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 ex wife-46-
희재의 부름에 누군가가 서재문을 노크했다.
똑똑-.
"뭘 또 기척까지. 영상으로 다 보고 있었으면서.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덩치가 무척 좋은 사내였다. 희재가 카지노에 있을 때도, 또 그가 최지안을 개인 면접 하러 갈때도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인물.
"부르셨습니까?"
"재민이 넌 잠도 없냐? 왠지 너일 거 같더라. 불러도 말대꾸도 없고."
재민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최재민.
그는 희재를 호위하는 십수 명의 경호팀의 팀장이었다.
수조원대의 자산가가 된 희재는 어느순간 스스로 신변을 지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부러 대단한 사람인 척 거추장스럽게 경호원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해서 그의 경호원들은 대부분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 데, 유일하게 경호팀장인 최재민만이 그와 지근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외의 경호원들은 재민의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희재가 재민을 아끼는 이유는 단순했다.
재민은 그가 아는 사람중에서 가장 강하고, 충성스러웠으며, 또한 과묵한 타입이었다.
평소 늘 외로움을 느끼는 희재였지만, 막상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활달한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종일 종알대는 나린보다, 필요한 말만 거들어주는 민하 쪽을 더 선호했던 것.
아무튼 재민은 거의 24시간 희재의 곁에서 그를 경호하는 인물이었다.그렇다고 너무 붙어 있으면 곤란하니, 집에 있을 때는 CC TV를 통해 다른 방에서 희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긴, 내가 늦게 자는데, 네가 먼저 잘리가 없지. 사람 하나 풀어서 밀착 감시 좀 해줘야 겠어."
"방금 찾아보신 이도훈이라는 대학생인가요?"
"맞아. 그러고 보니 너랑도 인연이 있지 않아? 엊그제 카지노에서 한 번 만났었는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재민이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희재 앞에서 겁도 없이 깐죽대던 놈이었다.
고용주에 대한 모욕을 곧 자신에 대한 무시로 여긴 재민은 희재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그 자리에서 이도훈을 반쯤 죽이고 싶었다.
특히 그가 이도훈에게 화가 잔뜩 난 것은, 자신을 보고도 전혀 쫄지 않는 겁대가리 없는 무모함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쭙잖은 운동 실력과 덩치만 믿고 설치는 풋내기들을, 그는 한 두번 본 게 아니었다.
특히 주제도 모르고 깝치다가 그에게 반병신 된 핏덩이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친구 였습니까? 이도훈이?"
"워워.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어? 감시만 하라니까. 왜 때리기라도 하게?"
"회장님께 버릇없이 군 사람을 그냥 두면, 회장님 위신 뿐 아니라 경호팀장인 저도 체면이 깎입니다."
희재가 피식 웃었다.
재민은 충성스럽긴 하지만, 너무나 경직된 경향이 있다고.
"됐어. 내가 괜찮다는데, 네가 왜 나서? 그리고 싸가지 없다고 맨날 쥐어 박았다간 주변에 인재가 남아나질 않는 법이야."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개발자로 일했던 희재는, 국내의 연공서 열 문화라든가 나이 대접 문화를 굉장히 불편하게 여겼다.
특히 창의적인 역량이 필요한 개발자들은, 엄격한 규율과 통제로 묶는 것보다 자유롭게 풀어줬을 때 제대로 실력발휘를 할 수 있다고 믿는 부류였다.
실제로 미국의 기업에 다닐 때에도 희재는, 직장에서 마사지도 받고, 뷔페식도 먹고, 각종 게임에 오락을 실컷 즐기는 등 한국에 서라면 상상도 못할 자유로운 기업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 결과 엄청난 성공을 했던 희재였기에, 한국식 유교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누구보다 컸다.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태도도 별로 중요치 않아.
내가 옛날 미국에 있을 때 회사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본 애니메이션만 처 보는 오타쿠 녀석 얘기 했던가?"
"······."
"나중에 독립하고 보니까 걔가 제일 성공했더라고. 실제로 머리가 제일 좋았거든. 중요한 건 결과로 보여주는 거야. 싸가지 밥말아 먹은 녀석이라도 능력만 있으면 무슨 상관이야? 싸가지가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
"암튼 쓸만한 애로 하나 감시 붙여봐. 내가 볼 때 이도훈이라는 이 자식 살짝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아."
"켕기는 거라뇨?"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가진 자산에 비해 너무 현금이 많아. 이상할 정도로."
"음, 설마 돈세탁입니까?"
"모르겠어. 나이도 어린놈이 무슨 재주로 현금을 그렇게 확보했는지 말이야. 어쩌면 내가 모르는 뒷배가 있을수도 있고, 혹은 ···."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지. 우리 클럽 회원들이 그닥 양심적인 사람들은 아니지만, 범법자를 괜히 받았다가 문제 일으키면 곤란하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네. 똘똘한 녀석으로 한 놈 붙이겠습니다."
"24시간 밀착감시니까 2인 1조로 붙여. 이도훈의 기본적인 신상에 대해선 내가 정리해서 자료 넘겨 줄테니까."
"네."
재민이 대답을 마치고 가만히 서있자 희재가 말했다.
"뭐해? 지금부터 시작인데. 애들 안 불러?"
"지금이요? 벌써 자정인데···."
"지금부터 24시간이라고. 아놔. 내내 설명했는데 뭘 들은 거야? 얼른 움직이라니까?"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재민이 빠르게 경호팀을 호출하러 간 사이 희재가 그의 분주한 모습을 보면서 껄껄거렸다.
"하여간, 우직한 소같은 놈이라니까? 융통성이 없는 것 빼곤 제일 듬직한 경호원이랄까?"
희재는 사실 재민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 하나 죽여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만큼, 독종이라는 것도.
그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부하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디 그럼 비밀 면접을 개시해 볼까나.'
* * *
나린과 민하와 스리섬을 마치고 두둑하게 포인트를 챙긴 도훈은 흥겨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한 번 더 해달라고 조르긴 했지만,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도훈은 쓸데없는 데 힘을 쓰고 싶지 않았다.
'흐흐, 간만에 포인트 두둑하게 벌겠네. 로얄 클럽의 여성 멤버가 50명이 넘는다니 돌아가면서 다 따먹으면 나중에 경매장을 살수도 있을 듯.'
[그렇게 좋으십니까?]
'당연히 좋지. 포인트가 많아야 마켓에서 물건도 사고, 경매도 참가하고, 나중에 천상크래프트도 즐길 수 있을 것 아니야.'
[고작 게임하나 하려고 포인트를 버시겠다고요?]
'고작 게임이라니? 그 게임 공략하면 내공비급을 얻을 수도 있는데. 그리고 포인트 두둑하게 벌고 나면 직접 마켓에서 무공비급을 구매할 수 도 있을테고.'
[구원회 이후로 내공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셨는데, 여전히 무공비급을 찾으시는 군요.]
'이걸로 아직 부족하지. PK단 애들이 얼마나 강한데? 난 1:1로 싸우는 걸 염두하는 게 아니야. 나 혼자 전체를 감당해야 할 경우까지 상정하는 거지.'
[그건 주인님이 지금보다 10배는 더 강해져도 어려울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일대 다수로 싸우게 되는 상황을 가정해서 힘을 키워놔야지 않겠어? 놈들은 무조건 팀 단위로 움직인다고 하니까.'
[그렇군요. 저는 주인님이 PK단에 대해선 완전히 잊고 지내시는 줄 알았습니다. 전혀 경계를 안하시길래요.]
'한동안 구원회에만 처박혀 지냈으니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이제 다시 캠퍼스로 돌아온 이상 대비를 해야겠지만.'
호텔에서 나온 도훈은 아까 그 식당으로 돌아가 주차된 차를 찾아와야 했다. 음주운전을 피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바람에 식당 주차장에 차를 방치해 놓고 온 것이다.
'그냥 처음부터 내 차타고 이동할 걸. 어차피 취하지도 않았었는데. 확 차를 버리고 갈수도 없고.'
[주인님 재산이면 그냥 버리고 새걸 사셔도 충분하긴 하죠. 애초에 중고차로 싸게 구매한 것이니까요.]
'아니야. 괜히 눈에 띄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 너무 부자처럼 보이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테니.'
[라고 하기엔 이미 대학생이 혼자 사는 집 치고는 너무 비싼 집에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내 집인 줄은 아무도 모르잖아. 집주인이 외국 나가면서 나에게 집을 관리해 달라고 부탁해 놓은 것으로 설명했으니까.'
[하지만 당장 등기부만 떼어봐도 주인님 실명이 바로 나올텐데요? 등기부는 주소지만 제대로 입력하면 실소유주가 나오는 건 알고 계시죠?]
'다들 대학생들인데 설마 그런데까지 뒷조사 하겠어? 나도 돌이켜보면 대학생 때 혼자 임대차 계약도 못 했는데.'
[그래도 늘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긴 요새 여자들은 하도 약아서, 결혼할 남자 차가 얼마나 비싼 차인지, 살고있는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도 다 따진다곤 하더라.'
[그렇게 까지 하나요?]
'남자들이 워낙에 뻥을 심하게 치니까 말이야. 자가라고 알고 결혼했는데, 나중에 보니 은행 대출만 잔뜩 껴있고 결혼해서 같이 갚자고 하는 놈들도 많다잖아.'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속는군요.]
'그래서 배경이 중요한 거야. 부모님은 무슨 일 하는지, 대학은 어딜 나왔는지, 직장은 탄탄한지. 그런걸 하나하나 다 따지는 것도 결국엔 같은 맥락인 거지.'
[호오. 역시 주인님은 이런 얘기 할 때만큼은 40대라는 걸 숨기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학생 답지 않게 굉장히 현실적이랄까?]
'이미 갔다온 몸인데 그럼, 순진하게 낭만이나 찾고 있을까봐?'
로시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주차장에 도착한 도훈은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는 꽤 거리가 멀었지만, 새벽이 넘어선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근처 담벼락에 주차를 마친 도훈이 집에 들어가기 위해 현관문앞에 서 있다가 멈칫했다.
'···뭐지?'
[왜 그러십니까?]
'저기 50M 떨어져 주차된 차 보여?'
[네.]
'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데?'
[그게 왜요?]
'생각해봐. 새벽 1시가 다 됐는데,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가만히 차에 탄 채 이쪽을 향해 보고 있잖아. 그것도 두 사람이나.'
[너무 멀어서 잘 안보이는데, 언제 또 보셨습니까?]
'내 시력이면 100m 밖에 떨어진 포켓볼에 적힌 숫자도 확인가능하다고. 흐음,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모두 두 사람이군. 운전석과 보조석에 각각 앉아있고.'
[그냥 차에 앉아서 얘기하는 거 아닙니까?]
도훈도 처음엔 그런 생각을 했다.
야심한 시각 남녀가 차에서 데이트를 하는 경우는 흔한 광경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미동도 없이 도훈의 주택 주변에 주차를 해두고 차에 앉아 있기만 했다. 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도 상갓집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새까만 정장이었다. 남자야 그렇게 입을 수 있다고 쳐도, 여자가 입기엔 너무나 어색했다.
'데이트라기엔 너무 조용해서 말이야. 복장도 수상하고'
[설마 대화를 엿들은 겁니까?]
'아니. 아직 따로 들은 건 없어.'
[네?]
'말을 전혀 안하고 있거든.'
[흐음, 확실히 수상하군요. 차에 앉아 가만히 주인님을 지켜만 본다는 말이죠?]
'혹시 PK단의 끄나풀이라도 붙은 걸까?'
[아직은 모릅니다. 다만 주인님이 현관문 앞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계속 서 있는 게 더 이상해 보일것 같습니다. 감시자들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걸 알게되면 바로 도망쳐버릴테니까요.]
'그렇겠군. 일단 집에 들어가서 생각해보자.' 도훈은 현관문을 열고 평소처럼 들어갔다.
하지만 귀는 여전히 쫑긋 세운 채 차안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에 집중했다.
원래라면 주변의 소음에 묻혀 거의 안 들릴 정도였지만, 새벽 시간이나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차문 사이로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소리를 도훈은 놓치지 않았다.
-···새벽 1시 경 귀가 확인 했습니다. 소등 시간 기준으로 취침 여부 판단하겠습니다.
-···정밀 밀착 감시는 기상 후부터 속개합니다. 네. 자는 걸 확인하면 교대로 취침하겠습니다.
'뭐야? 이것들 진짜 날 감시하고 있잖아?'
[어엇? 정말입니까? 설마 진짜 PK단일까요?]
'이런 젠장. 어떻게 된 거지? 어쩌다 우리 집이 노출된 거야?'
도훈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감시자들을 때려눕히고 놈들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가 놈들의 매복에 걸릴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 신중하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보고하는 중이야. 놈들에게 지시한 상관이 있어.'
[무척 곤란하게 되었군요. 정말로 주인님의 주거지가 PK단에 노출되었다면 여기 계속 계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