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 ex wife-39-
* * *
"니들 지금 내 앞에서 뭐하냐?"
버럭 짜증을 내자 두 사람이 움찔 놀라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것들은 지금 누가 갑인지 여전히 모르는 모양이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바보들에게, 다시 천천히 설명해 주는 수밖에.
"야, 짜증나니까 그냥 내 눈앞에서 짜져."
"아, 아니 도훈아 나는···."
"꺼지라고! 사람 앞에 세워 두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자, 나린이 민하를 밀쳐내며 내쪽으로 붙었다.
"미안해. 민하 쟤가 괜히 질척거려서. 그냥 우리끼리 가."
"뭐, 뭐라고?"
난데없이 질척녀가 되어버린 민하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린은 이미 민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희재 오빠한테 꼰지르든지 말든 네 마음대로 해. 난 도훈이랑 갈 테니까."
나린은 그 말을 끝으로 나에게 깊숙이 팔짱을 끼우며 차도로 이끌었다.
홀로 남겨진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점점 멀어져가는 우리 둘만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나 역시 민하에겐 시선조차 안 주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민하양은 그냥 버리시는 건가요?]
'그럴리가 있나.'
[그치만 이대로 버려두고 가버리면 민하양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할 것 같은데요.]
'아니. 절대로 포기 안할 걸?'
[네? 어떻게 아십니까?]
'민하가 추하게 질척거리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어?'
[희재인가 뭔가하는 고용주의 호출 때문 아닙니까?]
'그것도 다 핑계지. 지금 민하 심보는 딱 그거야. 자기가 못 먹으면 나린이도 똑같이 못 먹게 하려는 일종의 물귀신 작전이랄까?'
[아하!]
'근데 나린이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 나가버리니까, 당황해서 벙찐 거야.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고 봐야지.'
[하지만 정말로 민하양이 희재라는 사람에게 꼰지르기라도 하면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희재는 그닥 신경쓰지 않을 걸?'
[그걸 주인님이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사실 난 어제 도박장에서 볼 때부터 수상하다고 생각했거든.'
[네? 뭐가요?]
'기억나? 희재라는 놈은 단지 자기 옆에 병풍처럼 세워두고 노닥거릴 목적으로 하룻밤에 천만원짜리 게임 좌석을 샀던 놈이잖아.'
[그렇죠.]
'영화관에서 양 옆에 사람 같이 앉는 거 싫다고 세 자리를 동시에 예매해도 미친 놈인가 싶을 텐데, 단지 심심하다는 이유로 들러리 세울 목적으로 하룻밤에 이천만원을 태워버리는 놈이야. 일반적인 사람하고 차원이 다르다는 거지.'
[단지 그게 근거라고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요?]
'그 놈은 민하와 나린에 대한 소유욕 같은 게 전혀 보이질 않았어. 실제로 게임을 하던 중에 나에게 약간 관심을 보였을 뿐. 너희재라는 놈이 민하나 나린하고 한번이라도 스킨십하는 거 본 적있어?'
[아뇨. 그냥 대화만 하더군요.]
'게다가 민하가 어제 대놓고 나한테 들이댔잖아. 흡연실로 가서 단둘이 얘기도 하고.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희재라는 놈이 지켜만 봤지.'
[아···! 그렇군요.]
'희재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꼬신다고 해도 신경도 안 쓰는 놈이라는 거야.'
[세상에···. 정말로 두 사람이 비서일 뿐일까요? 그냥 24시간 아무때나 불러낸다는 이유가 단순히 심심할 때 말동무를 삼으려는 거라고요?]
'나도 정확한 사정까진 모르겠어. 말동무인지, 아니면 그냥 클럽 회원들에 대한 후원금 성격인지. 다만 확실한건 희재는 이 여자들에게 별다른 애정이나 소유욕 같은 게 전혀 없었어. 그게 아니면···.'
[아니면?]
'자기 여자를 다른 남자한테 돌리면서 쾌감을 느끼는 네토라레취향의 변태라는 결론밖에 없지.'
[억!]
'돈이 너무 많아도 인생이 심심해 미친다잖아. 뭘로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희재라는 놈은 확실히 정상처럼 보이진 않더라고. 그리고 민하 정보창에서도 나왔었잖아.'
[어떤 내용이요?]
'그녀가 난교 클럽에서 다른 파트너와 실컷 즐기고 있다고 말이야. 그 난교 클럽 회장이 바로 희재라는 놈이고.'
[그렇군요. 민하양을 자기 애인이나 섹파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그럴리가 없겠죠.]
'맞아. 그래서 결론은 높은 확률로 둘 중 하나야. 희재라는 놈은 자기 여자를 NTR 시키는 진성 변태거나, 혹은 정말로 애정이라곤 1도 없이 옆에 데리고만 있을 뿐이라는 거. 둘 중 뭐든 민하나 나린이 다른 놈을 만나 떡을치든 살림을 차리든 관심도 없다는 거겠지.'
[아···. 그럼 민하양은 왜 그런 경고를 했던 걸까요?]
'그래서 말했잖아. 민하는 그냥 나린이 나를 독차지하는 게 싫어서 되지도 않는 핑계로 딴지를 건 것 이라고. 지금 그녀에겐 나에게 버림받은 것보다, 나린과의 대결에서 밀렸다는 게 가장 쓰라릴 걸.'
[호오.]
'그래서 장담한 거야. 민하는 어차피 우리 쪽으로 붙게 되어 있어. 자존심을 죽이고 숙이고 들어가는 게 그나마 역전의 기회가 있다는 걸 곧 깨달을 테니.'
[역시 주인님의 상황 판단력은···. 어엇? 근데 언제 이렇게 똑똑해 지셨습니까?]
'나 이제 아이큐 100 넘는다.'
[그렇군요. 대물도 20이 되셨고요.]
'신께선 나에게 300을 주셨지만, 스스로 더 총합을 높이고 있다고 봐야지.'
[키는 더 안늘리십니까?]
'190까진 좀 징그럽지 않냐? 너무 커도 일상 생활이 불편할 것 같은데.'
[아하.]
"바로 택시 잡을게. 둘 다 술마셔서 운전 힘들거 아니야."
"마음대로 해."
나린과 둘이 차도에 붙어 지나가는 택시를 잡고 서 있는데, 절대 안 따라올 것 같았던 민하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나린이 어이없다는 듯 민하에게 따져 물었다.
"넌 또 왜 따라와?"
"혹시 희재 오빠가 호출이라도 하면 네가 어디 있는 지는 알아야 바로 데려갈 거 아니야?"
"참나. 계집애 끝까지 진짜."
"······."
그때 택시가 잡히자 나린과 내가 뒷좌석에 타는 사이, 민하가 보조석에 재빨리 탑승했다.
"아저씨, 여기서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가주세요."
"네, 손님."
나린은 보조석에 앉아 있는 민하를 보고 빈정거렸다.
"왜? 그냥 희재 오빠한테 쪼르르 일러바치지? 당장 연락 안하고 뭐한대?"
"오늘은 바쁘다고 했어. 먼저 연락하는 거 싫어할 거야."
"끝까지 비겁하긴."
"분명히 말하지만 네 행선지를 알아야해서 동승한 것 뿐이야.
오해는 말아줘."
"아예 방도 같이 잡지 그러니? 옆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희재 오빠 연락오면 같이 튀어 가면 되겠네."
"······."
여자 둘이서 음담패설로 신경전을 벌이자, 운전 기사가 머쓱한 지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나 또한 둘의 말다툼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 첨언하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괜히 자존심을 굽히고 따라온 민하를 자극했다가, 그녀가 아예 빠져버리면 포인트만 날리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나린양도 나린양이지만, 민하양도 대단하군요.]
'뭐가?'
[결국 주인님 예상대로 호텔까지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두분이서 뭐하러 가는 지 뻔히 알텐데 말입니다.]
'아마 처음은 아닐걸?'
[네?]
'쟤들 뭐하는 애들인지 벌써 잊었어? 무려 난교 클럽 정회원들이라고.'
[그렇죠.]
'자기들끼리 스리섬도 안 해봤을까봐? 아마 둘 중 하나가 홀딱벗고 옆에서 떡치고 있어도 별로 놀라지도 않을 걸?'
[역시 변녀들이군요.]
'일단 한 번 지켜보자고. 나야 일타 이피로 포인트만 획득해도 이득이니까.'
[포인트가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셈이군요.]
'그렇지. 손 안대고 코 푼다는 게 이런 걸까?' 곧 택시가 인근 호텔로 도착했다. 보조석에 앉은 민하가 요금을 계산하는 사이 나린이 나를 이끌고 호텔 로비로 향했다.
그녀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더니 곧바로 최고급 스위트룸을 숙박으로 잡았다. 비용이 상당할텐데 전혀 신경도 안쓰는 걸 보면, 두 사람의 씀씀이가 얼마나 헤픈지 알 수 있었다.
하긴 한 끼 식사로 20만원 짜리 오마카세로 외식하는 이들에게 3만원짜리 모텔 따위는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겠지만.
이쯤되니, 이들의 물주라는 희재에게 살짝 흥미가 생겼다.
대체 무슨 돈으로 이런 여자들에게 거액의 연봉을 지급하는 걸까?
'희재라는 새끼, 좀 구린것 같지 않아?'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들어보니 직업이 프로그래머라며? 난 또 재벌 3세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어쨌든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거잖아.'
[그게 왜요?]
'그만큼 큰 돈을 번 사람이면 한 번쯤 뉴스에서라도 등장했어야 싶은 게 아닌가 해서.'
[그런가요?]
'원래 돈을 잘 버는 사람에겐 유명세라는 세금이 따라 붙기 마련이거든.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은 말할 것도 없고, 유명 스포츠 스타나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들도 잘나가면 매스컴에 얼굴이 팔리기 마련이지.'
[그렇죠.]
'근데 난 김희재라는 사람은 생전 처음 봤거든. 마치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찐부자랍시고 툭 튀어나온 꼴이잖아.'
[어쩌면 그의 직업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요?]
'직업?'
[프로그래밍 개발자라든가, 혹은 저작권으로 먹고사는 작가나 작곡가들 계열은 얼굴을 알리지 않고 익명으로 활동해도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럴수도 있는데 우리나라 개발자 중에서 그만큼 큰 돈을 번 사람이 있었다고?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불가능한 거 아니죠.]
'일런 머스크처럼 유망한 it기반 사업체라도 만들어서 털고 나왔으면 그럴 순 있겠군.'
[일런 머스크요? 테슬라와 스페이스x의 그 일런 머스크?]
'왜? 혹시 그 사람도 플레이어야?'
[흠흠,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씨발, 어쩐지 정상처럼은 안 보인다고 했더니.'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럴 땐 묵비권이 오히려 혐의를 짙게 만드는 거 알지?'
"이쪽이야."
나린이 계속 팔짱을 끼운 채 나를 호텔방으로 이끌었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택시비를 계산하고 뒤따라온 민하 역시 호텔 카운터에서 방을 잡는 게 보였다.
[민하양은 따로 방을 잡는 건가요?]
'그렇겠지. 숙박시설은 혼숙이 불가능하니까.'
[아, 그렇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오르려는데, 문이 닫히기 직전 민하가 급히 팔을 밀어 넣으며 겨우 탑승했다.
"쳇. 찰거머리처럼 따라 붙긴."
"옆 방이라 같이 탄 것 뿐이야."
"방은 왜 또 따로 잡아? 어차피 기다릴거면 우리 방으로 오지.
내가 좋은 구경 시켜줄게."
두 사람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합방을 얘기하자 듣고 있던 내가 불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근데 너희들 원래 그런 사이야?"
"응? 뭐?"
"아니, 아까부터 자꾸 합방이니 어쩌고, 옆에서 관전하라느니 ···. 혹시 원래부터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냐고."
나의 물음에 나린이 항변하듯 말했다.
"아, 기분 나빴으면 미안. 원래 둘이 자주 붙어다니다보니."
"붙어 다니면 붙어 다니는 거지, 잠자리까지 서로 따라다닌다고? 너희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흠, 그게 그러니까···."
"니들 스리섬도 해봤지?"
호텔 방까지 올라온 이상 어차피 물러설 데는 없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답해봐. 맞아 아니야?"
"······."
나의 추궁에 민하는 고개를 푹 숙였고, 나린도 난처한 표정으로 손부채를 흔들며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괜찮아. 나도 솔직히 그닥 순진한 타입은 아니거든."
"정말? 다행이다. 난 도훈이 네가 어려서 거부감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내가 어리다니? 너랑 몇살 차이 난다고."
"그래도···."
"난 상관없어 뭐든."
"뭐든 이라니?"
"기왕 호텔까지 같이 왔는데, 한 사람은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심심하잖아. 민하 너도 생각있으면 우리랑 같이 낄래?"
나의 제안에 잠자코 있던 민하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하니 내 쪽에서 먼저 스리섬을 제안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계속 툴툴거리며 관심없는 척 했으니 당연히 내가 완전히 나 린 쪽으로 기울었다고 착각했을 법도 했다.
민하가 뭐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린이 강하게 반발했다.
"뭐, 뭐야? 갑자기. 나랑 하러 온 거잖아. 민하 쟤는 왜 갑자기 끌어들여?"
"니가 먼저 얘기 꺼냈잖아. 생각해보니 셋이 같이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시, 싫어! 내가 먼저 말했잖아. 나랑해."
"그래. 너랑도 하고, 민하 누나도 같이 하고. 왜? 너희들 경험있다며?"
"아니 그래도 이건···."
나린은 억울할만 했다.
적극적으로 나에게 추파를 던진것도 그녀였고, 자존심을 굽히고 호텔로 가자고 조른 것도 그녀였다. 한데 정작 결실을 맺을 시기가 되자, 쪼르르 따라온 민하가 별다른 노력도 없이 공떡을 치게 생긴 꼴이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민하가 나에게 물었다.
"도훈이 넌 우리 둘중 누구랑 먼저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