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ex wife-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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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뒤 먼저 도착한 도훈이 효민을 맞았다.
스니커즈를 신고 온 효민이 현관문에서 인사했다.
"실례하겠습니다."
테니스 치마를 입고 온 효민은 무척이나 발랄한 인상이었다.
특히 무릎을 뒤로 접어 신발을 벗을 때 슬쩍 드러나는 허벅지와 종아리가 매끈하게 빠진 모습이 도훈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효민이 다리가 저렇게 예뻤나? 엄청 늘씬하네.'
[효민양이 좀 마르긴 했죠.]
'그러니까.'
효민은 언뜻 보면 체육과 전공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가령 경희나 정음, 혹은 희주만 해도 탄탄한 몸매로 인해 딱 봐도 운동을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현역 대학 선수인 강경희는 뙤약볕에서 연습을 자주 하는 탓에 심하게 태닝된 구릿빛 피부에 큰 가슴만큼 어깨도 넓은 편이라 건장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였다.
체육교육과 학생들 대부분이 소싯적에 운동을 배웠거나, 전공자 출신이 많았던 탓에 건강미가 넘치는 반면 효민은 애초에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심지어 운동과 크게 관련이 없는 아영이나 서현보다 더 몸집이 작았다. 슬렌더라기 보단, 빼빼 마르고 체구가 작은 전형적인 소녀소녀한 몸매였다.
'효민이 사이즈가 되게 작은 편이었구나. 키도 제일 작은 것 같고.'
[160정도 아닙니까?]
'그러니까. 머리가 작아서 비율이 좋아 몰랐는데, 키가 좀 작은듯. 몸도 엄청 말랐고.'
늘씬한 미인의 대명사인 나연과도 느낌이 달랐다.
무용을 배운 나연 역시 굉장히 마르긴 했지만, 발레 전공자 특유의 꼿꼿한 자세로 늘 허리를 세우고 있는데다 키가 제법 있는 편이라 작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효민은 연예인에 빗대면 아이 유와 비슷한 느낌의 작은 체형이었다.
"어, 왔어?"
"오랜만이에요, 오빠."
효민은 붙임성도 좋았다.
처음 보는 사이에선 낯을 가리고 말수도 없지만,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고 장난도 곧 잘치는 성격이었다.
'그러고보니 체형에 비해서 가슴이 제법 있는 편이었구나.'
[그렇죠. 저래보여도 나연양보다 볼륨이 있으니까요.]
'은근 색기도 있고.'
[효민양이요?]
'쟤도 얼굴만 순진하지 엄청 밝히잖아. 키는 제일 작아도 성욕은 순위권일 듯.'
집으로 들어온 효민은 거실을 한 번 쓱 훑어보더니 도훈에게 말했다.
"어? 청소하셨나봐요?"
"응?"
"집이 엄청 깨끗한데요? 오빠 일주일 넘게 집 비우시지 않았어요?"
'이크. 어제 김비서가 청소하고 가서 그렇구나.'
"응. 어젯밤에 도착해서 청소 좀 했어. 오랫동안 비웠더니 집안에 먼지가 수북하더라고."
도훈이 대충 둘러댔지만, 효민은 씩 웃더니 굳이 덧붙였다.
"···우렁각시가 몰래 와서 해주고 간건 아니고요?"
"무슨 말이야?"
"농담이에요. 헤헤."
'쟤는 은근슬쩍 저렇게 찔러보더라.'
[효민양 특기잖습니까. 순진한 표정으로 툭툭 건드리는 말투.]
'의외로 영악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음흉하기로 치면 서현양과 쌍벽을 이룰 겁니다. 둘 다 속내를 잘 숨기는 타입이죠.]
'그거야 진작 눈치챘지.'
"여기 앉아."
"네."
도훈과 나란히 소파에 앉은 효민이 응접 테이블 위에 조그만 종이백을 내려 놓았다.
"뭐야 이건?"
"오빠집 오는데 빈손으로 올 수 있어야죠. 간식거리 좀 사왔어요. 커피랑 쿠키랑."
"헐, 뭘 이런 걸 다."
종이백에는 트레이에 담긴 커피와 수제 쿠기가 담겨 있었다.
"오빤 아메리카노죠? 샷추가 해서."
"응. 어떻게 알았어?"
"가끔 카페가서 오빠 커피 마시는 취향 보면 늘 진한 아메리카노만 마시더라고요."
"호오."
도훈은 새삼 효민의 세심한 관찰력에 놀랐다.
그녀는 아닌 척 하면서 늘 사람들을 주시하고, 그 특징을 기억하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 눈치가 무척 빨라 상황판단을 잘했다.
'확실히 효민이 쁘락치로 적격이긴 했네.'
[쁘락치가 뭡니까? 좋은말 놔두고.]
'스파이?'
[그것도 좀···.]
'어쨌든 한동안 내 정보원으로 활동했으니까.'
"잘 마실게. 암튼 만나서 말하려던 게 뭐야?"
도훈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카푸치노를 입에 대고 있던 효민이 급히 컵을 내려 놓았다. 그 바람에 거품이 윗 입술에 남고 말았다.
"아, 그게요."
"잠깐만."
도훈이 효민의 턱 아래를 받치더니 엄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윗입술을 닦아주었다.
"입술에 거품."
"아···."
단순한 손짓만으로 효민의 눈이 풀려 버렸다.
"왜 그래?"
"설?잖아요."
"응?"
"···오빠 진짜 은근히 여자 긴장시키는 거 알아요?"
"모르겠는데?"
"하여튼, 아까 오후 수업 때 나연이랑 연두랑 같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걔들이 뭔가를 오해하고 있더라고요."
"무슨 오해?"
"오빠 혹시 정음이랑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정음이?"
[아차. 아까 벤치에 같이 있을 때 들킨 거 아닙니까?]
'들키다니?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게 아니라 남들이 보기엔 오해할만한 그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정음양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고, 주인님이 달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아니 그거야, 시험 결과 때문에···. 하-. 듣고보니 그렇네.'
"무슨 오핸데?"
"음, 나연이랑 연두는 오빠가 정음이 임신시킨 줄로 알더라고요."
"이, 임신?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그쵸? 저도 듣다가 이상해서 걔들이 오해했을 거라고 말해줬어요. 말도 안되죠. 제가 오빠를 아는데."
"어이가 없네. 아니 내가 무슨 정음이를 임신 시켰다고···."
"그러니까요."
[임신은 너무 나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들이 한동안 방치했더니 선 넘네.'
"암튼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절대 아니니까 괜한 소문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어요. 잘했죠?
효민이 자신의 공을 자랑하듯 떠벌렸다.
"그래. 잘했어. 너 아니었으면 괜히 또 해명하느라 진땀 뺐겠다."
도훈이 효민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자. 효민이 그의 어께에 머릴 기대며 활짝 웃었다.
"근데 그 얘기 하러 직접 온 거야?"
"음, 그보다는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뭔데?"
"오빠 혹시 정음이랑 사겨요?"
갑자기 훅 찌르는 화법에 도훈도 움찔 놀라고 말았다.
뭔가를 알고 물어보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무턱대로 쑤시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사귀는 건 아니고···. 갑자기 그건 왜?"
"요즘 저희과 애들 사이에 오빠랑 정음이 얘기가 자주 오르내리거든요."
"갑자기?"
"그것 때문에 그래요. 지난 번 미스터 국성 대회요."
"아···."
"몇몇 선배들이 체육관에서 오빠가 정음이 개인 코칭해주는 걸 봤었나봐요."
"아니, 그거야 함께 출전하는 대회니까. 그리고 공공장소였잖아. 둘만 있던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봤죠. 그리고, 정음이만 나간 것도 아니었잖아요. 경희도 나갔고 희주도 나갔는데 오빠가 정음이만 따로 봐주시면 당연히 그런 소문이 돌지 않겠어요."
"하-. 진짜."
"그리고 2학기 들어서 정음이가 1학년 과대된 이후로 부쩍 자주 만나셨으니까."
"아니 그거야 학회장이니까 당연히 학년 과대하고···."
"맞아요. 제가 오빠한테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고, 그런 부분 때문에 소문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뜻이죠."
"흠···."
"오빠가 예전에 저한테 학과 소식 일주일에 한 번씩 알려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오빠가 학교에 못 오신 일주일동안 그런 소문이 좀 도는 거 같아서."
"그랬구나. 암튼 고마워."
[효민양 말대로 주의하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님은 8선녀만 의식했지만, 사실상 주인님을 아는 사범대 전체 학생들의 시선도 신경을 쓰셔야 할 듯요.]
'피곤하네 진짜. 나는 무슨 여자만 만나면 따먹고 다니는 발정난 개새끼로 아는 거야 뭐야?'
[완벽한 사실 아닙니까?]
'뭐라고?'
도훈은 생각난 김에 효민에게 그간의 소식을 물었다.
"생각난 김에 또 내가 알아야할 소식 없어?"
"무슨 소식이요?"
"뭐, 우리과 소식이나 학교에 떠도는 소문 같은거."
"음···. 굳이 따지면 저희과 일은 아닌데, 뉴스가 있긴 해요."
"뭔데?"
"왜 저번에 윤리교육과 횡령 사건 아시죠?"
"횡령? 학회비 들고 날랐다는 총무?"
"네. 그 언니 다시 돌아왔대요."
[어? 혹시 그분 아닙니까? 호빠에 공사 당해서 오피로 팔려갔다는?]
'맞는 거 같아.'
"돌아와? 횡령한 회비는?"
"그것도 다 메꿨데요. 공식적으로 사과문 게시하고 형사처벌만 간신히 면했나봐요."
"흠. 근데 얼굴 팔려서 학교는 다닐 수 있나?"
"쪽팔렸는지 1년 휴학계도 냈대요. 아마 복학하면 조용히 졸업만 할 생각인가 봐요."
"그래도 다행이네. 다시 돌아왔다니."
"네?"
도훈은 그녀가 오피에서 풀려난 일을 언급한 것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효민은 횡령한 돈을 회수해서 다행인 것으로 오해했다.
"그쵸. 윤리교육과 애들 그 사건 때문에 얼마나 빡쳤는데요. 사범대 학생회 전부가 그것 때문에 회비 감사까지 받았잖아요."
"으, 응. 총무인 서현이가 나 대신 고생했지."
[근데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된 걸까요?]
'내 생각엔 마약 사건으로 경찰 수사가 진행되니까 여자애들을 풀어준 것 같아. 마약에다 성매매 사건까지 얽히면 여죄가 추가될테니.'
[조태오 선에서 꼬리를 자르려는 걸까요?]
'빛나 말로는 공급책인 상선까지 연결 고리를 잡았다니까 쉽게는 안 끝날 걸? 마약팀까지 뛰어든 이상 뿌리까지 탈탈 털듯.'
[결과적으로 주인님의 행동으로 윤리교육과 여학생도 일상으로 돌아오고, 마약으로 여자들을 꾀던 범죄 조직까지 일망타진 되겠군요. 좋은 일을 하신 겁니다.]
'의도친 않았지만 그렇게 된 거야. 사실 그 일 생각하면 좀 씁쓸해.'
[네?]
'휘겸 말이야. 조태오한테 칼 맞고 죽었잖아. 악행에 비해 과한 대가를 치른 것 같아서.'
[주인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놈들은 여대생들을 작업해 사창가에 팔아 넘기던 범죄자들 입니다. 동정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또 뭐 없어? 일주일 넘게 비웠더니 학교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겠어서."
"또요? 음···. 아, 맞다. 이건 확정은 아닌데요."
"뭔데?"
"양희주 말이에요."
"희주?"
"최근에 연예 기획사에서 미팅했다는 것 같아요."
"연예 기획사라고?"
[오호, 저번에 한 번 말했던 그거 아닙니까?]
'맞는 거 같은데? 정말로 연예인 데뷔하려는 건가?'
"음, 네. 길가다 명함을 받았는데···. 사무실 한 번 들르라고 했나보더라고요. 근데 이건 정확하진 않아요. 면접을 본 게 아니라, 그냥 한 번 꼭 나와보라고 해서 차만 마시고 왔다는 얘기도 있고요. 희주가 그 얘기는 잘 안해서."
"대박이네. 그럼 희주 연예인 되는 거야? 탤런트? 아이돌?"
"아이, 오빠처럼 김칫국 마시는 사람들 있을까봐 희주가 소문안낸 거죠. 길거리 캐스팅으로 명함만 뿌리고 가는 기획사 직원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래?"
"저번엔 들어보니까 아영이도 Dm 받은 적 있대요. 기획사라는 데서."
"정말?"
"근데 막 대형 기획사 아니고, 이상한 곳도 많아서···."
"이상한 곳이라니?"
"뭐, 저도 잘 몰라요. 전 그런거 한 번도 안 받아봐서, 헤헤."
효민이 다시 자신을 낮추며 헤헤 거렸다.
'효민이는 유독 자신감이 없구나. 역시 8선녀 중 최약체라서 그럴까?'
[근데 그건 억까 아닙니까?]
'억까라니?'
[효민양이 체육과 안에서야 평범한 축이지만, 그래도 다른 과같으면 손에 꼽히게 인기 많을 것 같은데요.]
'월드 클래스 아래 묻힌 국대 같은 느낌인가?'
[그렇다고 8선녀가 월드 클래스까진 아니고요.]
'아니 비유가 그렇다고. 하긴 효민이도 은근 매력있지. 조그만 여자애들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완전 저격할 듯.'
[그거 로리···.]
'에이, 쟤가 어딜 봐서 로리야. 키만 어린애지 가슴은 어른인데.'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문득 효민의 가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선을 눈치 챈 효민이 도훈에게 좀 더 몸을 기대며 물었다.
"그러고보니 되게 오랜만이네요. 2학기 초에는 매주 오빠 집에 방문해서 학과 소식 알려드렸는데요."
"응?"
"···아니에요. 그때가 좋았다고요."
효민이 살짝 서운한 표정을 짓자 도훈이 항변했다.
"혹시 오해할까봐 말해주지만, 후배들 집에 부르는 건 동시에 그만뒀어. 너만 안 부르는 건 아니야."
"알아요."
"응? 어떻게 알아?"
도훈은 한때 음양보합술로 내공을 채우기 위해 8선녀를 일주일로테이션으로 집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대략 한달 남짓 이어진 이벤트였는데, 외부 활동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다만 자신들이 로테이션으로 초대되었다는 사실은 대부분 모르고 있었는데, 효민은 이미 그것을 다 파악한 눈치였다.
"오빠. 제 정보력을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요. 제가 오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 것 같아요?"
도훈에게 몸을 바짝 밀착시킨 효민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