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 ex wife-47-
[네?]
'놈들이 정말 PK단이라면, 나에게 붙인 감시를 알아챌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예상하지 않았을까? 저번에 미호한테 들어보니 그렇게 허술한 집단은 아닌 것 같거든. 제주도 플레이어 보미의 증언도 그렇고.'
[듣고 보니 좀 이상하군요.]
'오히려 어설프게 감시를 들켰다간, 내가 도망갈 시간만 벌어주는 꼴이잖아. 그런데 저렇게 드러내놓고 감시를 한다고?'
[주인님 말씀을 들어보니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PK단이 아니면 혹시 경찰일까요?]
'경찰? 경찰이 나를 왜?'
[주인님은 호스트 클럽 마약 유통 사건의 주요 참고인으로 수배중이잖습니까? 중간에 살인 사건도 하나 끼어 있고요.]
'그건 빛나가 이미 처리했다고 했잖아. 중간에 증거를 인멸해서 경찰 쪽은 내 신원도 제대로 파악 못 할 거라고. 또 무슨 일 있으면 미리 알려주기로 했고.'
[하지만 빛나 양은 현재 부산에 내려가 마약 소탕 작전을 벌이는 중이라 주인님에게 미처 연락을 못 했을수도 있습니다.]
'음 그래도 경찰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직접요? 정체를 노출하시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놈들이 능력자가 아니라면 절대 못 알아 챌 방법이 있긴 해.'
[무슨 방법이요?]
'일단 방에 들어가자고. 놈들이 불 켜진 걸 확인한다고 했으니.' 도훈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불을 켜고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그는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타고 올라가 체력 단련실에 도착했다.
[설마 투명 인간입니까?]
'맞아. 차에 타고 있어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니,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야겠어.' 투명 인간 알약을 집어삼킨 도훈이 체력단련장을 지나갔다.
벽면에 설치된 거울에서 그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지더니, 잠시 후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몸이 완전히 가시영역에서 사라진 것이다.
투명 인간으로 변신한 도훈은 2층 테라스에서 1층 마당까지 훌쩍 뛰어내렸다.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착지였다.
그는 한겨울에 알몸으로 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항상성을 유지하는 그의 신체가, 스스로 체온을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야심한 밤에 알몸으로 다니는 걸 보니 이젠 정말로 변태처럼 보이는군요.]
'괜찮아. 어차피 아무도 날 못 보니까. 그나저나 스트리킹하는 사람들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해. 밑이 뻥 뚫려 있으니 여간 시원한 게 아니군.'
[투명인간 아이템엔 시간 제한이 있는 거 아시죠?]
'알아. 잠깐이면 돼.' 담벼락 앞에선 도훈은 서전트 점프만으로 2미터를 훌쩍 넘어 벽을 짚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공중제비를 도는 것처럼 몸을 거꾸로 세우더니, 바깥 도로까지 순식간에 이동했다.
소리하나 없는 깔끔한 동작은 흡사 닌자의 인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저것들이 정말 겁도 없이 누굴 감시한다고.'
도훈이 차량 앞까지 다가갔지만, 안에 탄 남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운전석에 앉은 사내는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었고, 보조석에 앉은 여자가 망원경을 이용해 도훈의 집 외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흐음, 어디 소속이려나? 아무리 봐도 경찰 같아 보이진 않는데.'
[어떻게 아십니까? 경찰 배지를 내놓고 다니는 것도 아닐 텐데요.]
'저, 여자 말이야. 경찰치곤 너무 날렵하게 생기지 않았어?'
[여자요?]
알몸으로 차 앞에 선 도훈은 정면에서 대놓고 여자의 외모를 살폈다. 단정하게 뒤로 묶은 머리에,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은 경찰이라기 보다 사설 경호원 같은 차림새였다.
'내가 아는 여경은 저렇게 싸움 잘하게 안 생겼거든.'
[지나친 편견 아닙니까? 빛나양하고 보미양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경찰이었는데요.]
'그러니까. 경찰이면 약간이라도 경찰 티가 나야 하는데, 쓰고 있는 장비만 봐도 너무 사제 물건이거든.'
[네?]
'일단 차 안에 무전기가 전혀 없어.'
[무전기요?]
'경찰들은 잠복 근무할 때도 상시 무전 대기상태야. 언제 현장에서 사건이 터질지 모르니까. 근데 놈들은 핸드폰을 이용해서 상부랑 연락을 하고 있잖아.'
[그렇군요.]
'그리고 차종을 봐. 이게 어디 경찰한테 지급될 종류로 보여?'
[차는 왜요?]
'너무 고급 차거든. 대한민국 잠복 경찰이 독일 3사의 외제차를 쓴다고? 그런건 듣도 보도 못 했어. 현실 고증 실패라고.'
[그럼 진짜로 PK단이라고요?]
'근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도훈이 이제 운전석 옆으로 다가가 대놓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척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니, 운전석에 앉은 사내는 도훈이 바로 코앞에 있는 줄도 모르고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뭘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도훈이 핸드폰에 떠오른 내용을 살피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자신의 대학교 학적부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속 학과는 말할 것도 없고 중간에 군휴학 복학 내용, 심지어 직전학기 대학 성적까지 기록된 완벽한 개인정보 자료였다. 대학에서 본인 인증을 통해 발급하지 않는 한 절대 유출될 수 없는 정보가 핸드폰 화면에 떠 있었던 것이다.
화면을 스크롤해서 넘기던 사내가 옆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야, 이 친구 공부 엄청 잘하는데?"
"뭐?"
"이도훈 말이야. 직전학기 단대 수석이었네?"
"정말?"
여자가 망원경을 치우더니 핸드폰에 나온 서류를 함께 확인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반문하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군대를 다녀오기 전 1학년 때는 성적 완전 좆 박았는데?"
"그래? 정말이네? 설마 군대 다녀와서 각성했다 뭐 이런 건가?"
"흐음. 어쨌든 우린 동태 보고하면 그만이잖아. 대체 프로필은 왜 보는 거야?"
"팀장님께서 참고하라고 보내준 자료야. 내일 시간표를 확인해야 추적 감시를 할 수 있으니까."
"알아서 해. 난 감시나 계속할 테니."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서로의 임무에 집중했다.
이를 차창 밖에서 훔쳐보던 도훈은 점점 의문이 들었다.
'경찰이 대학교 학적부 자료까지 터나? 검사한테 압색영장 받은 것도 아니고.'
[그건 아닐 것 같은데요?]
'PK단이 그런 것도 이상하잖아.'
[그것도 좀···. 이상하긴 합니다.]
'얘네들 진짜 뭐지? 어떻게 내 개인 정보 자료를 들고 있는 건데?'
도훈은 점점 감시자들에 대한 의문을 더해갔다.
아무리 봐도 PK단 소속도, 경찰도 아닌 것 같았다. 그 외의 단체나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었다.
'그냥 확 끄집어내서 누가 보냈는지 탈탈 털어볼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괜히 놈들의 주의를 끌 필욘 없으니까요. 다만 확실한 건 주인님이 경계해야 할 상대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건 왜?'
[주인님이 플레이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한가하게 학적부 자료나 들여다보고 있지 않을테니까요.]
'하긴 그렇네. 공부를 잘하는 게 무슨 대단한 능력도 아니고 말이야.'
"와, 미선아. 이 사진 좀 봐. 이 새끼 몸 죽이는데?"
"···감시 중인데 왜 자꾸 귀찮게 말거는, 헉!"
스마트폰에 떠오른 사진은 도훈이 미스터 국성 대회에서 입상했을 때 찍은 전신 사진이었다.
'뭐야? 저건 또 어디서 났지?'
[해당 기사는 대학신문 검색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그때 인터뷰 하셨잖습니까.]
'아아, 맞네. 그 기사구나.'
"뭐야? 몸이 왜 이래?"
"올가을에 국성대 보디빌딩 대회를 나갔었나봐. 몸이 완전 ···."
"의외네. 공부를 잘하는 몸짱은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완전히 미선이 네 스타일이지?"
"뭐래? 쓸데없는 소릴. 나 비혼주의자인거 몰라서 물어?"
"비혼이라고 남자친구를 안 사귀는 건 아니지 않나?"
"저기요, 근무 중 개인적인 대화는 삼가해줄래? 이래서 너랑 외근 나오기 싫다니까?"
"나도 밤늦게 호출와서 짜증났거든? 누군 오고 싶어서 왔나."
"회장님이 괜히 우리한테 고액 연봉 주는 줄 알았어 그럼? 까라면 까. 마음에 안 들면 나가고."
"내가 왜? 난 회장님한테 언제나 충성이라고."
'회장님? 무슨 회장을 말하는 거지?'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이들은 재벌 회장이 부리는 사설 경호원인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네. 근데 대체 누구···.' 문득 도훈의 뇌리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설마. 김희재?'
[네?]
'맞네. 그 새끼도 회장이라고 불렸잖아. 로얄 클럽 회장인가 뭔가.'
[내일 직접 만나기로 한 김희재가 왜 주인님을 밀착 감시하죠?]
'모르지 그거야. 그러고 보니 아까 내 이름이랑 주민번호 알아갔잖아. 민하 통해서.'
[아아, 그렇군요. 김희재가 유명한 프로그래머 출신이라고 했으니, 주인님의 개인정보를 해킹으로 이용한 것이군요!]
도훈은 그제야 이들이 집 앞에서 자신을 감시하게 된 연유를 알게 되었다.
이름과 주민번호가 있으면 보유 중인 부동산 목록을 찾아 주소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밖에 소속 대학이나 기타 가족 사항에 대한 모든 정보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젠장. 상대가 해커일 수 있다는 점은 간과했네. 내 신상 다 털린 것 같은데?'
[어떻게 합니까? 주인님의 뒤를 캐는 이유가 뭘까요?]
'나도 거기까진 모르겠는데. 혹시 클럽에 가입하는 사람들의 뒷조사를 직접 하는 걸까나?'
[뒷조사요?]
'왜, 민하가 그랬잖아. 클럽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줄을 섰다고. 그러니 가입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완벽하게 파악해 놓는 거지. 혹시나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
[흐음. 귀찮게 됐군요.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 PK단이나 경찰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해도 충분한 소득이야. 그리고 어차피 내 신상을 탈탈 털어봐야 나오는 건 그 이정도 밖에없을 걸?'
[주인님이 보유한 코인 계좌는요?]
'그거야 안소영이 잘 세탁해 놨으니 상관없을 거야. 내 명의로는 안 잡힐 테니까.'
[여간 귀찮은 상대가 아니군요. 음흉하게 부하들 시켜 뒷조사나 시키고.]
'그러니까 말이야. 일단 내일 만나기 전까지는 최대한 평범한 모습을 연출해야겠군.'
[저들에게 일부러 주인님을 노출시킨다는 말씀이시죠?]
'그래야 김희재가 안심할 수 있을테니 말이야.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했다간 클럽 가입도 불허될 걸?'
대충 내용을 파악한 도훈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이 든 척 소등을 했다.
마침 투명인간 스킬도 풀려 그는 알몸으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 * *
다음날.
도훈은 최대한 평범한 대학생처럼 위장하며 움직였다. 어젯밤주차한 중고차를 타고 학교로 등교하는데, 예상대로 검은 세단이 따라붙었다.
'저것들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괜찮으려나?'
[돌아가면서 잠들었을 겁니다. 잠복에 익숙해 보였거든요.]
'그새 복장도 갈아입었는데?'
도훈이 백미러를 통해 힐끔 뒤에 따라붙은 차량을 확인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던 이들은, 위장복으로 완전히 갈아입은 상태였다.
남자는 택배 배달 조끼를 입은 차림이었고 여자의 경우는 대학원생처럼 보이게끔 손에 교재와 파일도 하나 들고 있었다.
'웃기네. 학교 안까지 따라와서 감시할 모양인가 본데?'
[주인님이 평범한 대학생인지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거야 뭐, 쉽지. 감시자가 붙은 걸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으니까.'
학교에 도착한 도훈은 모처럼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감시자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아마도 강의실 밖에서 도훈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일방적으로 당하니까 좀 억울한데. 나도 최번개 시켜서 그 새끼 신상이나 털어버려?'
[최번개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직접 조사는 아니더라도 어디사는 누군지 정도도 어려우려나?'
[어제 말씀 하신 것처럼 괜히 역추적으로 꼬리를 잡히는 날에는 오히려 최번개가 곤란해 질겁니다. 최번개가 버려도 상관없는 카드라면 상관없지만 이런 일에 소모시키기는 좀 아깝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답답하네. 나는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으니.'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짓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차피 주인님이 마음만 먹으면 독심술을 부린 것처럼 상대를 파악하는 건 식은 죽먹기니까요.]
'하긴.'
도훈의 예상대로 김희재의 사설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평범한 모습으로 위장한 채 대학 구석구석에서 마주쳤다.
본인들은 완벽한 위장을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놈들의 의도를 파악한 도훈으로서는, 지나치게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아주 대놓고 보네 이젠.'
[딱히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았으니 어차피 건진 건 없을 겁니다.]
도훈이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길이었다.
마침내 김희재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김희재 : 로얄 클럽장입니다. 오늘 면접 보기로 하신 이도훈씨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