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53화 (1,933/2,000)

1953. ex wife-28-

* * *

빈 강의실에 모인 세 사람은 무척 심각해 보였다.

둘은 아까 학떨목 벤치에서 도훈을 훔쳐보던 나연과 연두였고, 나머지 한 명은 두 사람과 시간표를 맞춘 효민이었다.

2학기 들어 찐친이 된 세 사람은 아까일을 가지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효민아, 너 이거 어디가서 절대로 얘기하면 안 돼?"

"뭔데?"

"글쎄 아까 학떨목에서 도훈오빠랑 정음이가···."

내용을 전해 들은 효민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짜야? 방금 한 얘기?"

"거의 그럴걸?"

"분위기 완전 심각했다니까? 정음이가 막 울고 있고, 오빠가 달래주고 있고."

하지만 효민은 두 사람에 비해 좀 더 냉철한 편이었다.

"근데, 둘이 얘기하는 내용을 엿들은 거야?"

"엿들었다니?"

"그건 아닌데. 그냥 멀리서 우리끼리 훔쳐봤지."

"엥? 그럼 확실하지도 않는 거잖아."

"뭐가 확실하지 않다는 거야?"

"맞아. 너 지금 정음이랑 친하다고 편드는 거니?"

나연과 연두는 1학기 초부터 유명한 단짝.

그사이에 끼게 된 효민은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었다.

효민은 8선녀 중에서도 최약체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동기들 사이를 자주 방황하다 겨우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야. 정황 증거밖에 없잖아. 그것도 완전히 상상으로 만든 억측이고."

"억측 아니라니까? 한참 울다가 나중에 둘이서 차타고 학교 밖으로 나갔어."

"나가? 수업 시간에?"

"응. 정음이 내가 알기론 월요일 오후 수업 있거든. 근데 점심 시간 얼마 안남기고 나갔으니 빼박이지. 애 떼러 산부인과 간거야."

"맞아."

내용을 모두 들은 효민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설마···. 너희들이 오해했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훈 오빠는 그럴 사람 아니야."

"네가 어떻게 알아?"

"맞아."

효민은 도훈이 무정자증임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실제 노콘으로 섹스를 여러 차례 즐겼음에도 임신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나연과 연두 앞에서 공개하자니 괜히 질투를 받을 것 같았다.

"아무튼, 너희들 주장엔 아무 근거도 없잖아. 둘이 얘기하는 걸 엿들었으면 모를까. 그냥 남녀 사이에 애정싸움 일지도 모르고."

"애정 싸움이라니?"

"설마 둘이 남몰래 사귀기라도 한다는 거야?"

깍두기처럼 동기들 주변을 멤도는 효민이었기에 좋은 점도 있었다.

누구와도 적당히 친한 편이었기 때문에 학과내 돌아가는 소식과 소문에 대해 빠삭했다. 그녀는 도훈의 어마어마한 여성 편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도훈이 유독정음을 예뻐하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정음의 단짝인 아영이 도훈 앞에서 유독 정음을 부러워하며 눈치를 보던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도훈의 마음이 정확히 어디로 향해 있는 지 말이다.

'흠, 곤란하게 됐네. 애들한테 사실을 다 밝힐 수도 없고.'

다만 효민은 도훈과 별도의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과 풍문들을 발설하기 곤란했다. 괜히 불똥이 자신에게 튀었다가 도훈에게서 버림받을 것이 두려웠다.

'아냐. 괜히 두 사람 관계를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해서 좋을 건 없어. 결국엔 내가 떠벌린 것을 알게 될 테고, 나중에 가면 동기들이 도훈 오빠를 탓하기보다 나만 나쁜년 만들테니까.'

8선녀 중 최약체다보니 유독 눈치가 빠르고 생존본능이 강했던 효민은, 작금의 해프닝이 잘못하면 학과 전체의 악성 루머로 퍼질 것을 우려했다.

도훈의 호색 행각이 사방에 까발려지는 순간, 도훈의 활동범위가 극도로 위축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여간 나연이랑 연두는 너무 눈치가 없단 말이지. 도훈 오빠가 정음이랑 떡을 치든, 희주랑 자던 그냥 눈 감고 모른 채 할 일이지. 괜히 긁어 부스럼 내봐야, 자기들한테 갈 것도 아닌데 말이야.'

"사귀는 건 아닐 거야. 도훈 오빠는 딱히 한 사람만 편애하진 않으니까. 너희들이 느끼기에도 그렇지 않아?"

효민은 나연과 연두의 우정 사이에 빈틈을 이용했다.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땐 더 할 나위 없는 찐친이긴 하지만, 결국 도훈 앞에선 누구보다 치열한 경쟁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었다.

만약 도훈이 서열을 매겨 누군가를 더 좋아하고 아껴준다면, 나 연과 연두 역시 그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었다.

"으흠, 그렇긴 해. 도훈 오빠는 늘 공평하지."

"맞아. 남녀 가리지 않고 후배들에게 잘 해주잖아."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나연과 연두가 대답하자, 이를 유도한 효민이 맞장구쳤다.

"그렇다니까? 아마 정음이 집에 우환이 생겼거나,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후배들을 아끼는 오빠는 차마 그냥 못 지나치고 수업까지 째고 정음을 집까지 데려다 준 거지."

"아···. 그 생각까진 못했네."

"맞아.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부모님이 갑자기 쓰러지셨다던가."

"넌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

"아, 아니 그냥 내 말은···."

"암튼 이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니까 절대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정확하지도 않은 소문을 퍼뜨렸다가 나중에 입장 곤란해지면 어쩌려고 그래."

효민의 입단속에 나연과 연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역시 효민이랑 먼저 의논하길 바랬어."

"우리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다른 애들한테는 말 안해야 겠다."

"그치? 얼른 다음 수업이나 가자. 이러다 지각하겠어."

효민의 재촉에 세 사람은 마지막 수업 강의동을 향해 뛰어갔다.

그와중에 효민은 도훈에게 따로 문자를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이효민 : 오빠, 학과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 조짐이 보이는 데, 오늘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물론 자기 선에서 정리하고 끝낼 수도 있었지만, 효민은 이 기회를 노려 도훈에게 총애를 받을 궁리를 품었다.

* * *

두 번에 걸친 섹스가 끝나자 정음이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죄, 죄송해요. 아무 생각없이 있다보니, 아르바이트를 깜빡 놓쳐서."

"아르바이트라니?"

"아···. 일주일에 3번 도장에서 애들 보고 있거든요. 태권도 사범요."

"아아, 그거? 그게 오늘이었어?"

정음이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네. 좀 있음 초등학생들 도장 올 건데, 봐줄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요."

"저런. 미안, 내가 너무 갑자기 끌고와서."

"아, 아니예요. 제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점심 직후 무인텔에 들러 대실 3시간을 꽉 채운 나머지 아르바이트에 늦게 된 정음이 재빨리 환복을 맞췄다.

"오빠, 정말로 죄송해요. 저 먼저 가볼게요."

"같이가."

"네?"

"도장까지 태워다 줄게. 거기까지 어떻게 가려고?"

"지금 택시 타면···."

"내가 데려다 줄게."

도훈 역시 잽싸게 옷을 입었다.

군복을 입는 것보다 빠른 속도에 정음이 깜짝 놀라 물었다.

"우아, 방금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 이거? 군대 다녀오면 원래 환복 1분만에 가능해."

"그, 그렇구나. 놀랍네요 군대라는 곳은."

"일단 차에 타자. 도장 위치 알려주고."

"네!"

정음을 태권도장까지 바래다주는 사이 도훈이 말했다.

"암튼, 오랜만이라 너무 좋았어. 몸 천재 대결도 재밌었고."

"아이참. 대결 아니라까요. 전 오빠한테 이기고 싶지 않아요."

"아니야. 이겨."

"네?"

"나랑 한 내기 말이야. 기말 고사땐 꼭 이겨야지. 그래야 우리가 사귈 수 있으니까."

"아···. 네. 그건 꼭 이길게요!"

"그래 정음아. 아무튼 고생이 많다. 요즘도 사범 아르바이트 하는 줄은 몰랐어."

"그게···. 저희 집은 등록금 제외한 생활비를 스스로 벌어 쓰자는 주의라서요."

"오, 그래?"

도훈은 정음의 아파트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잘사는 동네도 아니었고, 집도 연식이 좀 되어 보이는 낡은 아파트였다.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배워서, 이렇게 예쁘게 자랐었구나?"

"네?"

"나도 너희 부모님과 비슷한 생각이거든. 20살 넘었으면, 이제 자기 용돈은 스스로 벌어 써야지. 그게 맞는 것 같아."

"그, 그쵸?"

도훈은 문득 정음이 지금까지 아르바이트를 받아서 사주었던 선물들을 떠올렸다.

'그러면 자기 용돈으로 쓸 것을 모아서 내 선물을 사줬던 건가?

아니 이게 무슨···.'

[그냥 주인님이 용돈 주시지 말입니다. 돈도 많으신 양반이 ···.]

'사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그건 정음이가 너무 자존심 상해할 것 같아서 말이야. 자립심이 강한 사람에게 불필요한 도움은 기만처럼 느껴지거든.'

[그런가요? 하지만 미래의 남자친구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부잔데···.]

'1000억도 안되는 돈으로 무슨 손에 꼽아? 조 단위 부자도 얼마든지 있는데.'

[그나마도 반토막 났으니 500억으로 정정하시죠.]

'500억이면 더 푼돈이지. 암튼 나 그렇게 부자 아니야.'

[그렇군요.]

"미안해요 오빠. 더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정음이 자신의 일로 만남이 중단된 것을 자책하자 도훈이 위로 했다.

"아니야, 정음아. 우린 또 보면 되잖아. 내일도, 모래도 학교에서 만날 거니까."

"그래도요."

"난 오히려 정음이 네가 책임감을 보이는 모습이 더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보여.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의 우선 순위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거잖아."

"정말요?"

[갑자기 왜 칭찬을 늘어놓으십니까?]

'생각해보니까 금전적인 문제를 떠나서 정음이 계속 아르바이 트를 병행하는 게 내 플레이어 활동에 유리할 것 같아서.'

[아, 그렇군요. 정음양이 여유가 생기면 주인님을 더 찾을 테니까.]

'그렇지. 아쉽지만 정음이는 한동안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

"응. 어른스럽다 정음아."

"히-! 오빠한테 칭찬 받으니까 너무 기뻐요. 아앗. 저기요. 저기 사거리에서 세워주세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정음이 정차된 차에서 내리며 도훈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럼, 오빠도 조심히 가세요! 태워주셔서 고마워요."

"뭘 이런 걸로. 언제든 기사 필요하면 부르라고."

"아니에요. 오빠, 저 그럼 애들 기다릴 것 같아서 먼저 가볼게요!"

"응, 그래!"

정음은 정말로 시간을 늦었는지 등을 돌리자 마자 후다닥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정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 까지 흐뭇하게 쳐다보던 도훈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휴-. 다행이네. 정음이가 시험 잘 봤으면 괜히 일이 복잡해 질뻔 했어."

[아까는 내기 결과와 상관없이 사귀겠다면서요?]

'그거야 위로하려고 한 말이지.'

[설마 그것도 구라였습니까?]

'아니, 반쯤은 실화.'

부르르-!

그때 도훈의 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응? 누구지?"

도훈이 스마트폰을 꺼내 보니 이효민에게서 온 문자였다.

첫 문자는 1시간 전. 그리고 시차를 다시 온 것이었다.

'뭐야? 얘는 언제 또 문자 보낸 거야?'

[주인님이 한창 정음양과 맨몸 겨루기를 할 때 같군요.]

-이효민 : 오빠, 학과에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 조짐이 보이는 데, 오늘 한 번 뵐 수 있을까요?

-이효민 : 대답이 없으셔서 다시 보내요. 지금 많이 바쁘신가요?

문자 내용을 확인한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미스러운 소문?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효민양의 정기 보고는 예전에 로테이션 끝나고 중단되지 않았습니까?]

'맞어, 맞는데···. 이거 또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뒤늦게 문자를 확인한 도훈이 곧바로 효민에게 전화했다.

"어, 효민아. 무슨 일인데?"

-오빠? 아, 전화 드리려다 혹시 불편한 상황일까봐서요.

"아니야. 통화해도 상관없어. 불미스러운 소문이라니?"

-전화상으론 그렇고 얼굴 뵙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전화기에서 얼굴을 뗀 도훈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굳이 얼굴을 보고? 대체 뭐지?'

[그냥 주인님 보고 싶어서 수작 부리는 게 아닐까요?]

'그런 것 같긴 한데, 나에 대한 소문인 것 같아서 괜히 궁금해지네.'

[만나시려고요? 정음양이랑 헤어지자마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효민이랑은 얘기할 필요가 있어. 일주일넘게 학교를 비웠더니 학과 소식이 궁금하기도 하고.'

도훈은 일전에 효민에게 특별한 임무를 내린 것을 떠올렸다.

2학기 시작하고 한동안 로테이션을 돌리던 시기였는데, 친화력이 좋아 두루두루 학과 사람들과 친한 효민에게 학과에 떠도는 소문들을 수집해 오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이른바 정보원 롤을 맡긴 것이었는데, 효민은 깜찍하게도 자신이 맡은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수완을 보였다.

"그래? 그럼 어디서 볼까? 너네 동네로 갈까?"

-음, 저희 동네는 다른 선배들도 살아서 좀 그렇고요. 오빠네 집으로 제가 갈게요.

"지금?"

-네. 15분이면 도착해요.

도훈이 위치를 확인하고 귀가 동선을 계산했다.

그 역시 15분 내로 도착할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우리 집에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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