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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49화 (1,929/2,000)

1949. ex wife-24-

"어, 정음아. 왔어?"

생글생글 웃는 정음을 보자 도훈은 괜스레 불안감이 스멀스멀올라왔다.

'표정을 봐선 시험 성적 잘 나왔나본데? 분명 망했으면 우울해 있을텐데 말이야.'

[성적이 오늘 공개 되는게 맞습니까?]'

'어. 우리학교는 늘 똑같아. 중간 시험 끝나고 일주일 뒤 전산으로 중간 성적을 조회할 수 있게 되어 있거든. 저저번주가 중간시험 기간이었고, 지난 주 사이에 성적 입력이 끝났을테니 오늘이 성적 조회날이야.'

[흐음.]

"오빠, 너무 오랜만이에요. 부산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부산이라니?'

[주인님이 지난 일주일 간 결석사유로 부산 친척집 방문을 핑계를 대셨습니다. 조교인 강민주양이 학생들에게 알려줬겠죠.]

'아하. 그렇구나.'

"응. 별일은 없었어."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고마워. 근데 너 오늘 되게 표정 좋아보인다?"

도훈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음이 당장이라도 프린트된 성적표를 공개하며 커플 선언을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잠을 되게 오래 자서 컨디션이 좋은가봐요."

"아하."

"···그리고, 오늘 오빠랑 한 약속 확인하는 날이기도 하고요."

"약속이라니?"

도훈이 얼렁뚱당 넘기려고 하자 정음이 눈을 가늘게 뜨며 스스로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뭐예요? 설마 까먹으신거?"

"까먹다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냥 농담한 거야."

"히히. 섭섭할 뻔 했잖아요. 오빠 때문에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시험 공부 했는데요."

"태,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네."

"호, 혹시 성적 확인했어?"

"어? 나왔어요? 아침 9시에 확인했는데 그때까진 조회가 안되더라고요."

도훈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아직 결과는 안나왔나 보구나.'

[오늘 공시되는게 아닌건가요?]

'그게 아니라 9시에 바로 열리는 게 아닐거야. 대학 온라인 교무학사 시스템을 관리하는 직원이 9시에 출근하니까 10시에나 혹은 12시 전에 열리겠지.'

도훈이 힐끔 시간을 확인해보니, 12시가 막 넘은 시점이었다.

[그럼 지금 조회가 가능하겠군요.]

'그러게. 정음이가 너무 발랄해보여서 결과를 아는 줄 알았네.'

[저 정도 자신감을 내비치는 걸 보면, 정말로 잘 봤을 가능성도 있겠는데요?]

'하아-. 괜히 내기했어.'

[정음양이 빡대가리를 벗어나는 것이 싫으십니까?]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적당히 잘하길 바란거지.'

[아직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니, 차분히 기다려 보시죠.]

"아마 지금쯤 뜨지 않았을까? 군대 가기전에 2학기 중간고사기억을 떠올려 보니까 10시 넘어서 조회가 되는 것 같더라고."

"그렇구나. 그럼 오빠, 점심 먹고 저랑 도서관가서 같이 확인하실래요?"

"너, 너랑?"

"네. 어차피 내기 했으니까 오빠도 결과를 같이 확인해야죠."

정음의 당당한 태도에 점점 주눅이 드는 도훈이었다.

그녀는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망했네. 내가 너무 문제를 잘 찍어 줬었나봐.'

[어쩌면 단순히 근거없는 자신감일 수도 있습니다.]

'근자감?'

[네. 똑같이 시험을 봐도 누군가는 망쳤다고 하고, 누군가는 잘봤다고 하지만 실제로 결과가 그렇게 나오지는 않는 것처럼요.]

'착각이라면 좋으련만.'

"그, 그래. 점심이나 먹자. 배고프다."

도훈은 정음과 함께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밥이 코로들어가는 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정도로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하아, 내가 무슨 배짱으로 내기를 해놓고, 정음이가 시험 잘 보게 도와주기까지 한 거지?'

[당시에는 정음양이 너무 공부를 못해서 도와주려고 하신 거 죠. 전교 꼴등 타이틀을 달고 졸업했다간, 임용시험을 보기도 전에 자신감이 추락할 거라면서요.]

'그, 그렇긴 한데···.'

[그리고 정음양이 더욱 분발할 수 있도록 시험 잘보면 사귀어 주겠다는 호언장담도 하신 거고요.]

'저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 완전 빡대가리라고만 생각했는데 ···..'

[아직 결과는 모릅니다.]

'그래도 쫄린다고. 난 망통을 들었는데, 상대는 38광땡이라도 잡은 것처럼 자신감이 충만하잖아.'

[망통이 뭡니까?]

'0끝. 섯다에서 제일 최악의 패.'

[아···.]

'최대가 비기는 거거든. 그 외엔 어떤 족보도 못 잡는 최악의 쓰레기 패.'

[이런···.]

식사를 마친 정음이 도훈에게 말했다.

"오빠, 그럼 도서관으로 가실래요? 1층에 컴퓨터실 있던데 거기서 확인하면 될 것 같아요."

"그, 그러자."

정음을 뒤따르는 도훈의 표정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침울해져 있었다.

[얼굴 펴십시오. 누가보면 정음양에게 삥뜯기러 끌려가는 줄 알겠습니다.]

'얼굴 펴게 생겼냐? 오늘부로 꼼짝없이 사범대 체육과 공인CC되게 생겼는데.'

[정음양을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좋아하기야 하지. 다만 정음이만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하여간 주인님은 욕심이 많아서 문젭니다. 육정음양도 갖고 싶고, 다른 8선녀도 놓치기 싫으신 거 잖습니까?]

'난 단지 우리 체육과 1학년 여학우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길 바랄뿐이야.'

[한명도 안 놓치시려고 과욕을 부리셨다간 언젠간 호색행각을 들키고 말 겁니다.]

'아직까진 안 들켰고,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어차피 주인님도 언젠간 육정음양과 사귀려고 생각하셨잖습니까? 그 시기가 예상보다 앞당겨진 것 뿐인데, 뭘 또 그렇게 불안해 하십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도훈은 씩씩하게 앞장서서 걷고 있는 정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새내기 배움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선머슴처럼 걸크러시 넘치는 ?된 소녀였던 그녀가 어느새 성숙한 여성으로 성장해 있었다.

짧은 숏컷에서 단발로, 그리고 이제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여성스러운 헤어스타일은 그녀의 매력을 더욱더 돋보이게 했다.

몸매는 어찌나 탄탄한지, 치마를 입고 있는 뒤태에서도 빵빵한 엉덩이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오빠, 오늘따라 왜 그렇게 걸음이 느려요?"

도훈이 자꾸 뒤처지자 정음이 고개를 휙 돌리며 채근했다.

정면은 더욱 극적으로 변해있었는데, 도훈이 미스앤 미스터 국성 선발에서 그녀를 돕기 위해 가슴을 키운 것 때문에, 어느새 D 컵에 살짝 모자랄 만큼 커진 가슴이 유독 눈에 띄었다.

얼굴도 예쁘지 몸매도 훌륭하지, 무엇하나 빠질 것 없는 갓 스무살의 여대생. 정음의 얼굴을 보자 도훈도 머릿속에 품고 있던 불안을 모두 날려버렸다.

'그래. 될대로 되라지. 정음이랑 공식 커플이 되는 게 뭐 어때서? 일을 벌이고 수습만 잘하면 그만이지.'

전생의 마누라가 육정음처럼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여성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잠시나마 밀어내려 했다는 스스로가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 어! 그래. 같이가자."

도서관 1층 컴퓨실에 들어온 두 사람은 의외로 북적거리는 인파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20대가 넘는 컴퓨터가 비치된 곳이었는데,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대학생들이 몰려 있던 것이었다.

"아···. 중간 시험 성적 조회하러 온 학생들인가봐."

"그러네요. 이렇게 우르르 몰려든걸 보니까, 방금 막 서버가 열렸나봐요."

두 사람이 한참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그 앞에 한 자리가 났다.

"앗, 오빠. 자리 났어요."

"응."

"오빠 먼저 확인하실래요?"

"나부터? 내 성적은 내기를 안 했는대?"

"그래도요. 실은 티 안내고 있었지만, 저도 지금 너무 떨려서."

도훈이 가만히 보니 정음이 열중쉬어 자세로 두 팔을 뒤로 한 채 바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이제껏 보였던 자신감이 알고보니, 억지로 쥐어짠 허세였던 셈이다.

[헐, 육정음양도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제보니 그러네. 엄청 당당하길래 진짜 시험 잘 본 줄 알았더니.'

[주인님에게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나 봅니다.]

'원래 투기 종목 선출들이 종종 그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기세에 밀린다고 보니까,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거지.' 도훈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학교 온라인 센터 사이트에 접속했다. 학번과 비번을 치고 중간성적을 조회하자, 정음 역시 덩달아 집중해서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적 조회> 버튼을 누르기 전 의자 뒤에 턱을 괴고 선 정음이 물었다.

"오, 오빤 시험 잘 봤어요?"

"나? 그냥 평소대로."

"아···. 오빠 근데 공부 많이 못 하시지 않으셨어요? 저 도와주신다고."

"그건 그냥 내가 시간나서 도와준거야. 평소에 미리 대비를 해놓으면 딱히 시험기간이라도 쫓길 필요가 없거든."

"역시··· 단대 수석은 다르군요."

정음이 감탄한듯 말하자 도훈도 속으로 머쓱했다.

[입에 침도 안바르고 거짓말을 하시는 군요. 아이템으로 치팅해서 점수 딴 거 아닙니까?]

'맞아. 그래도 정음이 앞에서 커닝했다는 얘길 대놓고 할 순 없잖아.' 도훈이 버튼을 클릭하자 일시에 중간시험을 봤던 과목의 성적 표가 화면에 동시에 나타났다.

"오, 올 에이쁠?"

옆으로 주르륵 나열된 과목 아래 적힌 성적표는 전부 A+ 였다.

도훈은 예상보다 잘 나온 시험 결과에 어깨를 으쓱했다.

'하나는 그냥 평범하게 A에 맞추려고 했는데 실패인가.'

[성적이 너무 잘나온 거 아닙니까? 또 단대 수석하시겠는데요?]

'단대 수석이 아니라, 국성대 전체 수석 할 것 같은데···.'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뭘. 커닝해서 얻은 결과인데. 솔직히 나도 양심은 있다고.'

도훈이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결과에 민망해하는데, 정음이 의자뒤에서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으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우아! 오빠 축하드려요! 역시!"

"저, 정음아."

도훈은 혹시나 누가 볼까봐 서둘러 그녀의 팔을 떼내고는 자리를 비켰다.

"이제 네 성적 확인해."

"아···. 오빠 성적 보고 나니까 너무 창피해요."

"괜찮아.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한 거야. 나도 1학년 땐 낙제만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거든."

"정말요? 오빠가요?"

"응. 성수형한테 물어봐. 지금 4학년 들은 다 알고 있을 걸? 내가 완전히 바닥 깔았다는 거."

"어떻게 이렇게 잘하시게 된 거예요 그럼?"

"내가 알려줬잖아. 시험은 준비하는 요령만 익혀도 중간은 간다고. 거기에 노력이 더해지면, 점점 성적이 오를 거야."

"아···. 오빠가 알려주니까 납득이 되는 거 같아요."

"뭘 또···."

정음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도훈의 아이디를 로그아웃 하고 자기 아이디로 로그인했다.

<성적조회> 버튼을 앞두고 정음이 갑자기 크게 심호흡을 했다.

"후읍- 하."

"뭐해?"

"너무 떨려서요."

"시험 잘 봤다면서?"

"그래도···. 저 1학기 때 완전히 망쳤으니까···."

"걱정마. 잘 봤을 거야. 진짜로 열심히 공부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평점 3.5 넘는게 약속이었지?"

"네."

"좋아. 기대해 볼게."

"아아, 하지마요."

"왜 그렇게 쫄았어? 너 답지 않게."

당당하던 정음이 점점 긴장하는 티를 내자 도훈은 그런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몸으로 하는 것이면 천재적인 감각으로 수행해내던 그녀가 별것도 아닌 중간 시험 성적에 쩔쩔맨다는 사실이 뭔가 희극적이었다.

"그야··· 중요한 내기가 걸렸으니까요."

정음은 기도하는 것처럼 두손을 맞잡더니 눈을 꼭 감았다.

"뭐해?"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에게 기도 드리고 있어요."

"종교가 3개야?"

"이번 시험 성적만 잘 나올 수 있으면, 10개라도 다니려고요."

[정음양이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군요. 이 정도면 무조건 사귀어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뭐, 정성이 갸륵하긴 한데···. 어쨌든 결과는 지켜봐야지.'

[주인님은 아까보다 긴장이 풀리신 거 같은데요?]

'나야 뭐···. 이미 마음 굳혔으니까.'

[굳히다뇨? 설마 또 인연의 붉은 실 가위를···.]

'에이, 무슨 소리야. 정음이의 기억을 지울일은 없어.'

[그럼 무슨 뜻이죠?]

'정음이랑 공식 커플이 된다고 해도, 다른 나머지 8선녀를 설득해 보려고. 어차피 아영이나 서현이는 이미 대충 알고 있는 상태고, 스리섬을 하는 연두나 나연이도 충분히 이해할 거야. 몇명만 설득하면 정음이랑 사귀면서도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는 게 가능할 것 같기도···.'

[정음양이 상처받는 건요?]

'그러니까 모르게 해야지.'

[너무 캠퍼스 생활 난이도가 올라가는 것 아닙니까?]

'몰라. 일단 결과 나오면 보자고.'

정음이 마우스를 딸깍 누르자 화면에 성적표가 주르륵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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