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 ex wife-48-
기다렸던 문자가 도착하자 도훈이 내심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는 의도적인 연출이었다. 그 시간에도 희재가 보낸 감시원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짝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겠지?'
[감시자들을 속이기 위해섭니까?]
'응. 평범한 대학생이 난교 클럽 회장의 문자를 받았을 때 보임직한 반응으로.'
도훈은 문자를 한참 들여다보다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연락을 곧바로 할지, 좀 더 기다렸다가 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연기 잘하시는데요?]
'원래 연기는 내 전공이잖아.'
[주인님은 연기자를 하셨어도 충분히 대성하셨을 것 같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얼굴 잘생겼지, 몸매 되지, 액션 연기는 스턴트 배우도 필요 없는데. 말하고 나니까 이거 완전 탐크루즈 아니냐?'
[···예?]
'아니야. 그냥 해본 소리야. 연기는 무슨. 얼굴 팔려서 PK단에 잡혀갈 일 있나.'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뭐야? 설마 탐마저?'
[저는 아무말도 안 했습니다.]
'어쩐지, 위험한 연기도 서슴없이 한다 싶더니만.'
[그나저나 얼른 답장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오후 수업이 끝난 줄은 상대도 알고 있을텐데요.]
'응. 이제 연락하면 될 것 같아.' 도훈이 긴장된 표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모습이 감시자들에게 실시간으로 보여지고 있다는 걸 다분히 의식한 연기였다.
"여보세요?"
-···이도훈씨?
"아, 안녕하세요. 처음 연락드립니다. 이도훈입니다."
-하하, 너무 긴장안하셔도 됩니다. 민하에게 듣던 거랑 다르군요.
"네? 다르다뇨?"
-민하에게 듣기론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학생이라고.
"그, 그런가요?"
-아무튼 지금 시간 되십니까?
"예. 수업 막 끝났습니다. 혹시 어디로 가면 될까요?"
-거기서 그냥 서 계시면 됩니다.
"네?"
-저희 직원들이 도훈씨를 모시러 올 겁니다.
"지, 직원들이요? 저 학교에 있는데."
-네. 근처에 대기시켜 놨습니다.
희재와 통화를 하고 있는데, 이제껏 위장해서 잠복해 있던 여자 경호원이 도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이도훈 학생 맞죠?"
"누, 누구세요?"
도훈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여직원이 안심시키듯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통화하시는 김희재 회장님 부하직원입니다."
"아···!"
-방금 저희 직원이랑 만나셨죠? 이후부터는 저희 직원의 안내를 따르시면 됩니다. 이따가 봽죠.
통화가 끊기자 도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직원에게 물었다.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궁금하신 점은 회장님을 직접 만나 물으시면 됩니다. 그럼 바로 가실까요?"
"어, 어디로요? 저도 차를 가져왔는데."
"알고 있습니다. 다만 도훈씨를 모셔오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저희 차로 모시겠습니다."
"차요?"
그때 기다렸다는 듯 고급 외제차가 캠퍼스 차도로 들어섰다.
평범한 대학생이면 차에 한 번 타보는 것만으로 일주일 간은 친구들에게 자랑할 것 같은 비싼 외제차량이었다.
"타시죠."
"아···. 네, 넵!"
[역시 찐따 연기 하나는 일품입니다.]
'그럴듯 했어? 놀라는 모습을 원하는 것 같아서 기대에 부흥해 줬지.'
[어젯밤부터 대놓고 감시를 하더니 아예 에스코트까지···.]
'뻔한 수법이야.'
[뻔한 수법이라뇨?]
'자신의 정보력이 이만큼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과시하는 거야. 내가 어떤 학교에 다니는지, 수?汰?언제 끝나는지, 심지어 내가 자차로 통학하는 지까지 전부 다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알려주는 거지. 거짓말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일종의 위력 시위랄까?'
[호오, 역시 만만치 않은 사내군요.]
'그래봐야 민간인일 뿐. 플레이어인 나에게는 어림도 없는 잔기술일뿐.'
도훈이 차에 오르자, 택배 기사로 위장했던 남직원이 다시 정장으로 갈아 입고 운전기사로 변해있었다. 뒷좌석에 앉는 도훈을 향해 남직원이 깍뜻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아, 네···."
"회장님 있는 곳으로 모시기 전에 잠시 실례 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때 뒷좌석에 나란히 탄 여직원이 불쑥 안대를 꺼내더니 도훈에게 건냈다.
"이걸 써주셔야 합니다."
"안대를요?"
"어디로 가는 지 알려드리면 곤란해서요. 아참, 그전에 핸드폰도 잠시 꺼주시겠습니까?"
흡사 납치를 방불케하는 에스코트(?)에 도훈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것들 진짜 가지가지하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죠?]
'만남 전에 최대한 상대를 긴장시키는 수법이지.'
[긴장 시키가뇨?]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면, 무의식적으로 움츠러 들 수 밖에 없거든. 사람은 시야를 빼앗기면 대체로 겁을 집어 먹으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주인님이 딱히 위험한 인물도 아니잖습니까?]
'협사으이 주도권을 잡겠다는 거겠지. 내가 자기 손바닥안에 있다는 걸 각인시키는 거야. 허튼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거참, 사람 귀찮게 하는 군요.]
'일단은 시키는 대로 따라주지.'
도훈은 순순히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여직원은 도훈이 전원을 끈 핸드폰을 받아 지퍼백에 넣더니, 김희재와의 만남이 끝날때까지 대신 맡아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도훈은 핸드폰도 압수당한 채 눈에 안대를 가리고 한동안 그들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물론 그 사이에도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근데 김희재라는 놈은 신규회원 받을 때마다 이런 미친짓을 하는 건가?'
[경호원들의 익숙한 행동을 봐선 한두번 해본 게 아닌것 같긴 합니다.]
'하긴, 이 정도로 보안을 철저히 해야 로얄 클럽인지 난봉 클럽인지 뭔가가 철저히 베일에 쌓여 있을 수 있었겠구나. 참가자들 신원을 탈탈 털고, 가입 전부터 자신의 정보력을 과시함으로써 불순분자가 끼어들 여지를 원천 차단한거야.'
[굉장히 치밀한 사람 같습니다. 그 치밀함이 변태적인 행위에 동원되는 점은 의외지만요.]
'일단 만나보면 알게 되겠지.'
안대를 쓰고 있긴 했지만, 도훈은 기의 흐름을 통해 마치 눈을 뜨고 있는 것과 똑같은 상태였다. 사실상 그에게 눈을 가리는 것은 아무 의미없는 행위였다.
'근데 저 여자애는 아까부터 왜 날 뚫어지게 보는 거지?'
도훈은 뒷좌석에 함께 탄 여자 경호원의 노골적인 시선에 살짝 당황했다.
[여자 경호원이요?]
'어. 아까부터 나한테서 눈을 못 떼는데?'
[혹시 주인님이 정말 자기 이상형인 걸까요?]
'어젠 비혼주의자라 하지 않았나?'
[원래 시집 안 간다는 여자들이 제일 먼저 간다지 않습니까.]
'웃기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왜요? 경호원 치고는 나름 괜찮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예전에 주인님을 졸졸 쫓아다니던 한지연양과 이미지가 비슷하군요.]
'경호원들은 아무래도 운동을 꾸준히 하는 편이니 몸매가 좋을 수 밖에 없지. 그리고 자기관리도 철저한 편이라 대체로 미모를 유지할 거고.'
[여자라면 환장을 하는 주인님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게 신기합니다.]
'어차피 로얄 클럽에 들어가면 포인트 덩어리가 넘쳐날텐데, 쓸데없는 데 정력 낭비하고 싶진 않거든. 공짜면 다 먹는 사람은 아니라고.'
[아하.]
'그리고 이젠 어지간한 미모는 눈에도 안 들어오는 것도 있고.'
[너무 미인을 많이 만나셔서 감흥이 덜해졌나 보군요. 한때는 못 생겨도 맛만 좋으면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워서라도···.]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린 거야. 암튼, 여자들도 은근히 엉큼하단 말이야? 처음보는 남자에 대해 뭘 안다고 저렇게 노골적으로 ···.'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이동한 차가 멈춰섰다.
"다 왔나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안대 벗으셔도 됩니다."
도훈이 안대를 벗으려고 하는데, 굳이 여자 경호원이 나서서 도훈의 안대를 직접 벗겨주었다.
"제가 벗겨드릴게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자 경호원은 차를 타고 오는 사이 도훈에게 반했는지 안대를 벗기며 눈을 마주치는데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홍조를 띄었다.
"근데 여기가 어디죠?"
도훈이 차창 밖으로 쳐다보는데, 주변으로 조경된 잔디와 연못이 보였다. 바깥 풍경만 봐선 고풍스러운 저택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저희 회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
"아하. 별장까지."
"따라 오시죠. 회장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겁니다."
"저, 근데 한가지 여쭤볼게 있는데요."
"네. 편히 말씀하세요."
"원래 클럽 신규 회원 모집을 이렇게 하나요? 아니면 저만 ···."
"많이 놀라셨나보군요. 의례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회장님이 워낙에 깐깐한 성격이라."
"아."
"그리고 너무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뭐가요?"
"저희가 도훈씨를 살짝 뒷조사 했거든요. 신원이 확실하지 않으면 아예 면접 자체가 불가능한지라."
"그래요? 어쩐지 학교까지 미리 와 계시더니···."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시죠."
여자 직원이 주차된 차에서 내려 도훈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한옥 형태로 지어진 집은, 으리으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도훈은 김희재가 의외로 한옥 스타일을 좋아하는 고전적인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집이 엄청 큽니다.]
'옛날 고관대작이 살았던 집인것 같은데. 새롭게 지은 집이 아니라, 고택을 개조한 것 같아.'
[이런 집은 제법 비싸지 않습니까?]
'제법이 아니라 엄청 비싸지. 땅 크기도 크긴데, 오래된 한옥은 그 자체로 문화재 취급 받거든. 하긴, 돈이 썩어 넘치니 이런 집을 개인 별장처럼 쓸 수 있는 거겠지만.'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한옥 안으로 들어가자, 팔각정처럼 생긴 공간에 정장을 입은 김희재가 앉아있었다. 그는 도훈을 보고 벌떡 일어나더니 마중을 나왔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미선이도 모시고 오느라 수고했어. 미선이 맞지?"
"네, 회장님."
"그럼 들어가 쉬라고. 이제부턴 재민이가 맡을 테니까."
"넵."
[재민이는 또 누구죠?]
'저기 구석에 숨어있는 녀석 같은데?'
[구석이요? 어디요?]
'당연히 안 보이게 숨었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겁이 많은 성격이네. 경호원이 맨날 저렇게 24시간 붙어서 지키고 있는 건가?'
[김희재가 다른 경호원을 근처에 대기시켰다는 말씀이시죠?]
'그런 것 같아.'
[역시 생각보다 철저한 사람이었군요.]
'그래봐야 어쩔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경호원이 수백명이 붙어 있더라도, 저 놈 목숨은 내 손에 달린 건데.'
[김희재를 혹시···.]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고. 놈이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죄없는 민간인을 해치겠어? 힘이 있다고 그런 짓을 함부로 벌였다간, 당장 신벌을 받을텐데 말이야.'
[아시니 다행입니다.]
"이쪽에 앉으시죠. 가볍게 다과를 준비해 놨습니다."
"아, 넵."
도훈은 긴장한 표정으로 조그만 소반을 두고 희재와 마주 앉았다.
소반 위에는 한과나 수정과 같은 전통 간식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가벼운 다과라고 했지만, 장인이 공들여 만든 최고급 음식임을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캬, 돈이 많으니 이런 호사도 누리는 구나.'
[주인님도 돈 많으시지 않습니까?]
'있으면 뭐해. 난 눈치보느라 쓰지도 못하는데. 옛말이 맞다니까?'
[무슨 말이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이름 알려지지 않는 부자가 되는 거라고.'
[이름 알려지지 않은 부자요?]
'원래 부자들도 유명해지면 다른 사람 눈치보느라 제멋대로 못살거든. 조금만 눈에 띄는 행동을 해도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으니까.. 심지어 다른 나라에 지진이 났는데, 성금 안 보냈다고 대중의 욕을 먹는단 말이야. 사실 기부는 강요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어야 하는 건데.'
[그렇죠. 아무래도 유명세라는 게 있으니.]
'근데 이름 없는 부자는 그런 제약도 없잖아. 어차피 무슨 또라 이짓을 해도 사람들이 아무도 자길 몰라보니까,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 거지.'
[김희재가 그런 종류의 부자라는 건가요?]
'응. 유명하지 않은데, 이런 별장을 소유할 정도로 막대한 부자. 경호원을 24시간 상시 대기 시키고, 말동무나 삼으려도 예쁜 여자들을 스폰서로 둔 찐부자. 정말 세상이 장밋빛처럼 보일 걸?'
[주인님이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모습은 처음봅니다.]
'뭐, 그렇다고 막 부럽다는 건 아니고.'
"저희 직원들에게 들으셨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도훈씨 뒷조사를 조금 했습니다."
"네,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클럽이 워낙에 폐쇄적이다보니 신규 회원 모집에 신중을 기하고 있어서요. 넓은신 아량으로 양해 바랍니다."
"별 말씀을.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한참 동생 같은데."
"그럴까?"
희재가 씩 웃더니 갑자기 낯빛을 바꾸어 말했다.
"근데 너 카지노에선 나한테 왜 그랬냐?"
"예?"
"싸가지 존나 밥 말아 먹은 줄 알았잖아. 어린 새끼가 반말이나 찍찍하고 말이야."
희재가 갑자기 험악한 말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