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70화 (1,950/2,000)

1970. ex wife-45-

* * *

"회장님. 이번 달 모임 장소 섭외 완료되었습니다."

"어디라고 했지, 지실장? 삼척에 있는 호텔?"

"네. 맞습니다. 호텔 전체를 이틀 빌리는 조건으로 계약했습니다. 총 금액은…."

서재에 앉아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희재가 지실장의 말을 끊었다.

"금액에 대해선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 그쪽에서 자꾸 호텔 관리 직원들 유급 휴가비까지 저희 쪽에서 부담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서…."

"됐어. 그래봐야 몇 푼이나 한다고? 지실장 지금 이 숫자 보여?"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지실장이 머리를 빼곰 내밀어 모니터에 떠오른 트레이드 화면을 쳐다보았다. 공연 기획 전시쪽에서만 커리 어를 쌓았던 지 실장으로서는 온통 영어와 숫자 그래프로만 채워진 화면이 한번에 이해가 될 리 없었다.

"글쎄, 전 이런 쪽은 문외한이라 잘…."

"잘 지켜보라고. 여기서 2%로만 오르면 바로 빼야 하니까."

"…예?"

그래프는 지진파처럼 위아래로 초 단위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방향을 잡더니 파바박 무섭게 치고 오르기 시작했다.

"어? 움직입니다. 계속 올라가는데요?"

"아직 조금 남았어."

"지금 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1.8, 아니 1.9%!"

"호들갑 떨지마. 진작 프로그램으로 자동 매매 걸어 놨으니까.

난 그냥 프로그램에 오류가 있는지 모니터링만 하는 중이야."

"아하."

본인 말처럼 희재는 손가락도 까딱 않고 있었다.

이윽고 그래프가 상단을 돌파하며 2%에 이르자 누군가 컴퓨터를 원격 조정을 하는 것처럼 여러개의 창이 동시에 뜨더니 순식간에 매도에 들어갔다.

여러 계좌에서 동시에 매도 주문이 이어지자 컴퓨터 화면에서 무려 16개나 되는 거래창이 쉴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지실장이 숨죽인 채 화면을 보고 있는데, 희재는 여유 있게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난 완벽하단 말이야. 시간 차를 고려해 일시에 물량을 집어 던지는데 성공했어. 이 정도면 거의 순식간에 털고 나왔다고 봐야지."

"성공하신 겁니까?"

"응. 지실장. 내가 방금 거래로 얼마의 차익을 남겼을 것 같나?"

"네?"

지실장이 검은 뿔테를 위로 들어 올렸다.

"음, 2%를 먹고 빠지셨으니까…. 대충…. 이천만?"

"좀 더 써보라고. 날 그렇게 담이 작은 사람으로 보는 거야?"

"설마 이억입니까?"

"그것도 너무 약한데. 그건 자네 연봉보다 적잖아. 연봉 더 올려줘?"

"으, 음…. 죄송합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볼 줄 몰라 주식에도 일절 손을 안 대는터라."

"200억이야."

"예, 예?"

"말했잖아. 눈 깜짝할 사이에 200억 먹고 나왔다고. 수수료 떼고 이것저것 환차손 계산해도 최소 180억은 벌었을 걸. 방금 지실장이 보는 사이에 말이야."

"마, 말도 안 되는…."

희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호텔 계약해서 얼마가 들었으니 어쨌느니 그런 말은 내 앞에서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푼돈 걱정하면서 신경쓰느니, 그냥 하룻밤만에 200억씩 버는게 더 이득이니까. 내 말 알아들었지?"

"회,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별것도 아닌 일로…."

"아니야. 지 실장이야 공연 기획 분야에선 업계 탑 급이었잖아.

내가 지 실장 아니면 어떻게 로얄 클럽 모임을 이렇게 편하게 운영할 수 있겠어."

"네, 회장님. 믿고 맡겨 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뭐, 지 실장도 그쪽 분야로는 관심이 많으니까 말이야."

희재가 그 말을 함녀서 은근슬쩍 지실장의 허벅지 안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치마를 입고 있던 지실장이 순간 경직된 표정으로 몸이 굳고 말았다. 검은 뿔테와 유난히 비교되는 새하얀 얼굴에 살짝 홍조가 떠올랐다.

"회, 회장님."

"아, 미안. 내가 사내 연애는 금지라고 했었지? 특히 업무 중에 는"

"아, 아닙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괜찮아. 긴장이 풀려서 장난 좀 친 거야. 아무튼 내일까지 참가 회원 명단 정리해서 보고해놔. 마침 위치도 강원도라고 하니 기회에 출석이 불성실한 회원들 싹 다 한 번 정리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알겠습니다. 철저히 준비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가보라고. 난 방금 큰 건을 해결해서 잠깐 쉬어야 할 것 같으니까. 프로그램에 조금만 오차가 났어도 몇십억은 날렸을 거야. 보고만 있어도 기빨린다니까?"

지실장이 족므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희재의 서재에서 물러났다.

희재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서재를 나서는 지실장의 뒤태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하여간 재밌는 여자라니까? 나한테 한 번 대주고 싶어서 안달난 게 눈에 보일 정도니. 쯧쯧."

혼잣말을 중얼거린 희재는 별다른 대꾸가 없자 다시 천장의 카메라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뭐야. 방금 다 봐놓고 못 본 척하는 거야?"

"……."

"그래 뭐.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게 경호원들 철칙이라지? 아주 잘하고 있어."

"……."

"참나, 내가 벽이랑 얘기를 하고 말지. 심심한데 애들이나 부를까? 생각보다 거래가 일찍 끝났는데."

희재가 손목에 찬 명품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녁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새벽녘에나 시작될 줄 알았던 작전이, 상황 변동으로 훨씬 이르게 진행되었고 이후 희재의 스케줄이 텅 비게 되었다.

희재는 민희와 나린을 부를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멈추었다.

"에이, 아니다. 걔들 불러봐야 또 집에서 자고 간다고 난리 부르스를 칠게 뻔한데…. 어젯밤 신입 회원이랑 화끈하게 물 한 번 빼고 났더니 별로 당기지도 않고."

희재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폴더블 핸드폰을 닫는데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응? 누구지?"

-민하 : 회장님. 바쁘신 일 끝나시면 새벽에라도 연락 한번 주시겠어요?

"민하가 무슨 일이지?"

민하는 평소에도 연락을 먼저 안 하는 편이었다. 늘 얌전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상냥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반면 나린은 하도 귀찮게 하고 말이 많아서 되도록 말을 안 섞는 편이었다. 둘의 성격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나린이도 아니고 민하가 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얘네들 또 사고 쳤나?"

희재가 곧바로 민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민하니? 방금 문자 봤어. 무슨 일인데?"

-아…. 오늘 작업하신다고 연락 안 드릴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아냐. 막 끝났어. 통화해도 괜찮아."

-이번 주 클럽 정기 모임 있잖아요.

"어. 내일 모래. 안 그래도 지 실장이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더라고. 그건 왜?"

-혹시 괜찮으시면 모임에 남자 회원 한 명만 추천해도 될지.

"민하 네가 추천을?"

-네.

통화를 하던 희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가끔 추천권을 가진 정회원을 통해 신규 회원 추천이 있긴 했지만, 민하가 누군가를 추천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남자 회원을.

"누군데? 아니 그보단 웬일이래? 민하 네가 추천을 다하고."

-음, 혹시 저번 카지노에서 봤던 남자애 기억나세요?

"카지노? 아아, 그 싸가지 밥말아 먹은?"

-네. 제가 그때 명함을 건넸는 데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랬어? 우리 클럽이 무슨 일을 하는 지는 알고?"

-네, 대충은요. 제가 설명했어요.

"정기 모임이 이틀밖에 남았는데, 지금 가입이라…. 검증 시간이 너무 촉박할 것 같은데, 차라리 다음번 모임 때 받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지실장이 최종 명단 확인해 봐야겠지만, 남자쪽은 이미 풀일 텐데."

-저, 어떻게 안 될까요, 회장님?

자신에게 청탁하는 민하의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에 희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맨날 징징대는 나린과 달리, 민하는 절대 아쉬운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민하가 나에게 부탁을 다 하고.'

"그렇게 마음에 드는 친구야? 정기 모임 나가면 발에 채이는 게 사내새낀데도?"

-…….

"알았다고. 대답하기 곤란한 모양이네. 다른 사람도 아닌 민하부탁이니까 내가 들어줘야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오늘은 일 끝나서 피곤하니까 내일 점심 이후에나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기다리고 있겠다고."

-네, 전달하겠습니다.

그때 뭔가 직감이 든 희재가 민하에게 물었다.

"근데 민하 너, 진짜 그 남자애한테 관심 있는 거?"

-아, 아니 그게….

"푸하하하하. 아니야. 괜찮아. 대답 안 해도. 내가 질투할 것도 아니고. 암튼 그 친구 이름이랑 주민 번호 하나만 문자로 남겨놓으라고."

-네, 회장님.

통화를 마친 희재가 다시 껄껄거리며 웃었다.

"푸하하. 남자들에게 그렇게 차갑게 굴던 애가 남자한테 푹 빠지기도 하는구나. 신기하네."

민하는 겉보기엔 청순하고 순해 보이지만, 남자 보는 눈이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실제로 모임에서도 그녀에게 간택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선 남자들이 많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사내에겐 단 한 번도 초이스를 해준 적이 없었다.

심지어 겨우 허락을 했더라도, 한 번 마음에 안 들면 두 번 다시 합방을 하지 않는 주의였다. 이 때문에 누구에게나 허용적인 나린에 비해서 무척이나 차갑고 도도하다는 평을 받곤 했다.

'신기하네. 하긴 그때 카지노에서도 자기가 먼저 들이대긴 했었지? 민하가 나쁜 남자 취향이었군!'

희재는 당시 시건방진 태도로 일관하던 도훈의 모습을 떠올렸다. 굳이 시비를 붙지 않는 주의라 무시하고 넘어갔지만, 자신이 그때 손가락 하나만 까딱했어도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도훈을 묵사발을 낼 수도 있었다.

'흐흐흐. 우리 클럽에 대해 알고 나면 혹하긴 하겠지. 일단 결격사유가 없는 지부터 확인해 봐야겠군.'

잠시 후 민하에게서 도훈의 신상 정보가 넘어왔다.

"이름은 이도훈. 23살이라고? 생각보다 엄청 어리구나. 이제 겨우 대학생이면."

이름과 주민번호만 알면 희재는 10분 안에 해당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을 추적할 수 있었다. 몇 가지 해킹 프로그램을 이용해 빠르게 정보를 취합한 희재는 전산상에 남아있는 도훈의 기록을 모니터에 띄웠다.

"국성대학교 체육교육학과 2학년이야? 얼씨구. 아버지가 엄청 유명한 소설가였네? 나도 이름 한 번 들어봤는데."

도훈의 인적 사항을 꼼꼼히 확인한 희재는 뭔가 수상한 점을 느꼈다.

"…이상한데? 왜 계좌에 잔고가…."

도훈의 계좌는 용돈 받는 대학생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100만 원도 안되는 돈이 이리저리 계좌에 흩어져 있었다. 신용카드 사용 내역도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 보면 용돈도 거의 안 받는 수준으로 살고 있었다. 그나마 올초에 편의점 월급조로 받은 금액이 전부였다.

"대체 무슨 돈으로 서울에 등기를 친 거지?"

가장 수상했던 점은 도훈 소유로 되어있는 부동산. 국성대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단독주택을 본인 소유로 가지고 있었다.

"설마 잘나가는 소설가 아버지가 물려준 건가?"

등기부등본 및 부동산 매매기록까지 모두 확인했지만, 주택 구입에 대한 자금 출처나 이력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대출을 한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별도로 송금을 한 기록도 없는데 매매계약이 이루어 졌다라…. 그럼 현금 박치기로 집을 샀다는 말이야? 억 단위의 단독주택을?"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애초 카지노VIP룸에 들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중에 돈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왔다. 그 말인 즉 슨, 모든 자금을 현금으로 보유 중이거나 차명계좌를 사용한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신기하네. 평범한 대학생 놈이 무슨 재주로…."

그때 검색 기록에 또 다른 내용이 하나 떠올랐다. 단신으로 나온 대학 신문 기사의 내용이었는데, '국성대' '이도훈'이라는 키워 드 검색에 걸린 것이었다.

"와우, 몸은 또 뭐야?"

대학 신문에 적힌 기사에는 미스터 국성 피지크 종목 우승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대회 우승 당시의 사진과 짤막한 인터뷰가 적혀 있었다.

"대단한데? 체육교육과라서 그런가. 몸이 무슨 보디빌더 저리 가라네. 나이도 어린놈의 자슥이."

이런저런 정보를 취합한 희재는 도훈에 흥미가 돋았다.

얼마 전 신규 회원으로 받은 최지안과 또 다른 측면에서 호기심이 생기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금융기록도 거의 없는 현역 대학생 몸짱이 현금을 잔뜩 들고 있다라고? 이 새낀 대체 뭐지? 대체 무슨 수로 이만한 돈을 번 거야?"

탁자를 손가락으로 까딱거리던 희재가 서재 천장에 달린 CCT V를 향해 말했다.

"잠깐 내 방으로 와봐. 뒷조사 좀 맡겨야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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