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 ex wife-17-
모텔방 입구에서부터 한바탕 전쟁같은 섹스를 치른 도훈은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2차전을 준비했다.
물론 그전에 성희의 상태창을 열어 호감도를 체크하는 걸 잊지 않았다.
'지금은 호감도 몇이지?'
[95입니다.]
'95? 92에서 고작 3올린 거야?'
[섹스 한번으로 호감도 100까지 모두 채울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전에 주인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섹스로 호감도를 올리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섹스만 해서 상대의 호감도를 100까지 끌어 올리는 게 가능했다면, 주인님은 벌써 호감도 100짜리 여성을 수십명 거느리고 있을 테니까요.]
'하긴 그런가?'
도훈도 그 부분이 미스터리였다.
남녀가 빠르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섹스라는 점은 변함없지만, 그렇다고 섹스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섹스는 사랑하지 않는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심지어 죽이고 싶은 원수하고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게 섹스였다.
'흐음, 나머지를 마저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희양이 주인님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만들어야 겠죠.]
'진심으로?'
[그녀가 주인님께 가장 바라는 걸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나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라···.'
도훈이 그 부분을 염두하며 성희에게 물었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알몸으로 침대에 올라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는 중이었다.
"간만에 얼굴 보는것 같은데, 잘 살았지?"
"응? 나?"
"응. 우리 거의 이주만인가? 그 사이 별일 없었냐고."
"별일은 딱히? 아, 서준이 너 주아 알지?"
"주아? 주아가 누군데?"
도훈은 카지노 딜러였던 이주아를 떠올렸지만, 기억나지 않은 척 했다.
"왜, 너 저번에 왔을 때 딜러 봐주던 여직원 말이야. 네가 돈 많이 땄다고 팁도 두둑하게 줬다며."
"아아, 기억난다. 이름까지는 기억 안나서···."
"난 별 일 없었는데 주아 걔는 일이 좀 있었나 보더라고."
"무슨 일인데?"
도훈도 그 뒤의 소식은 잘 몰랐기 때문에 궁금해서 물었다.
"글쎄, 걔가 호빠를 다녔다는 거 알아?"
"호빠라고?"
"충격이지? 월급쟁이가 무슨 돈으로 호빠를 다녔는지 몰라? 마이너스라도 당겼나? 암튼 근데 거기서 사건이 하나 터졌나 보더라고."
"오잉?"
도훈은 일이 돌아가는 사정을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암튼 참고인 조사로 경찰서에 몇번 불려갔었나봐. 지금은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서 한동안 연차내고 쉬는 중이고."
"헐."
"충격이지? 하긴 그 계집애 생긴 거 봐선 순진하게 놀것 같진 않았는데, 호빠는 상상도 못했지 뭐야? 마약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있던데."
"에이, 마약이라니. 그냥 우연이 겹친 거겠지."
내막을 알고 있던 도훈으로서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였다.
주아가 호빠에 간 것은, 자신이 호빠 선수랍시고 초대를 했기 때문이었고, 마약 역시 거기 있던 선수들이 여자들을 옭아매기 위해 약을 탔기 때문이지 주아와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이거 다 주인님 때문아닙니까?]
'왠지 그런 것 같은데?'
[아니, 일이 이렇게 돼버리면 애꿎은 주아양만 피해 보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이드 이펙트는 예상 못 했는데.' 도훈은 사실 주아에게 부채의식이 남아있었다.
호빠를 박살내기 위해 주아를 이용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자신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고, 주아는 경찰조사까지 받는 등 귀찮은 일에 휘말린 셈이었다.
'근데 막상 주아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마약을 직접 먹은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죠.]
'나중에 빛나에게 연락해서 사정을 물어봐야겠다. 구원회 일 때문에 그 뒤로 어떻게 진행 됐는지 아예 신경을 못 쓰고 있었네.'
[빛나양이 마지막으로 연락 왔을 때는 부산에 있는 마약 상선을 수사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마약 조직을 소탕하는 일이니 만큼 시간이 꽤 걸리겠죠.]
'그렇겠네.'
[암튼 이미 주인님 손을 떠난 일입니다. 조폭까지 얽힌 일에 괜히 끼어들지 마시고 멀찌감치 떨어져 사태를 관망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도 나 때문에 주아가 피해를 보면 안되는 거잖아.'
도훈은 궁금증이 생겨 다시 성희에게 물었다.
"그럼 주아라는 그 딜러는 어떻게 됐어?"
"응?"
"경찰 조사 받았다며?"
"아, 그거? 나도 대충 전해 들었는데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나 봐. 다행히 영상자료가 남아있어서 마약 투약 여부나 그런데선 혐의점이 일절 없었으니까. 그냥 사건 당사자로서 조사 했다던가?"
"사건 당사자라니?"
"아, 그게···. 사실 진짜 문제는 마약이 아니라 그 호빠에서 살인 사건이 났었거든. 뉴스에도 짤막하게 나왔었는데 못 들었어?"
"살인 사건이라고?"
[태오가 휘겸을 찌른 그 사건 말이군요.]
'아차! 그렇구나.'
알고보니 휘겸이 태오의 칼을 맞고 사망한 사건 때문에, 휘겸이 호스트로 나갔던 당시 손님들을 불러 정황을 파악했던 모양이다.
[공교롭게 되었군요. 그 일은 진짜로 주아양과는 아무 상관 없는 사건인데요.]
'그렇긴 한데 사람이 죽었으니 경찰로서는 최대한 주변 관련인들을 불러서 조사하는 수밖에 없었겠지. 나도 그때 빛나가 증거인멸하고 나래가 증인 보호프로그램으로 도와주지 않았으면 지명수배되서 끌려갈 상황이었잖아.'
[아무튼 한동안 조심하셔야 겠습니다. 당시 주인님의 본 얼굴로 활동했기 때문에 괜히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겠군.' 도훈은 나중에라도 따로 주아에게 연락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용만 해먹고 일이 끝나니 내팽개친 것 같은 기분에 뒤끝이 개운치 않았다.
"음, 그리고 나 이번엔 진짜로 헤어지려고."
"남편이랑?"
"남편 아니라니까 그래? 식도 안 올렸는데 무슨."
성희는 사실혼 관계라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사실혼 관계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대이름 바람바람바람 업적이 활성화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암튼, 이대로는 같이 못 살 것 같아. 솔직히 처음에 같이 동거시작한 것도 서로 좋아서라기보단 경제적인 부분이 더 컸거든."
"음."
"서울 월세도 비싸고, 혼자 살려니까 생활비도 너무 많이 들고 ···. 근데 이제와서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어. 같이 산다지만 맨날 지방 출장가서 일주일에 몇 번 얼굴도 못 보는데."
"그렇구나."
"나 혹시 지금 남자친구랑 헤어지면···."
성희가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성희양이 바라는 게 마침내 나왔군요.]
'뭐야. 설마 나로 갈아타고 싶다는 건가? 이건 너무 몰염치 아니냐?'
[네?]
'아니, 3년 넘게 현남친이랑 동거하면서 물고박고 싸놓고선, 이제 새로운 남자 나타나니까 환승 이별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주인님이 화내시는 건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성희양을 받아 주지 않으면 호감도를 끝까지 채울 수 없을텐데요.]
'이게 무슨···.'
"···괜찮으면 서준이 너랑 같이 지내도 될까?"
성희의 노골적인 요구에 도훈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화를 내며 거절하자니 호감도 하락이 걱정이었고, 무턱대고 받아주자니 이건 정말 아니었다.
'이건 정말로 아니지. 쟤는 진짜 모기 같은 여자였네.'
[하고 많은 곤충 중에 왜 하필 모깁니까?]
'모기는 암컷만 피를 빨거든. 성희 쟤는 내가 더 잘생기고, 돈도 많아 보이니까 현 남친 버리고 나로 갈아타서 빨대를 꼽아보겠다는 심보잖아. 그걸 대놓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무슨 말을 또 그렇게까지···.]
'아니 막말로 내 말이 맞지. 내가 왜 다른 남자랑 사실혼 관계로 실컷 굴렀던 여자를 설거지 해줘야 하는 거냐고. 대가리에 총 맞았어?'
[흐음, 당연히 주인님은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죠. 다만 거부하면 성희향의 호감도를 100 채우기는 불가능할 거고, 달성이 얼마남지 않은 업적 또한 실패로 끝나겠죠.]
'와씨,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지. 진짜 더러워서 못 하겠네.'
도훈은 성희의 이기적인 태도에 화가 잔뜩 치밀었다.
사람 관계라는 게 기브앤 테이크가 기본이라고 하지만, 성희의 제안은 불공정 거래의 표본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즘 여자들이 남자들 등에 빨대 꼽고, 설거지니 도축이니 그런 말까지 왕왕 나오는 것은 알고 있더라도 이건 해도 너무했다.
'씨발, 나를 존나 호구로 보는 거 아니냐? 내가 지 과거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워워, 고정하십시오. 너무 화만 내지 마시고요. 성희양은 원래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 당연히 그런 요구를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물론 주인님 선택이죠.]
'그야 그렇지.'
[지금 주인님이 화를 내시는 건, 업적이 걸린 상태다 보니 거절이 힘들기 때문일 뿐입니다. 결국 성희양의 제안을 받고 호감도 100을 채워 업적을 달성하느냐, 아니면 거절하고 그녀를 내치고 업적도 포기하느냐의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짜증나네. 확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네.'
도훈은 대답을 유보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성희 역시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는지 묵묵히 도훈의 결정을 기다렸다.
[참고로 이번에 포기하시면 3번째 도전 실패하시는 겁니다.]
'3번이라고? 두번 아니고?'
[까먹으셨나본데 정확히 세 번 맞습니다.]
'누구였더라?'
[처음은 홍정원 양이었죠. 남편 몰래 바람피우던 돈 많은 유부녀요.]
'아아, 기억난다. 두번째는?'
[허은지 양이요. 미나양과 사이판 여행가서 만났던. 두 사람다 호감도 100을 목전에 두고 끝내 가정파탄범이 되기 싫다며 거부하셨죠.]
'아니, 그건···.'
[참고로 허은지 양은 탁란 업적도 걸려있었습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업적···.]
'됐어. 기억 났어. 더 얘기 안해도 돼.'
[아무튼 이번에 신성희 양까지 물리치면 결국 3번째 포기를 하시는 셈입니다. 심지어 성희양은 정식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아이도 없는 상황이라 그나마 부담이 덜한 상대인데도요.]
'그건 그렇다쳐도 내가 왜 저런 여자 설거지를···.' 도훈은 설거지에 트라우마가 있었다.
전생의 마누라에게 실컷 당한 기억 때문이었다.
도훈은 고심하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호감도 100 채워서 업적만 해치우면 되는거 아닌가?'
[네?]
'성희가 원하는 게 지금 남편이랑 헤어지고 나로 갈아타는 거잖아.'
[그렇죠.]
'내가 말로만 들어준다고 하고, 업적 해결한 뒤 입 닦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거 사기 아닙니까?]
'왜? 사람 생각이 도중에 바뀔수도 있는 거잖아.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처음부터 변심할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기망이나 마찬가진데요. 보통은 그걸 사기라고 부르고요.]
'물론 그렇지. 근데, 만약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일로 만들어 버리면?'
[무슨 뜻입니까? 망각의 라이터는 직전 10분의 기억만 지울 뿐입니다. 10분 안에 호감도 100을 만든 뒤 아예 없던 일로 만드시겠다고요?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합니다.
'아니. 그냥 연을 끊어 버리면 되지.'
[아! 인연의 붉은실!]
'솔직히 말하면 성희는 너무 이기적인 여자야. 바람 피우는 여자들이 다 그렇지만, 자기만 생각하고 남편이나 남자친구 입장은 별로 중요치 않지. 맨날 자기만 억울하다고 하거든.'
[흐음.]
'바람피우는 여자들 논리가 그거잖아.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오면 니가 나한테 해준게 뭐냐고 따지고. 남편이 부자여도 돈이 다가 아니라고 따지지.'
[뭔가 모순적이군요.]
'그뿐인 줄 알아? 남편이 밤 일을 잘 못하면 자길 만족 시키지 못했다고 바람 피우고, 남편이 밤 일을 너무 잘해도 자기를 노리 개 취급했다는 핑계로 바람을 피우거든.'
[그건 좀.]
'자상한 남편한테는 니가 너무 쉬워서 재미 없어서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거라고 하고, 자상하지 않은 남편한테는 니가 자상했으면 내가 그랬겠냐고 적반하장으로 달려든다니까?'
[그럼 부자에 정력도 좋고 자상한 남편이라면요?]
'그땐 자기가 너무 못나 보여서 열등감 때문에 불륜했다고 하겠지.'
[키하! 무적의 논리!]
'그렇다니까? 애초에 바람 피우는 여자들은 자기 밖에 몰라. 성희도 지금 자기만 생각하고 나한테 부당한 요구를 하는 거고. 나를 개호구로 여겼으면 나도 똑같이 해주면 그만이야. 내 원칙이 뭐라고?'
[눈눈이이!]
'나도 똑같이 나만 생각해서 그녀를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거잖아.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으로 약속을 했다가, 말 바꾸는 게 뭐 어때? 상대가 나한테 하는대로 돌려주는 건데?'
[어쨌든 거두절미하고 주인님이 성희양을 기망을 하겠다는 합리화 아닙니까? 일종의 혼인빙자간음같은?]
'그런 꼴을 당해도 충분히 싼 여자라는 뜻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랑 그런 일이 있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 미안해 할 필요도 없지만.'
[주인님은 정말 목적 달성을 위해선 뭐든 다 할 수 있는 분이군요.]
'알고 있겠지만 난 절대 호구처럼 착한 남자가 아니야. 그럴 생각도 없고.'
결심을 마친 도훈이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