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40화 (1,920/2,000)

1940. ex wife-15-

* * *

모니터 위에는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

그래프는 진도를 표시하는 지진계 그래프처럼 정신없이 위아래로 요동치는 중이었다. 그런 모니터가 책상 전체를 병풍처럼 빙둘러 총 5개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책상의 가운데, 정장을 입은 김희재가 중역 의자에 앉은 채 물끄러미 화면을 쳐다보았다.

잠시 후 맨 오른편 화면에서 매매 프로그램이 팝업창으로 띄워 지더니, 일정량의 코인이 순식간에 매수되었다. 이어 왼편 끝에서는 모니터 전체가 경고 화면이 뜬것처럼 붉은 화면이 깜빡이더니, 반대로 일부 코인을 순식간에 매도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조용히 화면을 모니터링 하던 희재가 문득 고개를 갸웃 거렸다.

'확실히 이상한 움직임이구나. 매개 변수에 오차가 발생했을까? 자동 프로그램의 매수 매도 명령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해.'

김희재는 정장을 벗더니 셔츠 팔목을 걷어 붙였다.

일에 초집중하기 전에 그가 치르는 의식중 하나였다.

가운데 모니터에 복잡한 화면을 띄운 희재가 키보드를 붙잡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손보기 시작했다.

검은 화면 위에 끝없이 나열된 줄 글의 명령어들은 고대의 암호처럼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보면 수학 수식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초등학생이 영타로 아무렇게나 때려낸 낙서 같이도 보였다.

모르는 사람은 평생을 봐도 이해할 수 없다는 컴퓨터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희재의 표정에는 약간의 희열감 마저 떠올라 있었다.

그가 큰 돈을 밀어 넣은 도박에서도 볼수 없는 모습이었다.

타다다다닥코드를 수정하는 희재의 손놀림은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치는 것처럼 현란했다. 5개의 모니터를 동시에 아우르며, 마우스 커서역시 사방을 넘나들었다.

타닥타다닥-

"···흐음, 이 정도면 문제 없겠지?"

그는 순식간에 복잡한 프로그램 코드를 수정하더니, 패치된 사항이 자동으로 업데이트 되도록 배포를 완료했다. 일을 마친 김희재가 시가 케이스에서 두터운 시가를 꺼내더니 가위로 끝을 자르며 흥얼거렸다.

"역시 나는 천생 프로그래머 체질이란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일찍 은퇴했다니까? 아쉽게 됐어. 세상은 천재를 하나 잃은 셈이니. "

시가 향을 만끽하며 희재가 오랜만에 회상에 잠겼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전도 유망한 프로그래머였다.

인공지능이니, 자율주행이니 하는 4차 산업혁명의 태동기를 열어 젖힌 프로그래머로서 천재들이 발에 채인다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도 천재 중의 천재로 불릴만큼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그가 주도적으로 개발한 인공지능 기반의 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세계 유수의 IT기업에서 동시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적극적인 구애.

꽃놀이 패를 쥔 희재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고, 심사숙고 끝에 한 기업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때 거기 들어갔으면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겠지?'

당대 최고의 IT기업으로 꼽히던 애쁠.

복리 후생이나 연봉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세계 최일류 기업에서 일했다는 이력은 장차 그가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하필 그때, 재미삼아 채굴하던 비트코인이 급격한 폭등을 시작한다.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다 발을 걸쳐보는 희재는 우연한 계기로 비트코인을 채굴하던 중이었는데, 자신의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태동기부터 꾸준히 코인을 쌓아두었던 것이다.

초창기만 해도 5000 비트에 피자 한판이라는 말도 안되는 가격이었지만, 어쨌든 전기세보다 더 벌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에 모으기 시작한 코인이 급격한 폭등을 시작하면서 희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로를 고민하게 되었다.

세계 최대 기업의 프로그래머가 되어 안정된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믿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볼 것인지.

고민 끝에 애쁠의 영입 제안을 거절한 희재는 그때부터 자신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 코인에 뛰어들었다. 그는 직접 투자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코인 채굴 쪽에 설비를 늘리면서 동시에 자신이 가장 잘하는 프로그램 개발로 눈을 돌렸다.

그가 매달린 분야는 바로 '프로그램 매매'라 불리는 매매 자동화 시스템을 개발하는 일. 변동성이 큰 코인 시장의 특성을 분석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자산을 증식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냉철한 투자자라도 결국 욕망과 두려움에 노예가 되기 마련이고, 수십번의 성공을 거둔 사람일지라도 단 한번의 판단착오로 패가망신 하게 된다는 것을 일찍이 깨우친 것이었다.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철저하게 그래프의 파동과 확률에 근거한 정답을 내놓을 수 있었고, 세상에서 가장 손이 빠른 프로게이머보다 더 빠르게 매수와 매도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대기업 입사도 포기하고 매달린지 어언 1년.

그는 마침내 현존하는 가장 우수한 코인 매매 프로그램인 '로보 77'을 완성시키게 되었다.

위대한 재능이 무서운 집념을 만나 이룩한 성과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큰 부를 이루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프로그램 덕은 아니었다. 실제 그가 번 돈의 9할 이상은 남들이 별 관심을 안 보이던 코인 태동기의 1년여 간 모아 두었던 코인이 대부분 이었으니까.

이후 희재는 직접 만든 프로그램으로 막대한 자산을 관리하면서 상상도 못한 엄청난 부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지금도 그는 '로보77'의 개발자로서 이따금 오류코드를 수정하거나, 변동된 시장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업데이트 작업을 진행하긴 했지만, 그것은 수익 활동이 아닌 무료한 삶을 죽이기 위한 재능기부에 가까웠다.

그는 이미 수년 전에 평생 쓰지도 못할 자산을 일구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애쁠이 나에게 제안했던 연봉이 인센티브 포함 10억 조금 넘는 수준이었지. 당시 개발자로선 업계 최고 대우긴 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10억이란 돈은 내가 한 시간도 안 돼서 벌 수 있는 푼돈에 불과했어.'

소위 세력이라 불리는 고래가 된 희재는 코인 최고 폭등기 땐 포브스 부자 순위에도 오를 만큼 엄청난 자산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코인 지갑의 보유자가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익명성 때문에, 누구도 그가 그만한 자산가라는 사실은 알아챌 순 없었다.

'아무튼 그 이후 모든게 너무 허무해져버렸어. 단지 나는 프로 그래밍이 좋아서 평생 그 일에 매달렸는데, 결국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준것은 재미삼아 몰래 채굴해 모으던 비트코인이었으니까.'

심지어 그는 다른 투자자들처럼 시세 변동에 일희일비하며 전전긍긍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가 만든 자동매매 프로그램은, 평균연수익 10%를 안정적으로 뽑아주는 빼어난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세가 하락할 땐 한발 빠르게 추세를 읽어내 현금화를 해 놓았다가, 반등의 기미가 보이면 다시 돈을 넣어 손실을 최소화하고수익은 극대화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보다 도박적인 세팅을 한다면 10% 이상의 수익률도 가능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잘못 삐끗하는 순간 수천억이 넘는 돈을 한 방에 날릴 수도 있었다.

당연히 희재로선 조금도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미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부를 갖추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수익률 10%만 유지하면 평생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생이 시시해지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더군.'

결국 개발자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희재는 앞으로 뭘하고 살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다름 아닌 결혼이었다.

전형적인 프로그래머였던 희재는, 여느 개발자들처럼 여자를 멀리한 채 컴퓨터만 붙들고 35년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았던 것.

하지만 막상 맞선을 통해 만난 여자들은, 그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막 건너와 현재 쉬고 있다고 소개를 하면, 선 보러 나온 여자들이 그를 우습게 여기며 쌀쌀맞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타고난 외모를 꾸밀줄도 몰랐고, 패션이나 운동에도 딱히 관심이 없는 찐 개발자 출신이었다.

그는 억울한 마음에 항변도 해보려 했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프로그램 개발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컴퓨터가 가득한 골방에서, 하루종일 코딩만 하는 3류 잡부 정도로 여길 뿐이었다.

거기다 얼마나 실력이 없으면, IT 개발자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는 미국에서 제대로 자리도 잡지 못하고 한국으로 쫓겨왔겠냐면서.

맞선에 학을 뗀 희재는 이후 자만추를 시도하게 되었다.

배드민턴 동호회나 와인 동호회, 때론 산악회 까지 다니며 다양한 여자들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이어갔다.

결혼을 목적으로 만나는 맞선보다는 확실히 동호회를 통해 만난 여자들이 훨씬 더 순수한 맛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그는 철저하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 지 비밀에 붙였다. 자신의 돈만 보고 여자들이 꼬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룬 부가 스스로의 능력보단 운이 많이 작용했다고 믿었으며, 또 돈이 많고 적음은 진실로 상대를 사랑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던 중 희재는 우연히 마음에 꼭 드는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대화도 너무 잘 통하고, 외모도 나름 섹시한 여자였는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돌싱이라는 사실이었다.

희재는 서른 중반이긴 했지만 어쨌든 초혼이었고, 상대는 서른 밖에 안됐지만 돌싱인 상황.

그의 부모님은 결혼을 만류했지만, 희재는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 1년 가까이 희재는 스스로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다. 현재는 프리랜서 개발자라 가끔 외주 들어오는 작업을 한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평범한 사람 코스프레를 했다.

혹시나 와이프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보고 순수함을 잃어 버릴까 우려했던 것이다.

'결혼 1주년이 되는날 모든 사실을 알려줘야지. 당신이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안에 드는 찐 부자를 잡은 거라고. 당신 정말로 운이 좋았다며.'

하지만 그의 소망은 결혼 1주년을 일주일 앞두고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결혼 이후로도 각종 동호회 활동을 계속해오던 아내가, 어느날 동호회에 나간다더니 새벽 늦게까지 연락이 두절된 것이었다.

경찰에 실종신고까지 하며 아내를 찾아해매던 그에게, 다음날아침 일찍 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이 왔다. 긴급히 수술을 해야 하니 보호자의 동의가 꼭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사고가 났다는 생각에 황망한 마음에 병원으로 급히 달려간 희재는 아내의 부상이 외음부와 질의 심각한 훼손이라는 설명을 의사로 부터 듣게 되었다.

의사가 그때 했던 말을 희재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했다.

-매우 굵고 긴 물체를 질 속으로 억지로 쑤셔 넣은 것 같습니다. 그게 너무 과하다보니 상처가 심하게 났고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경황이 없던 희재는 눈물을 흘리며 수술에 동의했고, 나중에 마취에서 깨어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처음 아내는 처음보는 사람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거짓말 했다.

강간을 당해 생긴 상처라는 것이다.

그러나 희재가 당장 경찰에 신고한다고 길길이 날뛰자, 그제야 진실을 실토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진실을.

'···후. 그게 바로 지금의 로얄 클럽을 있게 한 블랙 클럽이었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바람기가 다분한 여자였고, 약간의 섹스중독 증세가 있었다. 그리고 한 번 이혼했던 이유도, 바로 그녀의 도화살 때문이었다.

재혼 후에도 바람기를 주체 못한 아내는 우연히 난교 클럽에 가입했고, 자신에게는 다른 동호회에 간다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해당 클럽을 드나들었던 것.

난교 클럽은 말 그대로 오로지 섹스만을 위한 모임이었다.

참가자들은 커다란 펜션을 통째로 빌려놓고 매주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섹스를 즐겼는데, 하필 그날 만난 남성이 딜도 대용으로 굵은 생오이를 가져오는 바람에 그 사달이 났다는 것이다.

오이 돌기에 질 내부가 찢어지고 외음부에도 심한 상처가 나자 급하게 새벽에 응급실로 실려 왔는데, 보호자 동의 없는 전신 마취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병원 측의 완강한 거부에 어쩔 수 없이 남편인 자신을 불렀다는 것.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희재는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평생 함께하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아내가, 사실은 섹스 중독자에 난교 클럽이나 드나드는 음탕한 여자였다는 것이다.

희재는 그제야 아내가 자신에게 쉽게 몸을 허락했던 것과, 스킬이 지나치게 빼어났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부정한 아내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던 희재는 곧바로 이혼했다.

그리고 자신의 막대한 자금력을 이용, 아내가 속해있던 블랙 클럽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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