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86화 (1,966/2,000)

1986. ex wife-61-

"회장님이 제 비밀 계정의 존재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진짜 꿈에도 몰랐는데···."

"음, 해커니까 당연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계정 주인도 제가 아닌데···. 혹시나 걸릴까 봐 다른 사람 명의를 도용했거든요."

"도용? 그거 범죄 아니야?"

"음···. 이미 사망한 사람 명의라."

"영상, 혹시 집에서 올렸어?"

"예, 예?"

"너희 집 IP 주소만 알아내면, 거기서 무슨 아이디로 접속해서 뭘 올리든 당연히 알아낼 수 있지. 얼굴 안 보이게 감춘다고 목소리나 몸매가 티가 안 나는 것도 아니고."

"허, 헉! 그건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모르는 척을···."

"됐어. 기왕 들킨 거 어쩔 거야? 보기보다 음흉한 스타일이네, 우리 회장님. 겉으로는 깔끔하게 가입시켜준 척하고 아직까지 나를 의심하는 것도 그렇고. 미선이 너 비밀 계정을 지금껏 모르는 척 한 것도."

"너무 충격적이에요. 앞으로 어떻게 회장님 얼굴을 보지?"

미선은 희재가 비밀 계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데 생각 이상으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마치 상대의 부끄러운 과거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시치미 뚝 떼고 면전에서는 전혀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과 비슷했다.

[확실히 음침한 사람이군요, 김희재는.]

'사실 이 부분은 미선이가 너무 나이브 했던 거야. 직장 상사가 국내 최고, 아니 세계적인 수준의 해커인데 퇴근후 몰래 인스타질하면서 전혀 안 들킬 거라고 생각했다는 게. 경호만 할 줄 알지 사이버 보안 개념은 엉망이네.'

[어쩌면 미선을 일부러 주인님에게 붙여준 걸지도 모르겠군요.]

'붙여주다니?'

[그렇지 않습니까? 고의로 미선양을 주인님에게 꽂았다고 봐야 맞는 거 같은데요?]

도훈도 듣고 보니 확실히 수상했다.

느닷없이 말도 안 되는 내기를 걸면서 미선에게 자신의 좆을 빨게 만든 것부터, 굳이 단둘이 집까지 바래다주라는 것까지.

심지어 이제는 일부러 집에 따라 들어가 보라며 전화까지 한 것이었다. 말이 따라 들어가라는 거지, 안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삼척동자도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일련의 행동을 쭉 연결시켜보니, 희재의 고의성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렇구나! 어쩌면 내가 미선이를 따먹은 게 아니고, 희재가 나한테 미선이를 대준 꼴이었군.'

[대체 무슨 의도일까요?]

'흐음, 설마 미선이를 이용해 나를 감시할 생각이었을까?'

[감시라뇨?]

'그렇겠네. 놈이 볼 때 미선이는 신뢰할만한 부하 중 하나고, 나는 외부에서 굴러들어온 정체불명의 신입 회원일 뿐이니까.'

[그럼 본인이 신뢰하는 부하마저 뒷조사했다고요? 더구나 지금까지 모르는 척하고?]

'놈이 얼마나 음침한 놈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지. 확실히 사람을 쉽게 믿는 놈이 아니야. 무조건 의심하고, 재차 확인하고, 심지어 그 뒤로도 끝까지 추적감시해. 노이로제 걸릴 것 같은 집요함이랄까?'

[하지만 이번엔 절대 김희재의 의도대로 되지 않겠군요.]

'맞아. 내가 벌써 미선이를 홀랑 따먹어서 내 편으로 만들었다는 건 미처 생각을 못한 것 같아.'

[주인님이야, 늘 예상보다 빠르게 여자를 자빠뜨리니까요. 이건 어쩌면 기회일수도 있습니다.]

'기회라니?'

[미선양을 이중 스파이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김희재는 미선양을 주인님에게 붙여 감시를 맡길 속셈이겠지만, 미선 양은 이미 주인님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말판 위의 말이 되었으니까요. 왜, 일전의 PK단의 구미호도 그렇게 활용하셨잖습니까?]

'그렇구나. 그럼 지금은 놈의 의도대로 놀아줘야 할 타이밍인가?'

생각을 정리한 도훈은 충격에 빠진 미선에게 말했다.

"음, 이제보니 배웅이 아니라 내가 초대를 해야할 상황이었네."

"예?"

"배고프지? 우리 집 온 김에 라면 먹고 갈래?"

"무, 무슨···."

미선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변태적인 일탈 행위를 김희재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데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정신 차려. 뭘 그렇게 얼이 빠졌어?"

"그, 그게···."

"설마 비밀 계정 들킨 것 가지고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직장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지···. 사람들이 다 알아버리면···."

"신경 쓰지 마."

"신경쓰지 말라고요? 회장님이 이미 다 알아버렸는데요?"

"너네 회장이 설마 오늘 알았을 것 같아?"

"···예?"

"이미 네가 비밀 계정을 돌리기 시작할 때부터 파악 끝났을 걸?"

"그, 그럼 2년이 넘도록···."

"당연하지. 이미 뻔히 다 알면서도 지금껏 말 안 했는데, 갑자기 소문을 낼 리가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

"차라리 다행으로 알아. 너네 회장이 변태라는 걸."

"벼, 변태라서 다행이라고요?"

"생각해봐. 회장이 네 비밀을 약점 잡아 한번이라도 협박한 적있어? 너한테 이상한 걸 요구하거나."

"아뇨. 아직 한 번도···."

"그렇다니까? 너네 회장이란 사람은 전혀 상관없던 거야. 어차피 퇴근 후에 개인적으로 벌이는 취미 활동 같은 거라고 봤겠지."

"어떻게 그게 취미 활동이···."

"평소엔 티 안 내고 일 열심히 했다면서? 김희재에겐 오히려 그게 더 중요했을 거야. 자기일 펑크만 안 내면 더 심한 짓을 하고 다녔어도 좆도 신경 안 썼을 걸."

"아···. 그래도 너무 무서워요. 어떻게 지금까지 모른 척 할 수 있었는지···. 그런 분인 줄은 몰랐는데···."

"난교 클럽을 운영하는 회장 입장에서 보면, 딱히 충격적인 내용은 아니었나 보지. 더 심한 여자들이 클럽 안에 줄줄이 사탕일텐데, 퇴근 후에 자위영상 좀 몰래 올린 정도 가지고 뭐."

"음···."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너네 회장님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거 같은데."

"회장님이 원하는 거요?"

"내가 볼 때 회장님은 네가 나한테 대주길 바라는 걸지도."

"전 그런 명령은···."

"맞아. 직접적으로 말한 적 없지. 하지만 굳이 집까지 따라 들어가라고 하는 걸 보면, 그런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는 거라고 봐야지. 미필적 고의라고나 할까?"

"대체 왜···."

"그야 뻔하지 않아? 널 나한테 내주는 대신, 나를 자기 손아귀에 쥐려는 계획이지."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일단 들어와 봐. 들어가서 설명해 줄게."

미선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도훈이 다시 강하게 말했다.

"얼른. 우리 집에 들어가라는 건 회장 명령이잖아? 아니야?"

"아, 아··· 네."

도훈은 미선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갔다.

김희재가 굳이 미선까지 활용해 자신을 옭아매려는 목적이 무엇이건, 일단은 그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처럼 철저하게 연기할 생각이었다.

'음흉 대마왕 같은 새끼. 무슨 꿍꿍이야 대체.'

[김희재의 속마음을 더 들여다봤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봅니다.]

'어차피 다음에 만날 때 보면 알겠지. 무슨 의도로 나한테 미선 이를 떠먹여 주는지 말이야.'

[근데 어차피 주인님은 미션 때문에 미선양을 공략한 게 아니었습니까?]

'그렇긴 해.'

[그럼 오히려 김희재가 주인님을 도와준 꼴인데요? 공식적으로 자신의 여자 경호원을 주인님께 허락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듣고 보니 또 그렇네?'

도훈이 이상한 우연에 고개를 갸웃했다.

김희재가 무슨 꿍꿍이 속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행동은 모두 도훈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에 나린과 미선을 자신에게 허락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묵시적인 허용 아래 가능했다. 미선의 경우도 도훈이 굳이 공들여 공략하지 않았어도 결국에는 제 발로 도훈에게 안길 운명이었다.

'···희한하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행동이 자꾸 나에게 도움이 되니까. 혹시 최지안도 똑같은 상황이려나?'

[이번에 내기를 건 신입회원 말씀이시죠?]

'응. 알고 보니 최지안이 엄청난 포인트 덩어리라거나.'

[클럽까지 제 발로 찾아온 걸 보면 무척이나 난잡한 여성일 가능성이 크겠죠.]

'나린이나 민하를 뛰어넘을 정도일지도?'

[정말 그렇다면 김희재는 주인님에겐 귀인이군요.]

'귀인?'

[의도와 상관없이 주인님께 득이 되는 인물요.]

'호오, 김희재가 귀인이라···. 뭐, 어쨌든 나쁘진 않네.'

미선을 집 안에 들인 도훈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

"집안 둘러보고 사진이라도 좀 찍어놔."

"사진은 왜요?"

"김희재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서지. 집에 들어갔다는 증거도 남길 겸, 내가 이집에서 혼자 어떻게 사는지 확인시켜주라고. 나도 의심받는 건 싫으니까."

"아···."

미선이 말귀를 이해했는지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도훈이 곧바로 말렸다.

"뭐하는 거야? 그렇게 대놓고 찍으면 어떻게 해?"

"네?"

"아니, 이러면 김희재가 더 이상하게 여기지. 누가 남의 집에 놀러가서 대놓고 촬영을 하냐고. 모델하우스도 아니고."

"아···."

"몰래 찍는 척 몰카 각도로 찍어."

"그, 그렇군요.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그리고 너 언제까지 나한테 말 안 놓을 거야? 이러면 내가 불편한데."

"음···. 그건 차차···."

"알아서 해."

도훈이 소파에 앉아 잠시 쉬는 사이 미선이 집안을 돌아다니며 몰래 찍는 각도로 사진을 남겼다. 대충 사진을 찍은 미선이 도훈옆에 앉으며 말했다.

"집이 진짜로 크네요. 확실히 남자 대학생 혼자 사는 집이라고 믿기 어렵겠어요."

"그래봐야 김희재에 비하면야···. 맞다. 근데 회장님이라는 사람, 그렇게 돈이 많아?"

"많죠."

"재산이 얼마나 되는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달에 평균적으로 나가는 인건비만 해도 ···."

"인건비?"

"단순 경호 인력만 10명이 넘어요. 그중에 막내인 제가 받는 월급을 생각하면···."

"혹시 얼마나 받는지 물어봐도 돼?"

"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음···. 청와대 일할 때보다 5배는 더 벌어요."

"헐. 그럼 월 1500도 넘겠네?"

"네, 대충."

"잠깐만, 그럼 경호원들에게 주는 월급만 한달에 2억 넘게 나간다는 거잖아?"

"그렇겠죠. 운영경비를 뺀 인건비만요."

[장난이 아니군요. 돈을 물 쓰듯 쓴다는 말이 이런 건가요? 경호원 말고도 민하나 나린양처럼 비서들도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정기모임에 쓰는 호텔 대관료도 있고.'

[이게 계속 유지가 된다면 정말 상상 이상의 부자일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런 소비가 유지가 되는 게 신기합니다.]

'불가능할 것도 없지. 사우디 왕자가 우리나라 왔을 때 하룻밤 2000만원이 넘는 호텔방에 머물렀다잖아.'

[엄청나군요.]

'근데 그 사람 재산에 비하니까 3만원짜리 모텔비보다 못한 수준이라고 했거든. 재산이 1조 넘는다치면 하루에 1억씩 써도 다 쓰는데 30년걸리니까.'

[음···.]

'게다가 김희재는 아직 40대밖에 안 됐고, 심지어 자수성가잖아. 거의 미친놈 수준이라고 봐야지.'

[대단하군요. 어떤 면에서는.]

"엄청나네. 그래서 회장한테 그렇게 충성하는 거였어?"

"네?"

"아니, 돈을 그만큼이나 주니까. 혹할만도 하겠는데."

"아, 아니에요. 저는 돈 때문이 아니라···."

"아니야?"

"저는 받은 만큼 일 한다는 주의예요. 저의 값어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거죠."

도훈이 미선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그럼, 회장이 날 감시하라고 시키면 그대로 따를 거야? 나랑 있었던 일 일일이 다 보고하고?"

"···그, 그건."

"왜? 네가 절대적으로 따르는 회장의 명령이잖아. 넌 돈준 사람에게 충성하고."

"모, 모르겠어요."

"대답을 못 하겠나 보군. 이거 실망인데."

"아니, 저는···."

"괜찮아. 하긴 나라도 돈이 그렇게 많은 회장이라면 목숨 바칠수 있을 것 같아. 어차피 세상에 널린 게 남잔데. 안 그래?"

"······."

"사진 다 찍었으면 이만 가봐. 회장도 그거면 만족할 거야. 나도 이제 쉬어야겠다."

"도, 도훈씨···."

도훈은 귀찮다는 듯 손가락을 휘젓더니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미선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해했다.

"저보고 그냥 가라고요?"

"왜? 회장이 지시한 것은 다 했잖아. 집도 들어와서 확인했고, 사진도 남겼고. 뭐 더 있어?"

"아니 그래도···. 혹시 저한테 실망했어요?"

"실망은 무슨. 애초에 기대도 안 했어."

"······."

"멀리 안 나간다."

미선이 섭섭하다는 얼굴로 일어섰다. 회장이냐 도훈이냐 양자 택일을 강요한 뒤 곧바로 손절해버리는 도훈의 태도가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아직 결정을 내린 것도 아닌데, 고민할 시간도 안 주고 곧바로 내쳐버리니 미선의 입장에선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진짜로 이러실 거예요?"

"내가 뭘?"

"라면 먹고 가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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