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 ex wife-38-
[주인님의 의도대로 둘이 마침내 제대로 한 판 붙었군요.]
'충분히 예상했던 바야. 꼭 이런 예감은 벗어나질 않더라니까?'
[다 큰 어른이 멀쩡히 있는 어린 아가씨들 이간질해 싸움이나 붙이고···. 생각대로 전개되서 좋으십니까?]
'너무 비난 말라고. 난 그냥 한 스푼 얹었을 뿐이니까.'
[한스푼이라뇨?]
'저 둘의 감정은, 내가 의도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왔던 것이야. 넘치기 직전의 컵에 물 한 스푼 얹었을 뿐.
결국 언젠간 터질 싸움이었다고 봐야지.'
[거참···. 말이라도 못하면.]
'결국 이것도 공략을 위한 방편이라고. 사실 질투를 유발시켜 매력도를 높이는 건 원래 여자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잖아. 거짓말도 남자보다 천연덕스럽게 잘하고.'
[여자들이요? 주인님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가 아니고요?]
'물론 그럴수도 있지만 옛날부터 여자들의 거짓말에 대해 지적하는 현자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구체적으로 누가 말입니까?]
'철학자 쇼펜하우어 형님께서 그랬지. 오징어는 적을 물리치거나 적에게서 달아나기 위해서 검은 먹물을 뿌려, 물을 흐리게 만든다고. 여자도 이 동물과 비슷하댔어. 오징어처럼 여자도 거짓으로 온 몸을 감싸며, 거짓말 속에서 편안히 헤엄친다던가?'
[그 양반은, 여자는 꾀가 많지만 항상 주관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천재란 나올 수 없다고 주장하던 대표적인 여성혐오 염세주의자 아니었습니까? 너무나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입니다. 그리고 양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200년 전 사람이기도 하고요.]
'꼭 쇼펜하우어만 그런것도 아냐. 현대 무협작가 김용이라고 알아?'
[김용요?]
'어. 엄청 유명한 작가야. 무협이란 장르의 뼈대를 만들었대도 과언이 아니지. 판타지에 톨킨이 있다면, 무협엔 김용이 있달까?'
[그게 왜요?]
'암튼, 그 양반이 쓴 영웅문 3부작 중 마지막 시리즈가 의천도 룡기라는 작품이거든. 하긴 작가 이름도 모르는데, 소설 내용에 대해선 알 턱이 없구나.'
[모릅니다. 하지만 해당 소설의 줄거리 쯤은 검색으로 충분히 답변가능합니다. 온라인상으로 올라온 내용을 짜깁기한다면 말이 죠.]
'엥? 그래?'
[제 언어구사가 너무 자연스러워 주인님이 까먹으셨나 본데, 저는 천상계의 기술력이 집약된 최첨단 인공지능입니다. 인간은 최근 들어서야 개발한 챗gpt같은 원시적인 수준의 인공지능을 만들었지만, 제 입장에서 그건 유치원생 수준의 말장난으로 보일 정도랄까.]
'그래 니 똥 굵다.'
[어디 주인님만 할까요.]
'암튼 내가 하려는 건 그 얘기가 아니라, 그 소설 주인공이 장무기인데, 장무기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그의 앞에서 자결하면서 유언을 하나 남기거든. 그게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무슨 유언이죠?]
'엄마처럼 예쁜 여자는 속임수를 잘 쓰니까 절대 믿지 말라고.'
[네? 그게 무슨···. 아하, 소설 내용을 알고나니 이해가 되는군요. 실제론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면서 공문대사에게 속삭이는 척 귓속말로 속임수를 써서 이후 소림사를 10년간 곤욕을 치르게 만들었군요.]
'그렇지. 굳이 철학자의 금언이나, 유명 소설의 대목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거짓말에 능하고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데 더 빼어나다는 건 이미 경험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닐까?'
[제가 볼때 주인님의 뿌리깊은 여성불신과 혐오는 어쩌면 정신적인 상흔의 흔적일 수도 있습니다.]
'뭐래? 왜 갑자기 나를 정신병자로 모는데?'
[흥분하지 마시고 잘 들어 보십시오. 주인님도 어쩌면 피해자니까요.]
'내가 뭘?'
[주인님이 유독 여성에 대해 강한 혐오감정을 드러내는 건, 전생에 살인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 일수도 있다는 겁니다.]
'음···.'
[믿었던 마누라에게 배신 당한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기고, 심지어 유일하게 남은 혈육마저 본인의 친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주인님을 지금 같은 여성혐오주의자로 만들었을 수 있다는 것이죠.]
'···쓸데없이 그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 거야?'
[주인님도 알겠지만 모든 여자들이 전생의 와이프분 처럼 악독하거나 속임수에 능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여자들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꼭 여자라서가 아니라, 남자도 얼마든지 나쁘고 사악한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요.]
'무슨 말하는 지 알겠는데, 난 로시 너에게 내 정신과적 상담을 요청한 적 없다고.'
[저는 주인님의 지나친 편견이 혹시나 차후에···.]
'그만해. 다 알아 들었으니까.' 도훈은 기분이 나빠져 로시의 말을 뚝 끊었다.
'내가 정신병자라는 거야 뭐야? 뭐? 여성혐오의 원인이 전생의 배신 때문이라고? 하-.'
도훈은 괜히 정신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지적받자 기분이 확 상했지만, 곰곰이 따지고보면 로시의 진단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상처 때문인지 여자들을 하나로 싸잡아 낮추어 보는 태도는 분명 건강하지 못한 부작용이었다. 도훈도 그걸 알고 있었고, 조심하려고 했지만 나린이나 민하같은 여자들을 볼때마다 그런 생각이 강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훈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한 번 불이 붙은 민하와 나 린은 도훈을 가운데 두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너 진짜 말 다했어?"
"왜? 더 해줄까? 누구 앞에서 순진한 척이야? 남자랑 단둘이 있으면 아주 사족을 못 쓰는 변녀 주제에."
"야! 이나린!"
"뭐, 조민하. 오늘 진짜로 한 판 붙어 볼래? 어차피 희재 오빠도 없는데, 눈치 볼 필요 없잖아?"
팔을 걷어 붙이며 핏대를 세우는 나린을 보자 슬슬 식당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오마카세 가게라 소수의 손님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가게 안의 모든 손님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진짜 큰 싸움 나겠군.'
[주인님이 부추겼으니 얼른 뜯어 말리십시오.]
'안 그래도 나서려고 했어.'
"잠깐만. 밥 먹다 말고 뭐하는 거야. 둘다?"
"지금 밥이 중요해 저 년이 나를!"
"저 년? 야, 너 나와. 너 진짜 말로 해선 안 되겠다."
"···적당히 하라니까?"
도훈이 은은한 살기를 뿜어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자 갑자기 서늘한 기운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여자들의 말다툼을 쳐다보던 손님들도 도훈의 눈빛에 감히 마주칠 엄두도 못내고 곧바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만큼 도훈이 내뿜는 기도는 일반인이 받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패도적인 기세가 있었다.
"도, 도훈아···."
"아니, 난···."
"뭐하는 거냐고 이게. 쪽팔려서 같이 밥도 못 먹겠네. 난 빠질 테니까 둘이 치고 받고 싸우든가 마음대로 해."
도훈은 버럭 성을 내더니 현금을 꺼내 계산을 치렀다.
5만원권 스무장이 넘는 거금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일행들이 소란을 피워서 더 식사를 못 하겠네요. 여기 두 사람 것까지 지불하고 먼저 일어날게요."
"저, 손님. 이건 좀 많은것 같은데···."
여자 셰프는 100만원도 넘는 현금에 당황하며 거슬러주려 했지만, 도훈은 괘념치 말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괜히 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도훈이 자신들의 음식값까지 계산을 해놓고 먼저 나가버리자 갑자기 도훈을 사이에 두고 싸우던 민하와 나린은 닭쫓던 개가 된 신세였다. 결국 도훈을 두고 경쟁하느라 벌어진 싸움인데, 그가 먼저 빠져버리니 갑자기 김이 팍 샌 것이었다.
"아, 아니 이게···."
"너 나중에 따로 얘기해. 난 먼저 가볼게."
이대로 도훈을 놓치기 싫었던 나린이 외투를 챙겨들고 곧바로 도훈을 뒤따랐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조바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에. 방금 화낼 때 카리스마 쩔었어. 어린앤 줄 알았는데, 완전 터프한 스타일이었다니!'
놀랍게도 나린은 도훈이 박력있게 화내는 모습에서 진한 남성미를 느껴버린 것이었다. 그녀는 유독 나쁜 남자 스타일에 깊이 빠지는 편이었는데, 방금 도훈이 옅은 살기를 뿌리는 장면에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움찔 놀란 것이었다.
그녀는 그 긴장을 두근거림으로 착각하고 급히 도훈을 쫓았다.
가게를 뛰쳐나가 앞으로 가다보니 도훈이 모퉁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도, 도훈아. 잠깐만."
"뭐야?"
"아니, 그렇게 먼저 나가면 어떻게 해?"
"······."
도훈은 말 없이 담배 연기만 내뿜을 뿐이었다.
밤거리에 서서 멋지게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양아치같은 모습에서, 나린은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녀가 찾던 나쁜 남자의 전형이 바로 거기 서 있었다.
왠지 자신을 하찮게 대할 것 같고, 멋대로 굴 것 같은 사내였다.
'하아···. 희재 오빠에게선 전혀 느껴본 적도 없는 카리스마야.'
"미안. 우리 때문에 가운데 낀 너만 입장이 곤란했겠다. 다시 한 번 사과할게."
"···됐어.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밥먹는데, 밥맛 떨어져서 나왔을 뿐이야."
도훈이 다 피운 담배를 손가락으로 튕겨 버리더니, 입에 침을 고아 '카학-' 소리와 함께 뱉었다.
"암튼, 난 이만."
"자, 잠깐만."
나린이 쪼르르 달려와 도훈을 붙잡았다.
"왜? 더 할 말 있어?"
"아니, 우리 저녁까지 다 계산해주고 갔잖아."
"그게 뭐? 합석해서 먹었으니까 내준 것 뿐이야."
"그래도···. 그게 한 두푼도 아니고. 연락처 알려줘. 내가 보내 줄게."
"신경 꺼. 그깟 푼돈 가지고."
도훈이 돈에 초탈한 모습까지 보이자, 나린은 더더욱 도훈에게 매력을 느꼈다.
도훈은 그냥 싸가지 없는 나쁜 남자가 아니었다.
나쁜데 잘생기고 돈까지 많은 남자였다.
'이대로 보내면 절대 안 돼. 다음에 또 이렇게 만나긴 쉽지 않을 거야.'
"아니 그래도···. 이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왜?"
"괜히 나 때문에 저녁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것 같아서 ···. 혹시 괜찮으면···."
"······?"
"후식으로 나라도 먹을래?"
[아, 아니 이게 무슨 대사가.]
'예상은 했지만 엄청 적극적이네. 방금 표정관리 실패할 뻔.'
"무슨 소리야?"
"솔직히 난 너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거든."
"흠."
"카지노에서 처음 봤을 때도 마음에 들었는데, 민하가 먼저 나서길래 양보한 것 뿐이야. 사실 나도 너한테 들이대고 싶었거든."
"······."
"근데 오늘 우연히 다시 만났는데···. 이렇게 안 좋은 기분으로 헤어져 버리면···."
"그래서?"
"같이 호텔 갈래? 가서 룸 서비스로 배도 채우고···. 또···."
나린이 도훈에게 팔짱을 끼우면서 교태를 부렸다.
커다란 젖가슴을 팔꿈치에 문지르며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따 먹어줘."
그때 식당에서 민하가 나왔다.
그녀는 나린과 도훈이 서로 붙어있는 모습을 보고는 말문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너희들 언제···."
"조민하. 넌 혼자 집에 가. 난 도훈이랑 쉬었다 가기로 했으니까."
"뭐라고?"
갑작스러운 급전개에 민하는 어이가 없었다. 나린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도훈의 옆에 애인처럼 팔짱을 끼우고 찰싹 붙어 있는 것이었다.
선수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민하가 나린에게 따졌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러다 중간에 희재 오빠가 호출하면 어쩌려고? 일과 중에는 같이 붙어 있으란 명령 까먹었어?"
"희재 오빠?"
도훈이 넌지시 묻자 나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우리 고용한 사장님인데 가끔 호출하시거든."
"음."
"암튼, 너 이렇게 명령불복하고 단독행동하면, 난 오빠한테 너의 근태에 대해 보고할 수 밖에 없어."
희재가 두 사람에게 비싼 연봉을 지급하며 당부한 것은 단 한가지였다.
자신이 호출하면 나란히 손잡고 달려올 것.
그게 전부였다.
나린과 민하가 서로 싫어하는 사이였음에도 늘 붙어다녔던 이유는, 희재가 불시에 호출했을 때 최대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였던 것.
"아니, 오늘은 일이 바쁘다고···."
"그야 모르지. 희재 오빠가 새벽에라도 갑자기 부를 줄 어떻게 알고? 어쨌든 네 마음대로 해. 난 혹시라도 희재오빠가 부르면 네가 지금 뭐하느라 못 오는지 사실대로 다 말할 테니까."
민하는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나린도 못 갖게 하겠다는 심보였다.
어차피 선수를 빼앗겼으니 훼방이라도 하는 게 최선이라는 판단.
하지만 도저히 도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린이 꾀를 냈다.
"그래, 그럼 너도 같이 우리 따라오면 되겠네?"
"뭐?"
"나 도훈이랑 지금 호텔 갈테니까 너도 옆방에서 쉬고 있으라고. 만약 희재오빠가 호출하면 바로 달려가고. 어때? 그럼 문제없지?"
"넌 지금 그걸 말이라고···."
민하가 어이없다는 듯 따지자 가만히 듣고 있던 도훈이 다시 역정을 냈다,
"니들 지금 내 앞에서 뭐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