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 ex wife-12-
도훈은 의식하지 않으려 했으나, 게임 테이블을 빙 둘러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민하가 방긋 눈웃음을 지어 보이자 심장이 쿵떨릴 수밖에 없었다.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매가 너무나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호오, 사람 홀리는 요물일세?'
민하는 아무 말 없이 도훈의 뒤에 서더니 한동안 그의 게임을 구경하는 척 했다. 도훈은 뒤통수가 간지러운 느낌에 신경이 예민해졌다.
'아씨, 뭐야 대체. 신경 쓰이게. 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거지.'
[주인님 답지 않게 너무 말려드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관심끄는 행동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사실 뻔한 수법이었다.
말없이 사람을 응시하는 것처럼 확실한 관심 표현은 없었다.
하지만 절대로 먼저 말은 걸지 않는다. 상대에게 들어오라는 사인이다.
도훈이 애써 평정심을 발휘하며 민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미인을 많이 접해보며 느낀 점은, 그들을 특별 대우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늘 호의에 익숙한 미녀들에겐, 남자의 관심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 당연함이 절대로 공짜가 아님을 일러주어야 한다.
'쳐다 보거나 말거나, 흥.'
도훈이 의도적으로 계속 무시하자 민하라는 청순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도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저기요."
"네?"
"죄송해요, 초면에. 혹시 담배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얼굴이 등 뒤에 가까이 들이밀며 말을 거는데, 꽃향기가 나는 향수가 은은하게 도훈의 후각을 자극했다. 미묘하게 섞인 화장품냄새와 더불어 몸에 분내가 가득한 느낌이었다. 더구나 등 뒤에서 귓가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기 때문에 귓불에 뜨거운 입김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이 근접한 상태였다.
어지간한 사내라면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릴만큼 매혹적인 유혹.
[완전 대놓고 작업 거는데요?]
'그러게. 무슨 꿍꿍일까?' 민하의 수작에도 도훈은 꿈쩍도 않고 도박에 집중하며 짧게 대꾸했다.
"제가 담배 피우게 생겼나봐요?"
"···예, 예?"
"다짜고짜 처음 보는 분께서 담배를 빌려달라고 하니까요."
"아···. 죄송해요. 흡연하시는 줄."
당황한 민하가 주춤하는데 도훈이 딜러에게 물었다.
"혹시 테이블에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죄송합니다 손님. 비흡연자가 불편하실 수 있어서 저희 업장에서 게임장 내 흡연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필요하시면 뒤편 흡연 부스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자리는요?"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실을 가는 정도로는 자리를 밀어내진 않습니다."
"그래요?"
도훈은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칩을 두고 그대로 일어서 뒤편의 흡연 부스로 향했다. 민하가 뻘쭘한 표정으로 계속 서 있자 도훈이 무심한 듯 한마디 건넸다.
"안 따라와요? 담배 빌려달려면서요?"
"아, 아··· 네."
민하는 그제야 도훈의 말 뜻을 이해하고 그를 쪼르르 따라갔다.
민하의 수작을 지켜보고 있던 금발녀 나린이 옆에 앉은 희재에게 한마디 했다.
"이야, 방금 봤어? 민하가 꼼짝을 못 하는데? 저 남자 생각보다 물건인가봐?"
"물건은 무슨? 도박하는 사람한테 말 거니까 귀찮아서 저러는 거지."
"에이, 그건 아니지. 오빠야 민하를 오래 봤으니까 아무렇지 않을 뿐, 남자들은 민하가 말 걸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다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흥. 저 싸가지 없는 새끼."
등 뒤에서 두 사람이 흉보는 소리가 들렸으나 도훈은 일부러 못들은 척 흡연부스에 들어갔다. 뒤따라오던 민하가 억울했는지 따지듯 물었다.
"근데 저한테 담배 안 피우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방금?"
"제가요? 언제요?"
"아니 방금 전에 분명히···."
"그냥 물어본 건데요? 제가 담배 피우게 생긴 얼굴이냐고요."
"아···."
도훈이 말장난하듯 가볍게 넘기며 담배를 건넸다. 그 모습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담배를 뽑아든 모습이었기 때문에 민하가 깜짝 놀란 것처럼 물었다.
"어? 방금 어떻게 하신 거예요?"
"뭐가요?"
"마술이에요?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도훈이 피식 웃으며 이번엔 반대 손에서 카드를 뽑아들었다. 일전에 익힌 마술 트릭과, 인벤토리를 활용한 수법은 바로 앞에서 보는데도 진짜 마법처럼 느껴졌다.
"우, 우아! 진짜로 마술이네요? 그건 어디서 났어요?"
"방금 게임하면서 한 장 챙겼어요. 사실 마술이라긴 뭐하고 소싯적에 배운 손장난이죠."
"소싯적이라기엔 아직 어리신 거 아니에요? 몇살인데요?"
"그쪽은요?"
"제가 먼저 물었는데 질문을 질문으로 받네요?"
"뭐, 대답하기 싫으면 말든가. 전 별로 안 궁금해서."
도훈이 의도적으로 민하를 무시하자, 민하도 약이 올랐다. 어지 간한 사내들은 자신의 미모에 사족을 못 썼는데 도훈은 목석처럼 꿈쩍도 안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참나···."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민하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저 자신감은? 희재 오빠 말대로 그냥 싸가지 없는 놈인가?'
누가 봐도 티꺼운 태도긴 했지만, 민하는 도훈이 마냥 밉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쳐내기에는 너무나 자기 스타일이었던 것.
키도 185에 이를 만큼 크고, 얼굴 역시 보기 드물게 잘생긴 미남이었다. 더구나 VVIP만 출입 가능한 도박장에 들어온 걸 보면, 어린 나이에 비해 돈도 제법 있는 게 분명했다.
물론 나이가 어리니 사업을 한다거나 고액의 연봉을 받는 것은 아닐 테고 집이 아주 잘산다고 보는게 맞았지만.
'흐음, 우리 클럽에 영입시키면 딱인데 여간 틈이 안 보이네. 그냥 나린이한테 맡길 걸 괜히 나선다고 했나봐. 쪽팔려서 어떻게 하지?'
나린은 자신과 친구였다. 클럽 내에서 유일한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평소 죽이 잘 맞는 사이긴 하지만 약간의 라이벌 의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보통 남자를 꼬실 때 적극적으로 나서는 쪽은 나린이었는데, 이번엔 도훈의 외모가 마음에 들어서 자신이 굳이 나선 것이었다.
'하아-. 나린이 그년이 이 일 가지고 두고두고 놀릴텐데···. 쪽 팔려서 어떡하지? 말 걸었다가 까였다고 말할 수도 없고.'
묵묵히 담배를 피우던 도훈이 민하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불쑥 물었다.
"저 근데···."
"네?"
"옆에 같이 오신 분은 나이가 어떻게 돼요?"
"예? 희재 오빠요? 오빠 올해 마흔···."
"아니 남자분 말고요. 그 옆에 염색하신 여성분이요."
"아···."
혹시나 기대했던 민하는 도훈이 나린에게 더 관심을 보이자 갑자기 기분이 팍 상했다. 자신에게 쌀쌀맞았던 이유가 사실은 나린에게 더 관심이 있어서였다는 반증이기 때문이었다.
"그쪽은 나이가 궁금하긴 하네요."
"···그렇게 궁금하심 직접 물어 보시든가요!"
기분이 상한 민하는 토라진 것처럼 훽 고개를 돌리더니 등을 지고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아씨 뭐야. 진짜. 하여간 나린이 고년 때문에 되는 일이 없네.'
나린은 클럽에 들어와서 사귄 친구였다. 그전까지 최연소 멤버이던 민하는 나린이 들어오면서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나눠가지게 되었다.
청순하고 순진하게 생긴 민하와 달리, 나린은 겉보기에도 아이 돌처럼 화려한 스타일이었다. 머리도 늘 염색하고 다녀서 인지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와 패션감각을 뽐냈다.
둘 다 몸매가 좋았지만, 나린은 특히 가슴이 평균보다 많이 큰 편이었고 또 그걸 대놓고 과시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민하는 그 부분에서 살짝 열등감을 느꼈다.
막내랍시며 독차지하던 관심도 나린과 나눠가지게 된 것도 불만이었다.
'하. 나린이 걔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줄도 모르고···. 하여간 남자들은 머리가 텅 비었다니까? 가슴 큰 여자만 좋아하고.'
민하가 토라져 등 돌린 모습을 보고 도훈이 씩 웃었다.
'어때? 내 말 맞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녀가 다른 여성과 라이벌 관계라는 걸요.]
'여자들은 원래 친한사이에도 늘 비교하기 마련이거든. 게다가 두 사람이 스타일이 확 다르잖아. 한쪽은 순하고 착하게 생긴 미인이고, 다른 한쪽은 화려하고 살짝 싸가지 없게 생겼고.'
[그게 왜요?]
'만약 한쪽이 완전히 우위를 가지고 있는 관계라면, 절대 그렇게는 같이 안다니거든. 하지만 각각 개성을 발휘하면서도 함께 뭉쳐있다는 것은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다는 뜻이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달까?'
[호오, 그래서 일부러 민하양을 자극하기 위해 나린양에 대해 궁금한 척 하신 겁니까?]
'그렇지. 남자보다 훨씬 질투를 심하게 느끼는 게 여자니까. 그리고 질투가 바로 실수를 만들어내고.'
"뭐, 알려주기 싫으면 말든가."
도훈이 계속 띠껍게 굴자 민하도 골이 났는지 돌아서면서 팔짱을 끼고 따졌다.
"댁은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네?"
"사람을 면전에서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제가요? 제가 누굴 무시했는데요?"
"아니 방금···. 나린이 나이는 궁금한데 저는 안 궁금하다면서요?"
"그게 왜 무시죠?"
"와···. 진짜 말이 안 통하네."
"그쪽이야 말로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니에요?"
"네?"
"아니 뭐, 그쪽이 제 나이 물어보면 제가 재깍 대답해 줘야 해요? 그리고 막말로 담배를 공짜로 얻어 피운건 그쪽인데, 제가 무슨 그쪽한테 빚진 것도 아니고."
"아니, 담배는 그냥!"
"그냥 뭐요?"
민하는 도훈에게 호감을 드러내고 따로 말을 걸기 위해 담배를 빌리려했다는 속내만큼은 차마 밝힐 수 없었다. 그건 너무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고, 자존심이 상했다.
"···됐어요. 제가 사람 잘 못 봤나봐요."
"뭘 잘 못 봐요? 제대로 봤구먼."
"······?"
"나한테 관심있어서 말 건 거죠? 아까부터 저한테서 눈을 못 떼시던데?"
[아니, 주인님. 이건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닙니까?]
'왜? 공략 대상도 아니고 공들이며 따먹고 싶은 상대도 아닌데.'
[그렇다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가신다고요? 이게 통할리가 없잖습니까?]
'안 통해도 상관없으니까 막 던지는 거야. 로우 리스크, 하이 리턴이랄까?'
[아···.]
"과, 관심이라니 무슨 말도 안되는···."
도훈이 한 발자국 더욱 가까이 근접했다. 민하가 놀라서 뒷걸음질 쳤지만, 흡연 부스가 좁은 편이라 금세 등에 벽을 부딪치고 말았다.
"왜, 왜요?"
"관심 없으면 말고. 난 살짝 관심 생겼는데."
"······."
민하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심장이 막 쿵쾅거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살면서 이렇게 남자 때문에 당황한 적이 언제였는지 싶은 정도였다.
매사 틱틱 거리는 사내가 자신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었다.
'뭐, 뭐야 대체. 나를 뭘로 보고···.'
민하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똑바로 대답했다.
"지나치게 무례하시군요."
"제가요?"
"숙녀에게 그런 행동은 실례인 거 몰라요? 갑자기 훅 다가와서는. 저, 위협감 느꼈다고요."
"위협 맞아요? 설렌게 아니고?"
"무, 무슨···."
"풉-. 겁먹은 표정이 더 귀엽네. 사실 금발 머리는 제 스타일아니에요. 전 그렇게 천박한 여자 별로 안 좋아해요."
"아니 방금 전까지는···."
"두 분이서 친구인것 같아서 그쪽분 나이를 알면 자연스럽게 나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돌려서 물어본 거였어요."
"아···."
상대를 들었다 놨다 하는 화법에 민하는 속수무책이었다.
'뭐지 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나를···.'
민하는 사실 나이에 비해 훨씬 조숙한 편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 스물 다섯이지만, 남자를 겪은 경험으로 치면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스무살에 만난 남자친구를 따라 난교 클럽에 갔다가 성적으로 완전히 눈을 뜨고 만 것이었다.
난교 클럽, 혹은 스와핑 클럽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민하는 수없이 많은 남자들과 별의 별 섹스를 다 겪어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그런 그녀가 처음보는 도훈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은, 자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끽해봐야 동갑이거나 어려 보이는 도훈이,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을 풋내기 취급하는 것이다.
'끽해야 졸부 아들에 도박이나 좋아하는 양아치같은데···.'
민하 역시 돈으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현 클럽장인 김희재가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것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IT 업체에 근무했던 그는, 2010년 비트코인의 태동기에 거금을 투자해 엄청난 부를 일군 사람이었다.
이미 5년 전부터 일하지 않고 매년 수십억씩 탕진해도 평생 다 못 쓸 재산을 모았고, 지금은 그때보다 몇배는 더 부자가 되었다는 풍문이 돌았다.
최근엔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5년전과 비교하면 코인가격이 그사이 몇배나 뛰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클럽에 있는 여자 멤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들이 직장에 다니면서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직장 월급의 몇배나 되는 용돈을 쥐어주고 있었다.
대신 그가 이따금 심심할 때 부르면 옆에서 함께 시간을 때워주는 게 유일한 업무였다. 도박을 하지도 않는데 굳이 사설 도박장까지 따라온 것도 그런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