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 ex wife-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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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딘지 모르게 모양새가 난달까? 여기가 처음 근무한 곳은 아니죠?"
도훈의 물음에 최대한 말을 아끼던 미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 당연히 처음은 아니죠."
"그럼 원래는 어디서 근무하셨는데요?"
"그건 보안 사항이라 좀···."
"보안이라뇨?"
"퇴사할 때 비밀 유지 서약서를 쓰고 나와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하네요."
도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훅 들어갔다.
"헐? 설마 청와대예요?"
"앗. 어떻게 그걸···."
"뻔하잖아요. 중간에 그만두는 보디가드에게 보안유지 서약까지 요구하는 기관이 어디겠어요? 청와대밖에 없죠."
"흐음, 역시 머리가 좋으시네요."
"제가요?"
"아, 그게···."
미선은 도훈이 일반적인 근육질 덩치와 달리 굉장히 영민한 대학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도훈 역시 이를 알면서 되물은 것이었다.
"죄송해요. 사실 도훈씨 개인 정보를 슬쩍 봤었거든요. 다니시는 대학 단대 수석이던데요."
"근데 그걸 어떻게 아신 거예요?"
"회장님은 프로그래머기도 하지만, 천재 해커 출신이기도 해요. 아마 마음만 먹으면 국방부도 뚫을 수 있을걸요."
"정말요? 회장님이 그럼 제 정보를 직접 해킹하신 거라고요?"
"그런 쪽으론 워낙 특출나신 분이라···. 너무 기분 나빠하진 마세요. 신입회원 받을 때 하는 의례적인 절차니까."
"어차피 합격했으니 이젠 상관없어요. 근데 정말로 청와대 근무하셨어요? 그럼 대통령 경호?"
"아이참···. 말하기 곤란한데."
"일부러 말씀하신 건 아니죠. 제가 눈치껏 알아챈 거니까."
"그래요, 경력사항 정도는 기밀이 아니니까. 대통령은 아니고 제2 부속실에서 근무했어요."
"제2 부속실은 뭐예요?"
"그러니까 제 1부속실이 VVIP담당이고, 저는 대통령 가족, 그 중에서도 영부인 경호였어요."
"아하! 그렇구나. 영부인같은 여자들은 여자 경호원이 더 편하겠네요."
도훈의 말에 미선이 살짝 발끈했다.
"···꼭 여자라서 뽑힌 건 아니고."
"예?"
"같은 여자라서 영부인을 경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예요.
당연한 말이지만 청와대 경호실은 성별에 대한 배려보다 실력이 우선인 곳이니까."
도훈은 실수를 깨달은 듯 곧바로 사과했다.
"제가 그런 일은 잘 몰라서···.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모르실 수 있죠."
"근데 청와대 소속이면 엄청 끗발 좋은 거 아니에요? 나름 고위공무원 아닌가?"
"그래봐야 별정직이에요. 어공이라고도 하죠."
"별정직 공무원이면 별공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공무원이 되었다는 뜻에서 어공이라고 불려요. 어차피 정권이 바뀌면 다 같이 물갈이되는 경우가 많고. 반대는 늘공이라고 하고요."
"그런 단어도 있었구나. 잘 몰랐어요. 어쨌든 어공이라도 청와 대 근무면 경호원 중에선 가장 높은 곳에서 근무하신 거잖아요?"
"맞아요."
"근데 왜 지금은 회장님을···."
"가장 좋은 곳에서 근무했으니까 이쪽으로 스카웃 될 수 있었죠."
"네?"
"어차피 청와대 경호실도 겉보기만 그럴싸하지 공무원에 준하는 월급쟁이예요. 맡은 책임에 비하면 연봉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죠. 적다고 할 수도 없지만."
"아아, 그럼 스카웃되었다는 말은···."
"네. 회장님께서 청와대 근무 시절보다 정확하게 5배를 더 주시더라고요."
"우아!"
도훈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쳤네. 돈으로 사람을 산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구나.'
[김희재의 경호원이 한 두명도 아닌 것 같던데···.]
'돈이 썩어 넘치니까 별 짓 다하는거지. 설마하니 대통령보다 더 경호에 신경쓰고 있을 줄이야.'
[그나저나 방금전 대화로 미선양의 긴장이 약간은 풀린 것 같습니다. 아까보다 훨씬 표정이 밝아졌군요.]
'당연한 거야. 원래 사람은 자기가 잘 아는 분야를 설명할 땐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 마련이거든. 거기다 의도적으로 살짝 띄워주는 식으로 질문을 던졌으니까 지금쯤 어깨가 으쓱해 있을 거야.'
[그러니까요. 미선양의 청와대 근무이력을 뻔히 아시면서 왜 또 물으시나 했습니다.]
'돈 때문에 희재에게 넘어오긴 했지만 어쨌든 자부심 가질 과거라고 생각했거든.'
[주인님의 화술이 점점 경지에 오르는 군요.]
'과찬이야. 다 정보창 빨이지. 김희재가 해킹해서 털어낸 것보다 더 정교한 정보수집이 가능하니까.'
[하긴. 암튼 어서 빨리 정보창 공략 멘트로 넘어가시죠.]
'안 그래도 슬슬 시동 걸려던 중이야.'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신 분이셨네요. 전혀 몰라뵀어요."
"그래봐야 여기선 막내예요. 여담이지만 회장님 모시는 경호원 중에서 저보다 이력 낮은 사람은 한 명도 없고요."
"그래도 엄청 어린 나이에···."
"네? 제가요?"
"아, 저랑 비슷한 나이 아니세요? 스물 셋? 넷?"
도훈은 그녀의 나이가 26살이라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낮춰불렀다.
"아, 아니에요. 도훈씨보다 3살이나 많은데."
"헐!"
"제가 그렇게 어려 보였어요?"
"아니 저는···. 아, 죄송해요 누난 줄도 모르고···. 아깐 제가 너무 실례를···."
"누나만 아니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정말 아깐 죄송했어요. 갑자기 회장님이 그런 걸 시킬 줄은···."
"괜찮아요. 도훈씨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아니까."
"···네."
부끄러웠던 순간이 소환되자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하기엔, 30분 되기 전에 벌어진 낯뜨거운 사건이었다.
"흠흠, 제가 괜한 말을 꺼냈나 봐요."
"전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혹시 남자친구가 알면···."
"저 남자친구 없어요."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요?"
"아니 어떻게 없지? 이런 얼굴에···. 몸매에···.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도훈이 시종일관 띄워주자 미선도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도훈의 외모 때문에 호감이 갔다면, 지금은 얘기를 나눌수록 성격도 잘 맞는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도훈은 이미 그녀의 정보창을 읽고 그녀를 속속들이 파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래 만난 연인보다 더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애구나. 이런 애를 요샌 알파남이라고 부른다지? 정말 다 갖췄네.'
미선은 점점 도훈에 대한 호감이 올라갔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의외로 공부까지 잘하는 모범생에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대화도 술술 통했다.
만약 여기에 속궁합까지 잘 맞으면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라고 부를만했다.
"풉-. 괜한 소리 마세요. 저 정도는 평범하죠."
"에이, 너무 또 겸손하시기까지. 진짜로 예쁘신데···. 남자친구가 없는 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요. 혹시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못 만나시는 거?"
미선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중엔 사적인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그녀였지만, 도훈의 말솜씨에 자기도 모르게 허용적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뭐, 반쯤은 그렇죠."
"그러고 보면 경호원도 쉬운 일이 아니네요."
"어쩔 수 없어요. 누군가를 24시간 지킨다는 건, 반대로 자신을 돌보지 못한다는 소리기도 하거든요."
"아···."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근데 경호원 생활을 하시면 연애도 계속 못 하시는 거 아니에요?"
"음, 그거야 뭐···."
미선은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오늘 처음 보는 도훈에게 너무 사적인 부분까지 드러내는 것이 망설여진 것이다.
그녀는 딱히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고, 오히려 사교성이 부족한 편이라 직장 동료들 사이에선 친해지기 어려운 타입으로 꼽혔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낯선 도훈이었기 때문에 한결 마음이 편한 부분도 있었다. 계속 볼 사이도 아니고, 스쳐 지나가는 관계라면 속내를 조금은 드러내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음···. 그래서 되도록 일찍 은퇴할 생각이에요."
"경호원 일을요?"
"네."
"언제요?"
"아마도 서른?"
"서른이면···."
"네. 4년만 더 돈 모아서 입시 학원이나 차리려고요."
"입시 학원이요? 대학교 입시 학원?"
"네. 원래 제 꿈이에요. 요샌 경호학과도 체대처럼 미리 실기를 준비해야 합격하거든요. 공부만 잘한다고 갈 수 있는 학과가 아니다 보니."
"아하."
"근데 도훈씨도 실기 보지 않았어요? 전공이 체육 쪽이던데?"
"체대 입시요?"
"네, 네."
"수능 끝나고 몇 달 준비하긴 했어요."
"호오, 몇 달 준비하고 바로 합격하신 거예요?"
"그게 아니라··· 사범대 체육교육과는 실기 비중이 낮아요. 일반적인 체대보다는 수능을 더 보는 편이라."
"아, 그렇죠. 체육교육과였죠? 선생님 되시려고요?"
"네."
"별로 안 어울리는 거 같은데···."
미선은 무의식적으로 속마음을 되뇌고 말았다.
어쩌면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살짝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미선이 빠르게 덧붙였다.
"아니, 선생님 하면 물론 잘하실 것 같긴 해요. 제 말뜻은 선생님만 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뜻이었어요."
"제가요? 왜요?"
"그냥···. 전 고등학교 다닐 때 도훈씨 같은 체육 선생님을 한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하하, 그래요? 혹시 여고 나오셨어요?"
"네."
"졸업한 선배들한테 듣기로는 총각 선생들은 여고로 잘 발령안낸다고 하던데. 그래서 못 본 거 아닐까요?"
"그건 왜요?"
"아무래도···. 여고생이면 몸은 다 컸잖아요. 괜히 젊은 총각선생님 발령냈다가···."
"아!"
"무슨 뜻인지 알죠? 요새 여자애들이 워낙에 성숙한 편이라."
"도훈씨는 그럼 만약 여고생이 들이대면 어떨 거 같아요? 나중에 선생님 되고 나서."
"아니, 제가 여고에 발령 날 일은···."
"그냥요. 대답해봐요. 발령났다 치고. 남녀 공학도 있으니까."
"여고생은···."
"별로 상관없어요? 학생이어도?"
도훈은 그녀의 질문이 살짝 날이 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화기애애한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뭐지? 약간 취조당하는 기분인데?'
[대답 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선양이 주인님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으니까요.]
'흐음, 나를 판단한다라···.'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학생은 아니죠."
"정말요?"
"진짜로요. 범죄잖아요 그건."
"흐음···."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해도 설득력이 없을 것 같네요. 로얄 클럽에 가입하려고 면접 본 사람이 여자를 가린다고 하기엔 좀···."
"그러니까요. 사실 그래서 궁금했어요. 도훈씨 같은 사람이 왜 클럽에 들어가려고 하는지···."
'역시 예상대로 클럽 가입 때문이었군.'
[주인님을 섹스만 밝히는 색정광으로 여길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얼른 화제를 돌리시죠. 주인님에겐 좋지 않은 주제같은데. 자칫 미선양의 호감이 식을수도 있습니다.]
'아닐 걸.'
[네? 아니라고요?]
'방금 미선이가 그랬잖아. 나같은 사람이 왜 로얄 클럽에 들어가려고 하냐고. 그 말뜻이 뭐겠어?'
[변태라서 실망스럽다?]
'아니지. 그래서 더 아쉽다는 거지. 바람둥이 같은 남자만 아니면 남자친구 삼기 딱 좋을텐데 하는.'
[호오, 은연중에 미선양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만 것이군요.]
'이쯤 되면 뜸은 다 들은 것 같군. 이제 뚜껑 딸 시간이야.'
"제가 이런말 해도 믿으실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자 만나는 게 힘들어서 그랬어요."
"네? 도훈씨가요? 여자를 만나기 어렵다고요?"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전형적인 알파남인 도훈이 주변에 여자가 없을 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알파남들은 여자들이 먼저 선톡하고 귀찮게 구는 바람에 오히려 성가셔할 정도였다.
도훈이 이에 설명을 덧붙였다.
"음, 뭐라고 해야하지? 여자랑 만나는 게 어렵다는 건 아니에요. 만나자고 하는 여자들은 늘 많았어요."
"거봐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근데, 끝까지 가면···."
"끝까지?"
"네. 아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가 워낙에 특대 사이즈라."
"아!"
"막상 저랑 자게 되면 여자들이 너무 힘들어 하더라고요."
"흐음···."
"왜, 크면 무조건 좋은 줄 알잖아요.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이걸 받아주는 여자가 별로 없으니까."
"흠흠···. 미안해요."
"아니에요. 이런 얘기 잘 안 하는데, 물어보셔서···."
"그런 고충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정말."
"암튼 우연히 클럽 가입 권유를 받고나서 고민을 엄청 했어요.
저도 딱히 아무하고나 섹스하고 싶을 정도로 성욕이 넘치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클럽에 가면 저를 감당할 수 있는 여자를 만날 수 있을것 같았어요."
"···그러셨구나."
도훈의 솔직한 대답에 도리어 물어본 미선만 뻘쭘해졌다.
'괜히 물었나봐. 너무 커서 콤플렉스였다니···. 근데 그게 막 감당 못할 정도로 벅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