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 ex wife-49-
의외의 반전에 자칫 기선을 제압당할 수도 있는 상황.
팔각정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해 졌다.
[김희재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죠? 분노조절 장애도 아니고, 느닷없이 화를···.]
'뭐겠어? 사람 간보는 거지.'
[네? 간을 보다뇨?]
'내 간덩이가 얼마나 큰지 시험하는 거라고. 어떻게 반응해야 놈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나?' 도훈은 눈치를 살피다 크게 한 번 웃고 말았다.
"푸하하!"
"웃어? 너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여?"
"아이, 왜 그러실까 형님. 그때 일은 제가 다시 한 번 사죄 드리겠습니다."
도훈이 꾸벅 머리를 숙였다.
능청스럽게 웃어 넘기며, 다시 정중한 태도로 자세를 낮추는 모습에 희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야, 예상대로 담대한 놈이구나."
"제가요?"
"난 약간 쫄아 있을 줄 알았거든. 너 다 연기한 거지?"
[엇, 희재가 주인님의 정체를 알아챈 거 아닙니까?]
'시험하는 거라고 했잖아. 내 반응을 떠보는 거야.'
"연기는 아니고요, 물론 쫄진 않았습니다."
"크크크. 그럴 것 같더라. 태도는 정중한데, 눈빛이 여전히 살아있었거든. 너 솔직히 말해봐."
"네?"
"나 좆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에이, 설마요."
"맞잖아. 싸움 붙으면 한 주먹이면 때려 눕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네가 나보다 훨씬 힘도 세고 덩치도 좋으니니까.
너 체육과 다닌다며?"
"소싯적에 배구 좀 배웠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평소 어디가서 맞아본 적 한 번도 없지?"
"뭐. 맞고 다니는 타입은 아니죠."
"그 정도가 아니라 학교 다닐때 애들 좀 괴롭혔을 것 같은데?"
"제가요?"
"관상은 못 속이거든. 약한 애들 괴롭히고, 삥뜯고, 헤픈 여자 애들 존나 따먹고 다니고. 내 말 맞지?"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난 딱보면 알아. 근데 어쩌냐. 함부로 주먹 놀렸다간, 너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텐데."
도훈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희재가 원하는 게 그런 모습 같았다.
"무, 무슨···."
"여기 내 경호원들 쫙 깔려 있거든. 둘러보지마. 어차피 안 보이는데 있으니까."
"······."
"오늘 너 데리고 온 애들은 그냥 잡일 하는 애들이야. 물론 걔들도 무술 유단자 들이긴 해. 근데, 내 옆엣 호위하는 애들은 진짜 인간 병기 급이거든. 그러니까 내 앞에서 함부로 까불지 마. 진짜로 무서운 게 뭔지 경험하고 싶지 않으면."
"제가 왜 까불겠어요? 회장님 앞에서."
"크하하하. 생각보다 능글맞은 새끼였네. 전형적인 강약약강이야. 왜? 여기서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느낌 와?"
도훈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제도 몰라뵙고 설쳐서 죄송했습니다."
[너무 저자세로 나가시는 거 아닙니까?]
'원하는대로 맞춰주는 것 뿐이야. 희재 저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대충 알것 같거든.'
[무슨 생각이요?]
'카지노에서 처음 봤을 때 내가 면전에서 개무시한 것에 마음에 앙금이 좀 남았나봐. 관대한 척 하지만, 사실 쫌생이 같은 면이 있는 거지.'
[흐음.]
'그래서 여기서 확실하게 못을 박으려고 했던 것 같아. 내가 한번 더 그런 기미가 보이면 진짜 경호원 시켜서 먼지나게 두들겨 패버리려고. 로얄 클럽에 들이고 말고는 결국 희재 마음이니까.'
[대응을 잘못했으면 자칫 클럽 가입이 물 건너 갈뻔 했군요.]
'그렇지. 근데 또 보면 엄청 꿍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아.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척 하니까 쿨하게 받아주잖아.'
[주인님의 연기가 능수능란 했으니까요.]
"푸하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진짜로 쫄았어? 미안, 이것도 면접의 일부였어.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사과까지."
"···예?"
"그냥 어떻게 반응하나 보고 싶어서. 우린 소심한 사람은 또 싫어하거든. 그렇다고 싸가지 없는 종자도 선호하는 것도 아니고."
"아···."
"내가 도훈이 너한테 편견이 있었나봐. 지난 일은 다 털어 버리자."
희재가 갑자기 악수를 청했다.
도훈이 엉겹결에 악수를 받아주는데, 사각지대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어디론가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경호원을 뒤로 물렸군.'
[네?]
'나랑 악수 하는 게 일종의 사인이었던 것 같아. 대답 여하에 따라서 진짜로 여기서 나를 담가버리려고 했던 모양이야.'
[정말입니까? 아니 무슨 조폭들도 아니고···.]
'생각보다 음험한 놈이군. 근데 좀 웃겨.'
[뭐가 말입니까?]
'가만 보면 부하 직원들한테 엄청 쿨하고 친근한 척 대하잖아.
재민이니 미선이니 편하게 이름부르고. 나린이나 민하한테 하는 것만 봐도. 고용주와 직원 관계보다는 대학 선후배 사이나, 거의 동등한 지위인 것처럼 잘대 해주거든.'
[그런데요?]
'그런데 막상 자기 기분을 거슬리게 하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굴복시키는 타입인 거야. 이런 외딴 시골 별장에 불러다 놓고 죽도록 패버릴 생각을 할 만큼.'
[일종의 이중인격인가요?]
'그것보단 쿨한 척 하는 찐따같은데? 스스로 쿨한 척 다 하지만, 본질은 소심한 찐따 새끼랄까? 이거 생각보다 골때리는 놈이구나.'
"감사합니다."
"에이, 말 편하게 하라니까 또. 장난이었데도."
"정말 그래도 될까요?"
"나에 대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 미국에서 오래 일하다 왔거든."
"그래요?"
"거기선 탐이니 제임스니, 나이가 많든 적든 다 반말로 이름 부른다고. 딱히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꼰대처럼 지랄하는 것도 없고. 내가 젊었을 때 그런 직장 문화에서 오래 일을 하다 보니까 한국와서는 적응이 잘 안돼. 여긴 죄다 상급자한테 깍듯이 존댓말을 쓰잖아. 이것도 다 군대문화 때문에 생긴 악습이라니까?"
"아하."
혼자 장황하게 떠들어 대던 희재가 불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미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로얄 클럽의 남자멤버는 포화 상태야. 쉽게 말하면 여자는 언제나 부족하고 남자는 넘쳐나지."
"대충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다들 쟁쟁하다고."
"맞아. 어줍잖은 쭉쩡이들은 애초에 필터링 되거든. 어차피 가입시켜놔도 본인이 적응 못해서 금방 탈회할 걸? 다른 놈들은 1박2일 놀러가서 신나게 여자랑 물고빨고 싸고박고 노는데, 자기만 혼자 새벽까지 술 퍼마시고 있다보면 자존심 스크레치 가고 현타 온다니까?"
"네. 초이스 방식이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다고···."
"근데 또 너무 억울해 할 필욘 없어. 내가 초창기부터 여러가지 방식으로 운영을 해봤는데, 그게 가장 효과적이더라고."
"효과적이라고요?"
"숫컷들은 이상한게 자기가 여자를 찍어서 픽하면, 그 여자를 창녀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아."
"그냥 원하는대로 데려가 따먹게 해주면 성취감이 전혀 없달까? 도훈이 너도 여자들 많이 따먹고 다녀봐서 알 거 아니야? 알아서 너한테 대준 여자랑, 네가 노력해서 따먹은 애랑 비교하면 어느쪽이 더 성취감이 커?"
"그거야 당연히 후자가···."
"그치? 그렇다니까? 그래서 남자한테는 성취감을 안겨주는 게 중요해. 그래서 여자쪽에서 초이스를 하는 방식으로 매칭을 시킨 거야. 그리고 하나 더."
"하나 더요?"
"숫컷은 서로 경쟁을 붙였을 때 최선을 다하거든."
"아···."
"남자 회원 숫자를 줄여서 1:1로 매칭을 시키는 방법도 물론 있지. 아니면 여자들 더 많이 뽑아도 상관 없고. 인원? 지금처럼 150명이 아니라 천명이라도 사실 난 상관없어. 돈은 아무 문제가 아니니까."
"네."
"근데 막상 1:1 매칭을 시켜주잖아? 그럼 서로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까, 매력 발산이 전혀 안돼.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떠먹여주는데, 왜 굳이 노력하겠어? 해보니까 그건 좀 아니것 같더라고."
"그래서 1:2의 비율로 남녀 회원을 두는 건가요?"
"맞아. 이게 최선의 비율이야. 좀 더 느슨하게 하면 2:3. 어쨌든 여자가 적고 남자가 많을 수록 모임이 흥미진진해지거든. 도훈이 너 남자가 여자에 미쳐서 경쟁 붙으면 얼마나 치열해 지는지 모르지?"
"전 잘···."
"하여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너무 재밌어. 이거야 말로 야생이라니까? 푸하하."
"······."
"도훈이 넌 외모에선 일단 합격이야.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제법 있어 보이니까. 우리 클럽에 남자들은 제법 많지만 너 정도면 지금 당장 들어와도 상위 10%안에는 들 수 있어."
"감사합니다."
"근데 우린 또 외모 만으로 회원을 받진 않거든. 그런 거였음그냥 전국에 날고 긴다는 호빠 선수들 싹 다 받아줬지."
"그럼 어떤걸···."
"나한테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느냐야."
"솔직이요?"
"난 어설프게 거짓말 하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해. 한 번 나를 속이는 사람은, 두 번도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거거든. 서로 신뢰가 무너지면, 이런 모임은 존재할 수가 없어. 다들 비밀을 지켜왔기 때문에 로얄 클럽이 지금까지 번창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거거든."
"네."
"도훈이 너 나한테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지?"
"네, 물론입니다."
"좋아. 그러면 딱 하나만 물어볼게."
"네."
"너 돈은 어디서 난 거야?"
"무슨 돈이요?"
"집사고, 카지노 다니고 한 돈 말이야. 내가 아무리 뒤져봐도 너한테서 돈 나올 구석이라곤 전혀 없더라고. 그래서 만나면 그걸 묻고 싶었어."
"그건···."
"잠깐. 대답하기 전에 신중하게 고민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으면, 난 널 클럽회원으로 받아줄 생각이 없으니까. 불법적인 것이라도 기탄없이 말하도록 해.
진실을 숨기는 것보다, 차라리 범죄를 자백하는 게 더 싸게 먹힐거야."
김희재가 으름장 놓듯 말하며 팔짱을 꼈다.
도훈은 최대한 신중히 대답하라는 요구에 마침내 스킬을 활용 하기로 결심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면접이로군. 로시, 마음의 소리.'
[넵. 아까부터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돈세탁을 한 것 같단 말이지? 미국에 있다는 잘나가는 소설가 아버지가 유산 상속 명목으로 몰래 현금이라도 쥐어준 건가?}
[김희재는 미국에 계시는 이도훈군의 아버지를 의심하고 있군요.]
'그러네. 하긴 돈 나올 구석이 거기밖에 없긴 하지만.'
"음···. 솔직히 말씀하라고 하시니 다 밝히겠습니다."
"좋아. 들은 준비 되어 있어."
"저희 아버지께서는 사실 유명한 소설가십니다. 존함은···."
"어, 알고 있어. 계속해."
"아버지께서 소설 인세로 돈을 많이 버셨는데, 달러 환전할 때 탈세를 좀 하셨습니다."
"달러 깡이라도 한 거야?"
"음, 뭐···. 비슷합니다. 명동에···"
"구체적인건 말 안해도 돼. 그래서?"
"해서 현금을 억단위로 들고 계셨는데, 은행에 넣지도 못해서 약간 애매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비자금으로 주택을 샀다?"
"네. 어차피 나중에 저한테 물려줄 거라면, 상속세 없이 일찍주는셈 친다고···. 아는 지인하고 직거래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쩐지. 대학생 혼자 살기엔 너무 큰 집이다 했더니, 탈세한 돈으로 부동산을 박은 거였어?"
"네. 맞습니다."
"뭐, 그런거라면···. 좋아. 카지노는 무슨 돈으로 온 거지?"
"남은 현금 일부를 제가 쓰고 있습니다."
"달러를 환전했다는?"
"네. 사실 아버님께서 남은 돈은 결혼자금으로 쓰라고 아껴두라고 했는데, 어차피 은행에 넣을 수도 없고 하다보니, 저희집 개인 금고에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호오."
"그러다 심심해서 홀덤바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큰 돈으로 게임을 하다보니 거기 직원이 VIP룸을 알려주더라고요. 2층에 가면 진짜 큰 판이 있다고."
"그렇게 된 거구만."
"사실 도박을 좋아하기도 하고, 잃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너무 자신하지 말고."
"네?"
"나야 심심해서 가끔 다니긴 하는데, 거기 순 사기꾼들 뿐이야.
업장에서 타짜 고용하는 거 몰랐어?"
"타, 타짜요?"
"표정 보니까 진짜로 몰랐나 보네. 충고하는데 어설픈 실력으로 그런데드나들다가 진짜로 패가망신 한다고. 혹시나 아직까지 돈을 따고 있다면 그건 실력이 아니라, 놈들이 슬슬 밑장 빼면서 작업치는 거야. 견적 내서 나중에 크게 한 번 공사하려고."
"아···."
"오케이. 들어보니 납득이 가네. 사실 나도 어느정도 의심은 했거든. 평범한 대학생이 무슨 재주로 고가의 주택을 자가소유하고, 사설 도박장을 드나들까하고."
"솔직히 불법적인 일이라 어디가서 말은 못하고 있었는데, 솔직히 말씀하라고 하셔서···."
"잘했어. 어설프게 거짓말 했으면 진짜로 너 안 받았을 거야."
"예? 그럼···."
"이도훈, 면접 합격!"
'엥? 이렇게 쿨하게 통과시켜 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