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 ex wife-71-
"···예,예?"
"하여간 관상은 못 속인다니까? 그 와꾸에 대가리까지 딸리니 오죽 했겠어? 너 어렸을 때 일진놀이하면서 몸뚱이 함부로 굴렸지? 남자들이 환장하고 달려드니까 좋다고 대주면서."
"···흐,흑."
"그러다 어영부영 나이 먹고 정신차려보니, 배운 건 없고 내세울 거라곤 와꾸 뿐이니 이런 병원 코디라도 들어왔겠지. 어차피 대가리가 빠가라서 간호사는 커녕 간호조무사 자격증도 못 딸테니까."
"······."
"근데 양아치 본성이 어디가나? 카드빚 무서운 줄 모르고 흥청망청 돈 쓰다 빚만 잔뜩 쌓였는데, 대신 갚아줄 호구 못 물어서 난처하던 차에 우연히 나랑 임선생이랑 떡치는 소릴 듣게 된 거야."
"허, 헉!"
점쟁이처럼 정확히 읊어대는 도훈의 추리에 은정은 소름돋는 표정으로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아마 넌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야. 이 비밀을 이용해서 돈 많은 의사부부인 임선생을 어떻게 한 번 벗겨 먹을 수 있을까 하고.
잘하면 지긋지긋한 빚을 털어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내 말 맞지?"
"어, 어떻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가?'
[마음의 소리도 쓰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사이코메트리 스킬을 쓰신 것도 아니고요. 정말 제가 모르는 사이에 관심법이라도 익히 신 겁니까?]
'푸하하. 관심법은 무슨 관심법이야? 딱 보면 척이지. 내가 그래서 말했잖아. 레이싱 모델처럼 와꾸만 반반한 애들은 프로페셔널한 모델에 비할바가 아니라고.'
[그럼 정말로 그냥 찍어서 맞추신 거라고요?]
'견적 딱 나오잖아.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기 직장 상사가 떡을 쳤다고 해도 놀라서 입 꾹 다물거나, 주변 친한 사람들한테 소문내고 말았겠지.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니고, 무슨 중차대한 비리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그렇겠죠.]
'근데 그걸 보자마자 어떻게든 협박해서 돈 뜯어낼 궁리를 하더란 말이지. 이건 어린시절부터 양아치들하고 어울리다 익힌 크리 미널 마인드거든. 남의 약점을 잡으면 그걸 빌미로 삥뜯는게 걔네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니까.'
[아···. 근데 그것만으로는 조금 억측 아닙니까?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사실도 있었는데요.]
'우선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형편없었어.'
[금액요?]
'임희경을 협박하면서 부른 금액이 고작 1억? 의사 연봉이 얼마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거지 게다가 부부의사잖아. 하긴 자기야 카운터에 앉아 얼굴 마담이나 하는 단순 서비스직이라 월급도 적을테니, 제 딴에는 1억도 엄청 세게 부른 거겠지만.'
[호오.]
'더 결정적인건, 은정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고 하면 직장을 계속 다녀야한다는 이유를 나를 통해 우회 협박을 하는 점이었지.'
[그게 왜 또 결정적이죠?]
'보통 이런 걸로 한탕 해치우고나면 직장은 때려치우는 게 맞는 거잖아.'
[그야 그렇죠?]
'근데 계속 여기 붙어있으려는 이유로 임희경에게 직접 말을 못한 거잖아. 그때 깨달았지. 아, 대가리 존나 빠가인 년이구나. 아니면, 여기에 붙어있어야할 말 못할 사정이 있거나. 뭐가 됐건 머리는 거의 장식품이라는 증거지.'
[대단하십니다. 이 모든걸 잠깐의 대화로 꿰뚫어 보시다니.]
'근데 이 년 하는 꼬라지를 보니, 왜 여길 못 그만두는지도 대충 알 것 같아.'
[그게 뭔데요?]
'노리는 남자가 있는 것 같아.'
[남자요? 이 병원에요?]
'어. 은정이 같은 양아치년들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최종 플랜이 뭘 것 같아?'
[흐음···. 병원 자금 횡령?]
'그건 무리야. 병원장이 아무리 사람보는 눈이 없어도, 저런 빡대가리한테 병원 회계를 맡길리가 없잖아. 무슨 좆소기업 경리자 리도 아니고.'
[그럼요?]
'은정이가 노렸던 보테크의 최종 목표는 분명 취집일거야.'
[취집요? 근데 보테크는 또 뭔가요?]
'?이로 재테크한다는 뜻이지.'
[아.]
'암튼, 여긴 한 과목만 진료하는 병원치고는 상당히 큰 규모란 말이야. 그 말은 근무하는 의사가 임희경 말고도 엄청 많다는 뜻이지.'
[주인님 말씀은, 그러니까 조은정이 이곳에 근무하는 남자 의사 중에서 작업중인 상대가 있어 일을 그만두지 못할 거라는 추정이죠?]
'응. 백퍼. 확신해.'
"죄, 죄송해요! 정말 제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어떻게 됐나봐요!"
도훈의 밑에 깔린 은정은 갑자기 읍소 전략으로 나갔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죄송하다고 질질 짜는 것이었다.
도훈은 너무나 속이 보이는 은정의 행동에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하여간 양아치년 같으니. 수틀리니 바로 악어의 눈물 작전을 시전하는 구나. 사람 죽여놓고도 사과하면 끝인 줄 알지.'
"아가리 싸물어, 썅년아. 나를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오늘 처음보는 주제에 협박할 생각을 해? 대가리 텅빈 거 인증하는 거야 뭐야?"
"흐, 흑··· 실은 제가 빚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서···."
"네가 진 빚, 네가 죽어라 일해서 갚아야지, 남한테 협박해서 돈을 뜯어낼 생각을 했다고? 그게 바로 양아치 근성이라는 거야.
이 양아치년아."
"정말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
"아니, 사과하지마."
"예, 예?"
"사과하지 말라고. 난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그, 그럼."
"잘못을 했으면 말로 대충 떼울 생각말고 몸으로 때워."
"모, 몸으로요?"
도훈이 갑자기 깔고 누운 은정의 젖가슴을 손으로 콱 움켜쥐었다.
"하, 하악!"
"머리는 비어 보여도 몸뚱이는 나름 쓸만해 보이니까."
"아, 아아! 하, 하지 마세요!"
은정은 난데없이 추행을 당하게되자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했다. 협박을 하러 왔다가, 역으로 협박을 당하는 처지가 되자 모든 계획이 엉클어진 느낌이었다.
"결정해. 몸으로라도 때울래, 아니면 이대로 나랑 같이 경찰서 갈래?"
"겨, 경찰서라뇨?"
경찰서라는 말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은정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몰랐어? 네가 나한테 한 짓은 형법에서 범죄로 인정한 협박이라는 거야. 남의 약점을 잡아 금품갈취를 하려고 했잖아."
"허, 헉!"
"게다가 네 스스로 폰에 증거까지 깔끔하게 남겨놨네?"
"흐, 흐읏 녹취한 건 지금 지울게요!"
"어딜? 지우면 안 되지.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인멸하려고?"
"아, 아니···."
"그러니까 어서 선택하라고. 협박죄로 고소당해서 전과자 될 거야, 아니면 없던 일로 순순히 덮어줄테니 몸으로 때울거야? 난 강요하는 거 아니야. 너한테 선택권을 주는 거지."
도훈이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은정의 젖가슴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더니 포박도 풀고 일어났다.
'이러면 협박 아니지?'
[흐음, 좀 애매한데요? 은정이 협박하는 걸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역으로 협박을 했다고 봐야지 않을까요?]
'내가 안대주면 경찰에 신고할테니 대주라고 한 건 아니잖아?
정확하게 선택권을 준 거지.'
[그냥 말장난 아닙니까?]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
[네?]
'사실 신벌의 규정이 애매한 구석이 많거든. 어떤 경우엔 현행법에 명백히 저촉되는데도 넘어갈때도 있고, 또 어떨땐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유가 있는데도 신벌을 받을때도 있고.'
[흠, 그거야···.]
'솔직히 저번 축제 때 투명인간으로 변해서 샤워실에 난입한 사건만 해도 그렇잖아. 내가 변태처럼 몰래 우리과 여자애들 건드리긴 했지만, 어차피 내가 다 한 번 이상은 따먹은 애들이었다고. 나라는 걸 알았으면, 절대 성추행이라고 하지도 않았을 걸? 오히려 서로 대주려고 싸움이나 안났으면 모를까.'
[으음···. 주인님의 의문은 저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신벌이라는 규정이 현행법을 참조하긴 하지만, 완벽하게 대응하지는 않습니다. 법이란 그 시기에 따라 다르고, 또 같은 시기라도 나라마다 다른 부분이 있어서 일괄적으로 적용이 안되는 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엿장수, 아니 신님 마음대로라는 거 아니냐?'
[방금 신성 모독 하신 겁니까?]
'전혀.'
[주인님이 한가지 모르는 사실을 말씀드리면, 신벌을 내리는 기준을 신께서 직접 정하는 게 아닙니다.]
'엥? 뭐야? 그럼 왜 신벌이라고 한 거야?'
도훈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신이 직접 벌을 내려서 신벌이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예전에도 말했지만 신은 수없이 많이 존재하니까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시스템상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참나, 그럼 난 이제까지 그것도 모르고···.' 도훈은 그럼 신성모독에 대한 판단도 혹시 신이 결정한 게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뭔지는 몰라도 플레이어에 대한 통제 방식이 자신이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의심을 강하게 품었을 뿐이었다.
"저, 정말 저 경찰서 데려가시는 거 아니죠?"
"당연하지. 난 약속은 지킨다고. 하지만 너도 네 행동에 책임은져야지."
"···할게요."
"뭐?"
"몸으로 때울테니까 한 번만 봐주세요."
"분명 네가 자진해서 말한 거다?"
도훈은 은정이 스스로 결정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재차 물었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 뭘 그런 걸로 감옥에 가? 아직 앞날도 창창한 아가씨가."
도훈이 살기를 거두고 누그러진 태도로 말하자, 은정도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하소연을 시작했다.
"흐흑, 죄송해요. 진짜 빚을 너무 많이 져서···. 저도 모르게 ···."
"빚이 얼만데? 끽해야 몇천 아니야? 신용대출이 그렇게 많이 나올 것 같지도 않은데?"
도훈이 은정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개인 신용에 따라 결정되는 신용 대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장과 직위에 대한 평가였다.
의사라면 몇억도 나오지만, 일반적인 직장인이라면 1억도 어려운게 현실이었다. 간호사도 아닌 코디에 불과한 은정이라면 연봉에 근거해 아무리 대출을 받아도 1억을 못 넘을거라고 생각했다.
도훈의 물음에 은정이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어쩌다 카드 빚을 졌는데, 마통으로 돌려막다가 나중에는 사채를 조금 끌어 썼어요."
"사채?"
도훈이 기가 막히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아니, 겁도 없이 사채를 썼다고? 얼마나?"
"삼천···."
"삼천만원? 근데 왜 1억을 요구한 거야?"
"그게···. 이자가 계속 불더니 이제는 1억을 넘어가지고···."
[아니, 무슨 이자가 원금의 3배가 넘습니까? 법정이자가 그렇게 세다고요?]
'불법 대부 업체에 당했네.'
[불법 대부 업체요?]
'원래 법정 금리 한도는 법으로 정해져있어. 은정이 같은 여자들은 몸뚱이만 있어도 삼천까진 그냥 당길 수 있거든.'
[왜 그렇죠?]
'모르지, 암튼 여자들은 그 정도는 가능해. 근데, 살인적인 이 자를 붙인 걸 보니 불법 대부 업체를 통했나봐.'
[사기 당한 건가요?]
'사기는 무슨. 카드 빚 못 막고 신용불량 뜨니까 정상적인 업체에선 안 받아준거지. 그러니 불법 업체를 찾아간 걸 테고.'
[아니, 그렇다고 무슨 원금의 3배를···.]
'이것 참, 머리가 나쁘면 손 발이 고생한다는 게 딱이네.'
은정의 사정을 알게 되자 도훈은 갑자기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본인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잘못에 비해 지나치게 과도한 벌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은정이 협박까지 생각한 것이군요.]
'그렇겠지. 아무리 양아치년이라도 저렇게 바닥까지 떨어지긴 쉽지 않거든.'
[그럼 은정양이 돈을 못 갚으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계속 사채업자들이 쪼아대겠지. 근데, 무담보로 삼천을 당겨준 거 보면 뻔하지. 젊은 여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회수할 방법이 있어서 그렇게 해준 거니까.'
[대충 알것 같습니다.]
'좋아. 기분이다. 아무리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해도, 사실 상 협박해서 괜히 따먹는 것 같아 찝찝했는데 이건 내가 해결해 줘야 겠다.'
[1억을 주인님이 대신 갚아준다고요? 처음보는 여자의 빚을요?]
'미쳤냐? 내가 퐁퐁남 졸업한지가 언젠데? 내가 1000억이 있어도, 모르는 여자한테는 만원도 쓰기 싫어.'
[그럼요? 어떻게 해결해 주시겠다는 건지.]
'일단 빚은 은정이가 직접 갚게 할 거야. 열심히 월급 모으면 삼천 정도는 제 힘으로 갚을 수 있겠지. 대신 말도 안되는 이자는 불법이니까 그걸 처리해줘야지.'
"음, 그 대부업체 어디야?"
"예, 예?"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말해."
"아, 아니···. 그게···."
"얼른 말하라고. 내가 원금만 갚도록 해줄테니까."
"저, 정말이요?"
"대신 너도 약속해. 앞으론 그런 양아치 같은 짓 다신 안하겠다고."
"아, 안 할게요."
"가볍게 내뱉지 말고 제대로 맹세하라고. 다신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나쁜짓 안하겠다고. 그럼 내가 책임지고 네 사채 빚은 정리해 줄테니."
은정은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절절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다, 다시는 남을 협박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게요. 맹세해요."
"너 그 말 어기기만 해. 그땐 진짜로 봐주는 거 없어."
도훈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