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 ex wife-33-
효민을 배웅해준 도훈은 혼자 집에 남아 뒹굴었다.
구원회라는 거대한 미션이 마무리 된 이후다 보니, 도훈도 간만에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당분간 무엇을 해야할지 목표가 정해 지지 않은 상태로, 어영부영 학교 출석이나 하는 평온한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평소에 검소한 사람도 횡재를 한 이후 돈을 헤프게 쓰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처럼, 구원회 미션이 끝나고 막강한 내공을 갖추게 된 도훈 역시 뭔가를 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꼈다.
한마디로 몸이 근질근질해진 상태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바로 미션을 하시겠다는 뜻이었습니까?
구원회 미션을 해치운지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마무리는 아직 안 됐지. 구원회의 완벽한 분쇄를 위해선 구혜진에게도 시간이 더 필요할 테니까.'
[어쨌든 주인님이 더 이상 신경 쓰실 일은 없을 겁니다. 간만에 휴식인데 푹 쉬시면서 충분히 여유를 즐기시는 건 어떠신가요?]
'그럴까도 했는데, 집에 가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말이야. 힘이 흘러 넘쳐 주체할 수가 없달까?' 도훈이 강화된 내공의 힘을 극명하게 체감한 부분은 아이러니 하게도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난 정력이었다.
예전에는 하루에 3-4번쯤 하고 나면 조금 힘이 부치는 걸 느꼈는데, 지금은 끄떡도 없었다.
물론 평범한 2-30대 남성에게 하룻밤 서너번의 섹스가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하루 날 잡고 풀컨디션으로 했을 때나 가능하지, 1년 365일 그렇게 보냈다간 두달도 못 버티고 피골이 상접해 쓰러지고 말 것이다.
이전의 도훈이 매일 3,4번의 섹스를 무리없이 해낼 수 있었다면, 내공이 강화된 지금은 하루 종일 섹스도 충분하다고 느낄만큼 양기가 충만해진 상태였다.
[내공의 강화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군요. 안 그래도 강한 주인님의 양기가 한층 더 강화되어 버렸으니···.]
'나도 그런 것 같아. 해도 해도 갈증을 느낀다니까? 이거 혹시 섹스 중독이려나?'
[섹스 중독요?]
'어. 하루 종일 섹스만 생각하는···.'
[주인님은 원래부터 그러셨는데요?]
'아니, 내 말은 그 증세가 좀 더 심해진 것 같다고.'
[그보다는 내력이 충만해져, 아무리 써도 고갈이 안 돼 생기는 문제 같습니다. 쉽게 말해 그릇이 더 커졌으니까요.]
'그릇이 커져?'
[내공은 축기를 통해 단전에 차크라를 저장하는 것입니다. 주인님의 단전은 최근 기연으로 평소보다 배로 그릇이 커진 상태고요. 정력이 내공과 정적인 상관관계를 지녔으니, 정력도 그에 비례해 늘어났을 겁니다.]
'오호.'
[또 강화된 정력이 성욕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힘이 남아도니 계속 배출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이해했어. 내 예상이 얼추 맞았구나.'
[정 풀고 싶으시면 내부 단속도 하실겸 간만에 8선녀 로테이션이라도···. 오늘 정음양과 효민양을 만난 것 처럼요.]
'에이,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저번처럼 인위적으로 로테이션 돌렸다간 결국 효민에게 걸린 것처럼 다른 애들한테도 들킬 거야.
그냥 필요할 때 불러서 한번씩 눌러주는 게 낫지, 요일을 할당해 의무적으로 만나는 건 앞으로 지양하려고.'
[혹시 벌써 질리신 건?]
'당연히 그건 아니지. 마누라처럼 매일 살맞대고 산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났으니까. 굳이 따지면 질렸다기 보다 기왕이면 뉴 페이스랑 하고 싶은 거야. 남자가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는 여자가 어떤 여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네. 처음 보는 여자라고.]
'아니 더 구체적으로.'
[처음 보는 예쁜 여자?]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좀 더 써 봐.'
[처음 보는 예쁜 여자인데, 남의 마누라인?]
'오우, 그건 좀 꼴리네. 혹시 관련 업적은 없어?'
[유부녀 관련 업적이야 당연히 있습니다. 최근에 신성희 양을 대상으로 완료했던 그대 이름 바람바람바람 업적 역시 유부녀 대상이었죠. 또 하나 뽑자면, 주인님이 이미 한 번 거절했던 업적이 있습니다.]
'내가 거절 했다고? 무슨 업적인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업적입니다.]
'그 탁란 업적? 에이, 그건 절대 안 한다니까.' 도훈이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거부했다.
원치 않는 임신을 싫어하는 것은 비단 여자만이 아니었다.
도훈에게도 사실상 첫 애다 보니, 도저히 그런 식으로 낳고 싶지 않았다.
도훈은 전생의 딸아이를 떠올랐다.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길렀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자신의 피가 안 섞였던.
하필 마누라의 어린 시절을 빼다박는 바람에 전혀 의심을 하지 못했던 게 패착이었다. 결국엔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믿고 애지중지 길렀던 것이다. 기른 정이야 당연히 남아있지만, 나중에 혈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도훈은 최윤하 또한 그 아이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를 거라고 확신했다. 동시에 여러명과 나뒹굴었으니 친부를 찾는 것도 어려울 거라고.
'···하여간 그 썅년.'
[예? 뜬금없이 욕설을 박으시고.]
'아니야. 그냥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암튼 난 그때도 내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첫 애를 남의 마누라를 통해 갖는 건 도저히 못 할 짓이야. 그냥 다른 업적이나 찾아봐줘.'
[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로시가 몇가지 유부녀 관련 업적을 언급했으나, 다른 생각에 사로잡힌 도훈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딸 아이는 잘 있으려나? 그래도 내가 자기 친아빠인 줄 알텐데.'
환생 이후 가장 슬펐던 사실은, 친부모님과 귀여운 딸을 두번 다신 만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전생의 인연을 억지로 찾을 경우, 힘을 다시 거두어 버릴수도 있다는 경고 때문이었다.
문득 그 생각이 든 도훈이 로시에게 물었다.
[···또 다른 유부녀 관련 업적으로는.]
'잠시만.'
[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서울 바닥이 엄청 좁잖아.'
[그건 왜요?]
'만약 내가 우연히 전생과 관련된 사람들하고 마주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의도치 않게 만나는 경우 말이야.'
[음, 고의가 없다면 문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그곳 근처에 서성이면서 만남을 유도하는 것은 안되지만요.]
'말을 걸어도 안 되는 거야?'
[그건 상관없습니다. 의도를 품고 일부러 찾아 나서는 것만 문제삼으니까요. 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혹여나 빙의 사실을 들켜서 플레이어의 신분을 노출하는 경우입니다.]
'굳이 그 얘기를 꺼내진 않겠지. 어차피 생김새도 달라져서 못알아 볼텐데.'
[하지만 막상 전생의 인연과 다시 만나게 되면 주인님도 사람인 이상 실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전혀 모른체 하기가 쉽지 않겠죠.]
'그래서 부모님 사시는 동작구 근처로는 얼씬도 않고 있잖아.
우연히라도 마주치게 될까봐.'
[잘 하셨습니다. 주인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한 마디만 더 드리자면, 주인님은 벌써 한 번 죽으신 몸입니다.]
'나도 알고 있어.'
[이미 끝난 과거의 인연에 연연치 마시고, 현생을 충실히 사시기 바랍니다. 주인님의 부모님께서도 이정우는 이제 마음 속에 묻으셨을테니까요.
'알고 있다니까 그래.' 로시에겐 거짓말을 했지만, 도훈은 사실 조금도 잊지 않았다.
-윤하 그 쌍년! 우연히라도 만나면, 확 조져 버릴라.
[유부녀 관련 업적을 더 설명해 드릴까요.]
'아니. 그보단 갑자기 예쁜 여자들 생각났다.'
[누구요?]
'어제 도박장에서 만난 여자애들 있잖아. 기억나?'
[주인님한테 관심을 보였던 여자요?]
'응. 생각해보니 준다고 할 때 먹을 걸, 괜히 튕겼나 싶네.'
[지나고나니 갑자기 아쉬워진 건가요?]
'아니야. 그냥 됐어. 근데 이상하게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네.'
[주인님이 미인을 보고 그냥 지나치신 적이 거의 없긴 하죠.]
'그 정돈 아니야. 나를 무슨 발정난 개새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아니셨습니까?]
'됐다고! 업적은 그렇다치고 어디 미션이라도 없을까?'
[미션의 경우 낯선 사람과 새로운 장소에서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학교만 쳇바퀴 돌도록 다니는 건 별 도움이 안된다는 거잖아.'
[맞습니다. 주인님도 어지간히 몸이 근질근질 하시나 보군요.]
'막 팔딱팔딱 한다니까 그래? 오늘만 3번을 했는데도.'
[정 그러면 지난 번 세이브 해 두었던 게임에 재접속 해보심은?]
'천상크래프트?'
[네. 지금의 주인님이면 막혔던 구간을 다시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도훈은 잠깐 솔깃했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임은 게임일 뿐. 당분간은 현생을 살고 싶어. 막말로, 그건 미션이나 업적을 깨는 것도 아니잖아.'
[휴우-. 어쩔 수 없군요.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았다간 나중에 더 큰 사고를 치실 것 같으니···. 차라리 새로운 미션을 구해보시죠.]
'그럴까?'
[생전 가보지 않은 낯선 장소에 가시면 새로운 미션이 활성화될 것입니다.]
'그럼 외출해야 겠네.'
정음과 점심 시간에 모텔을 대실하고, 오후 시간에 효민을 집에 불러 따먹고 나서인지 아직은 이른 저녁이었다.
도훈은 후다닥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래. 별다른 약속도 없는데 잠깐 나갔다 와야겠다. 어차피 저녁도 사먹어야 하니.'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도훈은 헐렁한 니트 하나만 달랑 입은 상태였다.
[옷을 그렇게 입으면 안될 것 같은데요.]
'왜? 하나도 안 추운데?'
[주인님이야 끄떡 없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원래 겨울 멋쟁이는 얼어 죽는 법이라잖아. 얼어 뒤져도 아아라고.'
[그저 미친 놈처럼 보이는게 문제죠.]
'참나. 알았어.' 로시의 잔소리에 도훈이 어쩔 수 없이 외투를 하나 더 껴입었다.
집 밖을 나와 차에 오른 도훈은 문득 어딜 가야 할지 고민했다.
'근데 어디로 가야 미션이 활성화 되려나?'
[주인님이 한번도 안 가본 곳으로 가야죠.]
'어지간한 장소는 다 가봤으니까 말이야. 일단 저녁을 먹으면서 생각해 볼까?'
[간만에 외식이군요.]
'뭐, 혼밥도 나름 운치는 있지.'
도훈은 원래 대충 끼니만 때우자는 주의였기 때문에, 식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 배고프면 근처 편의점에 들러 도시락을 사먹거나 삼각김밥에 컵라면만 먹어도 상관없다는 부류였다.
하지만 간만에 식당에서 혼밥을 하려니, 괜히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메뉴 정했다.'
[뭘요?]
'오늘은 오마카세로 간다.'
[오마···. 뭐요?]
'왜, 요새 유행하는 코스요리 있잖아. 셰프가 직접 코스를 내주는.'
[주인님도 그런 허세를 부릴 줄 아십니까? 원래 그런 스타일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 난 배만 채우면 사실 상관없거든. 근데 또 생각해보니까, 내가 가진 재산에 비해 너무 검소하게 사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긴 하죠. 주인님 같은 자산가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면 엄청난 짠돌이로 비치겠죠.]
'그리고 낯선 장소에 가면 왠지 미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말이야.'
[오마카세 식당요?]
'왜, 요새 너트뷰 보니까 여자들 혼자서 그런 곳에 가서 식사를 하고 오기도 하더라고. 혼밥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대니까.'
[그 와중에 그걸 또 생각하셨군요.]
'아니면 셰프를 꼬시는 방법도 있고.'
[셰프요? 요리사를요?]
'여자 요리사는 아직 한 번도 못 만나 봤잖아. 어쩌면 미션을 받을 수 있을지도.'
[저녁을 드시러가는 건지 여자를 꼬시러 가는 건지 모르겠군요.]
'둘 다지.'
도훈은 스마트 폰 검색을 통해 오마카세로 유명한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파인 다이닝이 유행하다보니, 서울 시내에서만 수백군데 가게가 검색되었다.
도훈은 이중에서 특별히 여성 셰프가 운영하는 가게를 찾았다.
요리사는 주로 남자가 많았기 때문에, 여자 셰프가 운영하는 오마카세 가게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도훈은 후기를 꼼꼼히 살폈다.
음식에 대한 의견보다는, 셰프의 외모 위주였다.
[뭐하십니까?]
'응. 기왕이면 예쁜 여자 요리사가 좋을 것 같아서.'
[아니, 음식이 맛있는 게 우선이 아니고요?]
'보기 좋으면 맛도 좋다잖아. 이것도 맛집 찾는 건데?'
[예?]
'여자 맛집. 아니, 여자는 좆집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에. 식사를 하러 가는데, 요리사를 공략할 생각을 하시는 분은 주인님이 유일할 겁니다.]
'흐흐. 남들과는 다르지. 남들보다 빠르고.'
[주인님은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하반신에 두뇌가 지배된 느낌이랄까.]
'그래. 나 여자에 미쳤다.' 블로그 글을 유심히 보던 도훈은 마침내 집에서 1시간 쯤 떨어진 식당 을 발견했다. 앞치마를 두른 여성 셰프가 회 칼을 들고 멋쩍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오, 예쁜데? 이 여자?'
[고르셨습니까?]
'여기로 해야겠다. 느낌 있네..'
도훈은 무작정 전화를 걸어 예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