 잡아야 하다니.
"지금 누구 염장 지르니? 내가 여길 오고 싶어서 왔냐고. 정우씨 시댁이 근처에 있으니까···."
-정우씨? 그래도 아직 호칭은 불러주네? 죽은 전남편한테 아무런 애정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애정같은 소리 하네. 그럼 이름 두고 뭐라고 부르니?"
-정윤 아빠 있잖아. 너네 예쁜 딸.
"뭐래? 정윤이가 왜 그 사람 딸인데?"
-···뭐?
흥분한 나머지 말실수를 한 지안이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정윤이는 내딸이라고. 이번 소송만 이기면 내가 양육권도 가져올 거고. 시댁에서 억지로 데려가서 얼굴 못봐 짜증나 죽겠는데."
-깜짝이야. 난 또 애 아빠가 다른 사람이라는 줄?
"뭐래? 이정우의 <정>, 최윤하에서 <윤>자를 따다가 만든 이름이잖아."
-그러니까.
최윤하에서 최지안으로 개명신청을 한 지안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나도 모르게 말실수를 할 뻔했네. 나도 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데, 괜히 이런 내용을 남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겠지. 설사 절친인 세라한테도 말이야.'
이름은 전 남편인 정우에게서 따오긴 했지만, 지안은 자신의 딸이 정우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출산 시기도 미묘하게 맞지 않았고, 무엇보다 생김새 자체가 전혀 달랐다. 딸아이가 성장할수록 자신을 닮아가는 것도 있지만, 전 남편과 닮은 구석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하긴, 그 인간 닮아 봐야 좋을 게 뭐 있어? 키가 160도 안되는 사람 유전자 물려봐야, 괜히 나중에 키 작게 낳았다고 원망이나 듣지.'
지안은 이정우를 한번도 남편으로 인정한 적 없었다.
결혼도 조건을 보고 등 떠밀려 한 것이었고, 무엇보다 남편의 아이도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아서 키웠기 때문에, 둘 사이에 무슨 애틋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외식이라도 하는 날에는, 힐을 안 신어도 자신보다 시선이 아래 있는 남편을 보며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는지 모른다.
아니, 단순히 키만 작았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키는 조금 작아도 머리는 끝내주게 좋았고, 직장도 탄탄했으니까.
제법 돈 굴리는 재주도 있어서 물려받은 재산과 그간 모은 연봉을 이용해 부동산 투자로도 짭짤하게 재미를 봤다.
아마도 동년배 중에선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야, 죽은 사람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꿈에 나올까봐 소름돋으니까. 좆도 좆나 작은 새끼."
-꺄하하하하하! 너도 진짜 너무한다. 죽은 것도 서러운데 아주 부관참시를 하네. 좆 작은게 정우씨 잘못은 아니잖아? 태어나보니 그런 걸 어째?
"하지 말라고! 괜히 일진 사나우니까."
-알았어, 알았어. 계집애 성질머리하고는. 하여간 서울 들어오면 연락해. 샵에서 나갈 준비 해야 하니까.
"아직 샵에 있어?"
-당연하지. 나는 뭐 맨날 땅파먹고 장사하는 줄 아니? 밑에 직원들이 영 시원찮아서 가끔 내가 이렇게 봐줘야 해. 진짜 짜증나.
단골들만 아니면 당장 때려치우는 건데.
"그 일 그만두면 뭐하려고?"
-꼭 뭘 해야 하니? 우리 남편 요새 수입 짭짤해. 굳이 내가 일안해도 우리집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데?
"아니, 너 돈 때문에 일하는 거 아니잖아. 낮 시간에 애인들 편하게 만나려고 샵 하는 거 아니었어?"-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남편 사업이 바빠져서 가정 주부만 해도 될 것 같아. 솔직히 요새 바람피우는 여자들 직업 중에 주부가 제일 많을 걸? 남편 출근하면 바로 애인 만나러 간다잖아. 애들 학교 보내놓고.
"별 미친···. 암튼 알았어. 서울가서 연락할게."-그래. 오면 그 얘기 꼭 들려줘.
"무슨 얘기?"
-아니, 로얄 클럽인가 뭔가의 회장이라는 사람 말이야. 면접에서 한 판 했다며?
"미친. 뭘 그런 걸 궁금해 하니?"
-난 궁금하던데? 남이 섹스했던 얘기. 들을 때마다 새로워. 짜릿해.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끊어, 이 미친년아."
지안이 전화를 끊고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하지만 세라가 마지막에 꺼낸 얘기 때문에 갑자기 김희재와 보냈던 하룻밤이 떠올랐다.
'계집애. 괜한 얘길 꺼내가지고···.'
간만에 ?이에 기름칠을 한 지안은 그 날밤을 잊지 못했다. 오랜만의 섹스기도 했지만, 의외로 김희재가 상당히 섹스를 잘했던 것이다.
남자 경험이 많은 지안조차도 단숨에 매료시켰던 것은 유난히 굵었던 그의 양물이었다.
마치 몽둥이를 달아놓은 것처럼 두터운 대물이 자신의 밑구멍으로 들어 오던 순간을 떠올리자, 지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거렸다.
'어휴, 안 하다 갑자기 해서 그런지 괜히 허파에 바람만 들었네.
이래서 담배 끊었던 사람이 다시 피우면 다신 못 끊는다고 했었지.'
지안은 벌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전자 담배를 꺼냈다. 그녀는 차안에서도 흡연을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었다.
전자담배를 물고 한손으로 운전을 하던 지안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김희재를 계속 떠올렸다.
나이에 비하면 나름 잘생긴 얼굴.
정장이 잘 어울리는 댄디한 스타일.
그리고 무엇보다, 하룻밤에 수백만원이 넘게 드는 술집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나드는 재력까지.
김희재는 자신이 바람을 피우면 만난 어떤 사내보다 완벽에 가까운 남자였다. 지안의 입장에서는, 간만에 진심으로 노려볼만한 먹잇감.
'그래. 유부녀였어도 들이댔을텐데, 이제 나도 법적으로 돌싱이나 다름 없잖아. 어떻게 보면 이혼한 유부녀보다 더 낫지. 최소한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 바람에 미망인이 되었다는 동정심을 살 수도 있을테니.'지안이 간만에 서울 나들이를 자청한 것은, 친구인 세라와 만나기 위함도 있지만, 그녀와 함께 피부과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내일 첫 모임인데 절대 다른 여자들에게 꿀리고 싶지 않아.'그녀와 세라는 정기적으로 피부과에서 관리를 받는 편이었는 데, 그녀가 나이에 비해 동안처럼 보이는 주된 이유기도 했다.
'그나저나 아쉽게 됐네. 피부과 의사가 자기 아는 후배 한 명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데. 무슨 비뇨기과 의사라던가?'
피부과 단골인 지안은 담당 여의사와 친분을 많이 쌓았다. 늘 피부과에 갈 적에는 처녀 행세를 했던 탓에 이따금 중매 제의가 들어오곤 했는데, 한달 전 다른 의사와의 소개팅이 언급되었던 것이다.
'피부과 옆에 있는 병원 의사랬는데, 뭐랬더라? 이름이 엄청 특이했는데···.'
지안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다 불현듯 단어가 떠오른 듯 혼자서 소리쳤다.
"대물! 맞다. 대물 비뇨기과 의사였지?"
혼자서 말하고도 빵터진 지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대물 비뇨기과면 그 의사도 대물이려나? 근데 중이 제머리는 못 는다고 하니 또 모르지.'연하인 의사를 한 번 만나볼까 고민하던 지안이었지만, 이제는 모두 부질없게 되었다.
로얄클럽장인 김희재는 모든 면에서 그 의사보다 상위 호환이었다.
'솔직히 의사면 뭐해? 그래봐야 돈 좀 벌어오는 월급쟁일 뿐.
진짜 부자는 병원에 고용된 페이닥터가 아니라, 그 병원을 가지고 있는 병원장이지.'지안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운전을 하고 가는데, 문득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응? 누구지?"
아직 끝나지 않은 재판으로 가끔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지안은 긴장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혹시나 전화를 피했다간 괜한 의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여보세요."
-최지안씨 되시죠?
"네, 말씀하세요. 누구세요?"
전화를 건 사람은 여자였다.
여형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안이 바짝 통화에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희재 회장님 밑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로얄 클럽 회원들을 관리하는 매니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안녕하세요! 근데 무슨 일로···."
-내일 정기 모임인 건 들으셨죠? 모인 장소 공지를 하려고 연락드렸어요.
"모임 장소요?"
-네. 신규 회원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정기 모임의 장소 공지는 보안을 이유로 모임 전날 공개 됩니다. 문자로 주소 남겨드렸으니 늦지 않게 찾아오시면 됩니다.
"아···. 네."
-그리고 한 가지 더.
"더 있나요?"
-저희 모임에선 정기 모임 전 성병종합검사 결과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새는 핸드폰 어플로도 인증할 수 있으니, 지정한 병원에 가셔서 검사를 받으시면 됩니다.
"자, 잠시만요. 오늘 당장요?"
-네. 원래 다른 회원분들은 미리미리 준비해 오시는데, 최지안회원님은 신규라서 모르셨을 것 같군요.
"아··· 갑자기 그 말씀을 하시면···."
지안은 갑작스러운 성병 검사 요청에 당황했다.
검사를 받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피곤했지만, 괜히 이상한 결과가 나오면 모임에 결격사유로 잡힐 수도 있는 문제였다.
-상관없습니다. 저희 지정 병원은 당일에 바로 결과가 제공되거든요. 혹시 바쁘시면 저녁 아무때나 가도 괜찮습니다.
"아···. 지정 병원이 어딘데요? 저는 지금 서울이 아니라···."
-동탄에 사시죠? 그리 멀지는 않습니다. 지방에 사는 분들도 다녀가시는데요 뭘.
"흠···."
-병원 주소도 지금 문자로 남겨두었습니다. 검사가 끝나면 어플에 자동 등록을 해드리니, 별도로 서류를 제출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미리 검진 예약을 해놓을 테니, 병원 가셔서 이름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그럼 궁금한게 있으면 언제든 이 번호로 연락주세요.
통화가 끝나자 지안이 버럭 짜증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진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 전날 이걸 알려주면 어쩌라는 거야?"
피부과 방문 예약도 해놨는데 괜히 일정이 어긋날 걸 우려한 지 안이 씩씩거리며 문자를 확인했다.
"얼씨구? 모임 장소는 심지어 강원도네? 참나···."
장문의 문자를 꼼꼼히 읽어내려가던 지안, 숙박과 식비가 공짜이며 교통편의 경우 실비로 추후 지원된다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호텔 하나를 통째로 빌리는데 싹 다 공짜라고? 참가비도 없이? 헐···. 대체 회장님 재력이 얼마라는 소리지?"
짜증이 솟구쳤던 지안은 김희재의 재력에 놀라며, 다시 한번 모임에 참가해서 그를 꼬셔야 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모인 전날 장소공지를 하는 것도, 성병 검사를 미리 받는 것도 신규 회원인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니까. 나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닐테고."
지안은 이어서 검사를 받아야하는 지정병원의 위치도 확인했다. 문자에는 익숙한 이름과 함께 주소가 기재되어 있었다.
"···대물 비뇨기과? 어, 여기는."
단골 피부과 의사가 소개팅을 시켜주기로했던, 의사가 근무하는 그 병원이었다. 혹시나 같은 이름일지 몰라서 주소를 확인하니 우연히 딱 맞았다.
"와, 이런 행운이. 피부과 근처였잖아?"
동선이 꼬일까 걱정했던 지안은 그제야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약했던 대로 피부과를 들렸다가 넘어가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다소 표정이 밝아진 지안은 병원명을 떠올리며 다시 히죽거렸다.
"대물 비뇨기과라니 푸흡. 어이가 없네. 그런 병원이 진짜로 효과가 있었으면 내가 남편을 죽였겠냐고."자기도 모르게 살인 고백을 해버린 지안은 문득 룸미러앞에 장착된 블랙박스를 확인하고 표정을 굳혔다.
그러다 일전에 메모리를 빼두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휴, 괜히 쫄았네. 근데 비뇨기과에서 여자들도 원래 보는 거였나?"
지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 차를 몰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