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 ex wife-13-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민하는 곧바로 멘탈을 붙잡았다.
'그래. 낯선 사람이라서 잠시 당황한 것뿐이야. 제아무리 날고기어봐야, 나만한 경험은 못해본 애송이일 뿐.'
"그런 식으로 막 들이대면 여자들이 좋아하던가요?"
"예?"
"얼굴 믿고 너무 기고만장 말라는 뜻이에요."
"얼굴 믿은 적 없는데요?"
"그럼 돈 많으세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희재 오빠한테는 안 될텐데?"
"돈도 당연히 아니고요."
"그럼 대체 무슨 근자감인데요? 뭘 믿고 그렇게···."
"제 입으로 직접 말하기 쑥스럽지만, 굳이 말하면 이거랄까."
도훈이 손가락을 밑으로 향해 바지춤을 가리켰다. 어깨를 떡하니 벌린 채 손가락으로 지퍼를 가리키는 모습은 자못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다.
너무나 황당한 도훈의 대답에 따지던 민하도 풉- 하고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풉-. 지금 설마···. 그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물어보니까 대답해 준 겁니다. 저보고 뭘 믿고 까부냐면서요?
전 이거 하나는 누구보다 자신 있거든요."
도훈의 뻔뻔한 태도에 민하도 그제야 도훈의 아랫도리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남자를 수없이 접해본 민하였기에, 도훈의 체격만 보고도 그가 상당한 대물이라는 건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덩치값 못하는 남자들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스킬이나 정력까지 빼어날지는 까봐야 아는 일이었다.
'물건은 제법 큰가 보네. 근데 그래봐야 내 앞에선 하룻강아지일 뿐.'
"남자들은 꼭 확인할 수 없는 사실로 허세를 부리는 게 종특인가 봐요."
"제가 허세라고요?"
다소 평점심을 되찾은 민하가 이번엔 도훈을 밀어내듯 한 발자국씩 앞으로 다가왔다. 가슴이 닿을 것처럼 밀고 들어오자 이번엔 거꾸로 도훈이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그쪽도 절 처음 봐서 잘 모르겠지만, 전 당신이 만나 본 그런 여자들하곤 차원이 다르거든요."
"어디가 어떻게 다른데요?"
"왜요? 궁금해요?"
"뭐, 다르다니까."
"풉-."
민하는 손에 들고 있던 조그만 클러치백을 열더니 전화번호가 담긴 명함을 하나 건넸다. 검은색의 고급스러운 명함에는 금박으로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로얄 클럽>
그리고 그 아래로 '010'으로 시작하는 핸드폰 번호 하나만 달랑 적혀있었다.
"로얄 클럽? 이게 뭐예요? 로타리 클럽 같은 건가?"
"뭐라고요? 방금 그거 농담한 거예요?"
"썰렁했어요?"
"암튼, 궁금하면 그리로 나중에 전화해요."
"그쪽 번호에요? 아님 가게?"
"둘 다 아니에요. 하지만 그 번호를 통하면 절 만날 수도 있을 거예요. 운이 아주 좋다면 말이죠."
"네? 그게 무슨···."
"담배 잘 피웠어요. 아 참, 그 명함에 붙은 금박 진짜 금이니까 혹시나 노름하다 돈 떨어지면 금은방가서 팔아도 될 거에요. 그 정도면 빌린 담뱃값으론 충분하죠?"
"뭐라고요?"
민하는 자기 할 말만 마치더니 쌩하고 흡연 부스를 먼저 나가버렸다. 도훈은 더 물으려고 했으나, 괜히 뒤쫓아가면 없어 보일까봐 일단 담배를 하나 더 꺼내 들고 부스에 머물렀다.
[혹시, 주인님 방금 까인 겁니까?]
'연락처는 받았으니 까였다고 보기는 좀···.'
[자기 번호가 아니라는데요? 대체 그게 뭘까요?]
'로얄 클럽이라···. 뭐, 딱히 궁금하지도 않는데 뭘.' 도훈은 귀찮다는 듯 명함을 손으로 구기더니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혹시 방금 까이신 것 때문에 화가 나서 그런 것은 아니시죠?]
'안 까였다니까 그러네?'
[근데 왜 주인님이 대놓고 들이댔는데도, 먼저 가버렸을까요?]
'나야 모르지. 그냥 좆같이 구니까 좆같았나?' 도훈은 자신의 유혹을 이겨낸 민하의 태도가 살짝 마음에 걸렸다.
'이상하네.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았는데···.'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평정심을 되찾더군요.
멘탈이 상당히 강한 여성처럼 보였습니다.]
'나이도 어려 보이더만 무슨.'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죠. 주인님이 예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아닙니까?]
'아니, 그걸 떠나서 감히 내 앞에서 경험이 많아 봐야 얼마나 많다고. 차원이 다르다 어쩌고 떠들어? 건방지게.'
도훈은 흡연 부스에서 담배를 마저 피우고 테이블로 복귀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김희재와 여성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빈자리에는 어느새 다른 손님 셋이 앉아 있었다.
"어? 저 쪽에 앉아있던 손님들은 언제 나갔어요?"
도훈이 딜러에게 물었다.
"손님께서 담배 피우시러 가신 사이에, 급한 연락이 와서 먼저 일어나셨습니다. 한데 그쪽 일행분하고 같이 나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딜러가 민하의 행방을 되묻는 것이었다.
도훈은 그제야 민하가 밖으로 나갈 때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 그럼 내가 담배 피우러 갔을 때 먼저 두 사람이 나가고 민하가 나중에 그걸 알고 따라 간 거구나.'
[왜요? 꼴보기 싫은 상대가 나갔는데 막상 아쉬우십니까?]
'김희잰가 뭔가 하는 그 새끼는 안중에도 없다고. 같이 왔던 여자들이 아까워서 그렇지.'
[아깐 연락처 받자마자 재떨이에 버리시더니···.]
'번호는 벌써 외웠어. 외웠으니까 버린 거고.'
[아···. 역시 주인님의 지능이 향상된 게 점점 효과가 나오나 봅니다.]
'전화번호 8자리 외우는 게 지능이랑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다시 게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아, 네 뭐···."
도훈은 찜찜한 마음으로 바카라를 다시 시작했다.
어차피 성희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스쳐 지나간 사람을 다시 붙잡기엔 오늘 밤 해결해야 할 업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나중에 정 생각나면 연락해보면 되겠지.'
* * *
"뭐야? 말도 없이 언제 나간 건데?"
민하가 급히 차에 오르자 뒷좌석에 먼저 앉아있던 나린이 사정을 설명했다.
"미안. 희재 오빠가 급한 일이 생겼다고 갑자기 나가봐야 한다더라고. 나보고 너 챙겨서 같이 오라는데, 게임도 안 하는 내가 뻘쭘하게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릴 순 없잖아. 어차피 할 줄도 모르고."
"근데 갑자기 급한 일이라니?"
"몰라? 외국에서 연락 왔는지 영어로 잠깐 통화를 하긴 했는 데, 내가 가방끈이 짧아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아···."
희재는 여전히 자산의 상당 부분을 코인으로 보유하고 있는, 소위 고래라 불리는 세력이었다.
그의 코인 계좌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여러 곳에 걸쳐 있었는데 이 때문에 새벽 시간에도 외국인들에게 연락이 올 때가 있었다.
민하는 희재가 급하게 전화를 받고 나갔다면, 분명 코인 투자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일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어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희재가 말하던 내용이 뇌리에 박힐 정도로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와, 민하야. 나 방금 좆될뻔 했다.
-왜요?
-방금 통화하고 30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제때 대응 안 했으면 눈앞에서 백억 정도 허공으로 날릴 뻔 했다니까?
-배, 백억이요? 지금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내가 언제 농담하는 거 봤니?
차에 오른 민하가 과거 일을 회상하고 있는데, 나린이 기사에게 차를 출발시키라고 하면서 민하에게 물었다.
"맞다. 근데 그 훈남이랑은 어떻게 됐어? 얘기는 잘 됐어?"
"무슨 얘기?"
"모른척 하긴? 꼬시러 간 거 아니었어?"
"꼬시긴 누굴 꼬셔?"
민하는 솔직히 대답하기 민망했기 때문에 말을 얼버무렸다. 나 린이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봐. 딱 보니까 완전 민하 네 스타일같던데? 너 키 크고 몸 좋은 남자 좋아하잖아."
"별로 몸도 좋지도 않더만, 뭘."
"벌써 봤어? 벗겼니?"
"뭐, 뭔 소리야 너는. 가까이서 보니까 완전히 헬스장 풍선 근육이더라는 거지. 힘도 별로 없게 생겼고."
"그 정돈 아닌 것 같은데···. 암튼 그래서 결과는?"
"뭘 그래서야. 그냥 담배나 같이 피우면서 얘기하다가 명함 주고 끝냈어."
"우리 클럽 명함을 줬다고?"
"응. 왜? 영입해도 괜찮을 것 같던데? 신원 보증이야, 홀덤 펍 VVIP룸에 입장할 정도면 딱히 큰 문제는 없을 거고. 여기 물관리 잘하기로 유명하잖아."
나린이 어깨를 으쓱하면 답했다.
"그래? 난 또 네가 개인적으로 꼬시는 건 줄 알고 일부러 관심 끊었었는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럼 걔 내가 먼저 맛봐도 돼?"
"···뭐라고?"
"개인적인 관심 없다면서. 난 사실 걔 보고 꼴렸거든."
"무, 무슨 말이야. 나린이 네가 그 남자를 얼마나 봤다고?"
민하가 왠지 억울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작업을 들어간 건 자신인데, 정작 나린이 몰래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하니 중간에 인터셉트를 당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죽써서 개준다는 말이 딱이었다.
"나야. 딱 보면 알지. 보면 모르겠어? 완전 상남자 스타일이잖아."
"상남자는 무슨. 싸가지 밥 말아 먹은 걸 보니까 그냥 쌍놈이던데."
"암튼 난 희재 오빠한테 반말 찍찍하면서 대드는 모습이 너무 박력있더라. 우리 클럽 안에서는 희재 오빠한테 아무도 뭐라고 못하잖아."
"그야 희재 오빠가 겉보기엔 유약하게 생겼으니까 그렇지. 얼굴은 동안이지만 나이도 제법 있고."
"아니, 그거 말고 경호원 오빠 나섰을 때 말이야. 원래, 다른 사람들은 재민씨 눈빛만 봐도 바짝 쫄잖아."
재민은 희재의 개인 경호원이었다.
물론 재산이 많은 희재의 경호원이 한 명인 것은 아니었지만, 희재가 어딜 가든 밀착해서 따라 붙은 경호원은 재민이 유일했다.
듣기론 맨손으로 들소도 때려잡을 만큼 강한 사람이라는 평이었다. 실제로 그가 내뿜는 기도가 워낙에 살벌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재민의 눈빛만 봐도 쫄아서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그랬었나?"
"근데 그 애는 재민 오빠를 같잖다는 듯 똑바로 쳐다 보는 거 있지? 와, 그때 나도 진짜로 싸움날까봐 엄청 쫄았잖아."
"무서운 줄 몰라서 그랬겠지. 원래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고통을 모르니까."
자꾸 민하가 반박하자 나린이 눈을 흘기며 슬며시 물었다.
"너 근데 그 사람이랑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
"너 원래 다른 사람 앞에서 사람 깎아내린 거 싫어하잖아. 뒷담화도 거의 안 하고. 근데 유독 오늘 그러네? 혹시 그 남자한테 까인 건 아니지?"
"내, 내가? 얘는 진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황한 민하가 시선을 회피하며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린이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씩 웃었다.
'까였네 까였어. 저 기고만장한 조민하가 남자한테 까이는 날도 오고. 쌤통이다 흥.'
민하는 청순한 얼굴과 특유의 눈웃음덕에 남자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클럽 안에서 난교를 즐길 때 모습을 기억하는 나린으로서는 그녀가 얼마나 가식적이고, 음탕한 사람인 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런 진면목도 모른 채 남자들이 죄다 그녀를 청순 미녀라면서 떠받드는 모습에 내심 배알꼴려 하던 나린이었기 때문에 민하가 당황하는 걸 보며 통쾌해 하는 것이었다.
'아, 고소해라. 민하를 깠다니까 더 보고 싶어지잖아? 그냥 내가 꼬실 걸 그랬나?'
나린은 스스로 섹시함을 과시할 만큼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성격이었다. 특히 남자들은 얼마든지 유혹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도훈을 놓친 걸 아쉬워하고 있었다.
'사내놈들은 단순해서 한 번 빨아주면 금방 넘어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값비싼 외제차를 타고 가는 두 여자가 서로 동상이몽에 잠긴 채 어딘가로 이동했다.
* * *
3시간째 바카라를 즐기던 도훈은 결국 돈을 땄다.
어느 정도 감을 잡고부턴 본전의 두 배까지도 딴 적도 있었지만, 승률이 반반이었기 때문에 이리저리 잃으면서 최종적으로 500만원 정도 더 딴 것이 전부였다.
'바카라로 돈 벌기는 쉽지 않구나.'
[전혀 능력을 안 쓰시지 않았습니까?]
'내 능력? 무슨 능력?'
[원래 주인님은 사기 도박 전문이시잖습니까?]
'사기도박이라니? 말은 바로 하라고. 가끔 스킬을 활용한다로 정정해줘.'
[그거나 그거나 결국 같은 말 아닙니까?]
'엄연히 다르지. 암튼, 시간 다 된 것 같으니 이만 나가봐야겠다.'
[마사지녀는 패스하시게요?]
'아, 맞다. 잠깐 보고 가려고 했는데 게임에 집중하느라 까먹어버렸네.'
[차라리 잘 됐습니다. 괜히 허튼 데 헛심 쓰지 마시고, 신성희양에게만 집중하시죠. 귀한 아이템이 걸린 업적이니까요.]
'그대 이름 바람바람바람 말이지? 알았어. 내 오늘 호감도 100찍어서 업적 마무리하고 만다.'
도훈이 각오를 다지며 VVIP룸을 나와 1층의 홀덤 펍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