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 ex wife-11-
도훈은 돈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 남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검은 뿔테를 쓰고 있는 남성은, 겨울 날씨에 맞게 바바리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기품이 있어 보였다. 이런 도박장보다는 변호사 사무실이나, 대기업 중역 자리에 앉아 있어야 걸맞는 인물처럼 보였다.
'저 새끼 뭐지?'
[네? 왜 그러십니까?]
'가만 보니까 옷도 명품이잖아?'
[저게 뭔데요?]
'헤르메스.'
[비싼 건가요?]
'비싸다 뿐이야? 명품 중의 명품이라고 보면 돼. 채널이니 꾸지니 루비이통이니 하는 것들보다 훨씬 비싸지. 심지어 저기선 액세서리도 아무한테나 안 팔아.'
[그럼요?]
'일단 옷이라도 한 벌 사야 회원으로 인정해서 지갑이니 백같은 것도 살 수 있거든.'
[그렇군요. 단순히 돈이 많아서 마음에 안드시는 겁니까?]
'아니. 옆의 여자들이 너무 예뻐서.'
[네?]
도훈이 보니 김희재라고 이름을 밝힌 인물은 양 옆에 젊은 여자 둘을 병풍처럼 끼고 있었다. 한명은 노란 머리로 염색한 마를린 먼로 스타일의 화려한 미인이었고, 또 한명은 수수하게 생긴 동양적인 미인이었는데, 도저히 이런 자리에는 안 어울릴 것처럼 청순한 얼굴이었다.
'대체 뭐하는 새낀데, 양 옆에 꽃을 병풍처럼 두르고 게임을 하느냐는 거야. 안 그래도 테이블에 자리가 없어서 입석으로 구경하고 있는데.'
도훈이 살짝 짜증난 투로 자신을 안내한 웨이터에게 물었다.
"저 자린 빈 자리 아니에요?"
"네?"
"아니 저 바바리 코트 걸친 남자 옆 자리요. 여자들은 그냥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훈의 불만을 알아차린듯, 웨이터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아, 구경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뭐가 아니에요? 자리에 칩도 하나 없는데. 그냥 과시하려고 옆에 앉혀둔 거 같은데?"
"그게 아니고, 저 신사분께서 테이블 값을 미리 지불하셨습니다."
"네?"
"테이블 피를 지불하면 게임에 참여하지 않아도 자리를 차지할 수 있거든요. 옆에 다른 손님이 앉으면 불편하시다는 분들이 계셔서 그렇게 룰을 정했습니다."
"아니, 무슨 그런···."
웨이터의 설명을 듣다보니 도훈은 어이가 없었다. 마치 영화관에서 양 옆에 모르는 사람이랑 앉기 싫다고 좌우로 3열을 한꺼번에 예매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얼만데요? 자릿값이?"
"예?"
"아니. 그런 룰이 있다면 저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얼마면 저렇게 게임도 안하면서 의자를 차지해도 되는 거냐고요."
"그게···. 하룻밤에 2000만원입니다."
"···예?"
"2천만원을 선불로 지불하고 자리를 잡으신 거라서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웨이터의 말에는 은근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게임하는데 옆에서 구경하는 비용으로 두당 2000만원을 냈으니, 돈 없으면 닥치고 있으라는 투였다.
현금 4000만원을 칩으로 바꾼 도훈마저 말문이 막히는 금액이었다.
'미쳤네.'
[주인님 말대로 정말 엄청난 부자인가 봅니다. 한번 게임하는데 자릿값으로 주인님 판돈만큼을 지불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무슨 저렇게까지.'
도훈은 괜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웨이터를 닦달해봐야 달라진건 없었다. 어차피 사설 도박장의 룰은 호스트가 정하기 나름. 이미 정해져있는 규칙에 뜨내기에 불과한 도훈이 불만을 제기해봐야 바뀔 것은 없었다.
'돈으로 내가 밀릴 것 같진 않지만 좀 짜증나긴 하네.'
[자존심이 상하신 겁니까, 아니면 양 옆에 여자들이 너무 예뻐서 그렇습니까?]
'둘 다야.'
확실히 수상한 사내였다.
중년인 그에 비해 트로피처럼 옆에 끼고 있는 여자들은 고작 20대 초중반 쯤으로 보였다. 게다가 동시에 두명인 걸 보면, 여자 친구라기 보단 섹파가 확실했다.
그때 마침 김희재가 게임을 하고 있던 테이블에 손님 하나가 모든 칩을 잃고 자리를 일어섰다.
"아오, 오늘 따라 되는 게 없네. 난 여기서 이만 접겠네."
"칩을 현금으로 바꿔올까요?"
"아냐 됐어. 킵해놔. 다음주에 시간 나면 또 올테니."
손님이 자리를 털고 나오자 도훈의 옆에서 기다리던 웨이터가 자리를 추천했다.
"손님. 한 자리가 비었는데, 저기 앉으시겠습니까?"
"그러죠."
도훈이 바카라 테이블에 앉았다.
바카라 테이블은 뱅커 역을 하는 딜러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펼쳐진 모양이었는데, 도훈은 김희재가 정면으로 보이는 끝 자리에 앉게 되었다.
희재가 도훈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환영했다.
"새로운 손님이 오셨구먼. 행운을 빕니다."
"······."
도훈은 대꾸도 않고 자리에 앉고선 코인 트레이를 자리에 올렸다.
무려 현금 4000만원의 코인이었지만, 테이블 위에서 게임을 하는 다른 손님들을 보니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뭐야? 여긴 1억이 기본인가? 하룻밤에 도박으로 1억을 태워?'
[대체 뭐하는 사람들일까요? 아무리 VVIP룸이라지만 판이 너무 큰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멤버가 교체되고 다시 뱅커가 카드를 돌렸다.
도훈은 일단 분위기를 보기 위해 기본 판돈만 걸면서 천천히 게임을 익혔다. 하지만 고액 게임 테이블이라 그런지 최소로 걸어야 하는 단위가 50만원짜리 칩이었다. 몇 번만 연속으로 게임에 지게 되면 순식간에 수백만원을 털리는 것이다.
수백억대 부자인 도훈으로서도 이해하기 힘들만큼 지나친 베팅액이었다.
'젠장. 그냥 시간 좀 때우러 왔다가 이게 뭐야? 순식간에 300만원 날린 건가?'
[안내 데스크 직원이 난처해 했던 게 이것이었군요. 4000만원으로는 진짜 몇시간도 못 버티겠는데요?]
'일단 있어봐. 대충 패턴을 알 것 같으니까.'
[패턴이요?]
'어차피 홀짝 게임이야. 뱅커랑 플레이어 승률을 보면서 적당히 가면 반반 싸움은 된다는 거지.'
연속으로 계속 칩을 잃던 도훈이 마침내 돈을 따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팅액이 적으니 따는 돈도 적었다.
도훈을 눈여겨 보고 있던 희재가 조언하듯 말했다.
"이보게, 젊은 친구. 인생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네. 좀 더 과감해도 될 것 같은데?"
아까부터 자꾸 아는척 하는 희재가 고까웠던 도훈이 표정을 굳히며 대꾸했다.
"난 댁한테 조언 같은 거 부탁 안 했는데?"
도훈이 반말로 되받자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이 한방 맞은 것처럼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떡대 한 명이 불쑥 나설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알고 보니 양 옆에 여자들 뿐만 아니라, 개인 경호원도 대동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물론 도훈은 미동도 않고 똑바로 쳐다볼뿐이었다.
'병신 같은게 어디서 오지랖이람? 저딴 덩치 믿고 까부는 건가?'
떡대가 나서려고 하자 그제야 중년 남성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냐 됐어. 젊은 혈기에 그럴수도 있지. 나도 어릴 땐···."
"혼자서 뭐라고 구시렁 거리는 거야? 게임이나 처 하세요.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 말고."
도훈이 한 번 더 세게 나오자 갑자기 테이블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같이 게임하던 손님들도 놀란 눈으로 도훈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도훈이 보니 다들 중년 뿔테 사내가 대단한 손님이라는 걸 의식하는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도훈은 너무 어리고, 불청객 같은 존재였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갑자기 정장을 입은 가드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딜러가 테이블 밑에 있는 호출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카지노의 가드 역시 중년 사내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큰 손이자 단골인 그를 예우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니야. 별 일 아닐세. 내가 주제 넘게 참견해서 저 청년이 기분이 상했던 것 같네."
중년 사내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는지 적당히 무마해 가드들을 돌려 보냈다. 가드들은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도훈에게 굳이 다가가 경고했다.
"불필요한 소란을 피울 시 퇴장 조치 당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도훈은 모두 한 편인 것처럼 중년 사내를 거드는 것을 보고 비위가 상했지만, 괜히 별것도 아닌일로 도박장에서 쫓겨나면 곤란 했으므로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가드들이 물러나자 다시 뱅커가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왜 그러셨습니까?]
'뭐가?'
[너무 일을 키우시는 것 같아서요. 그냥 무시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럴수도 있는데, 사람을 어리다고 깔보는 것 같아서 욱했지 뭐야. 날 언제 봤다고.'
[주인님. 물론 주인님이 김희재라는 사람보다 부자이고, 대단하신 분인건 알지만 괜히 이런 곳에서 불필요하게 힘을 쓰실 필욘없습니다.]
'알았어. 자중할게.'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도훈은 김희재라는 중년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런 척진 것도 없는데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사내였다.
게임이 다시 진행되었고, 도훈은 여전히 따고 잃기를 반복했다.
다만 달라진 것은 김희재 옆에 있던 여자들이 유독 도훈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무시하던 그들은 도훈이 보여준 패기에 흥미가 생긴 듯 했다.
자기들끼린 속삭인다고 귓속말을 하긴 했지만, 귀가 밝은 도훈에게 안 들릴 수가 없었다.
-오빠, 쟤 은근 괜찮지 않아? 얼굴도 반반한게.
-됐어. 나도 처음엔 그래서 친해보려고 했는데, 어린 새끼가 영싸가지가···.
-이번에 여성 회원도 한 명 들어온다는데, 남자도 한 명 받아야 공평하지.
-아서라, 나린아. 아직 면접도 안 봤거든?
-오빠가 힘들면 내가 꼬셔볼까?
-나린이 네가?
-아님 민하를 시키든지.
도훈이 가만 듣고 있자니, 자신을 두고 꼬시니 마니 하는 수작을 부리는 중이었다. 뱅커와 게임을 하는 척 하면서 자기들끼리 속삭이고 있었지만, 여자들의 시선은 도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유난히 청순해 보이는 이미지의 민하라는 여자 역시 도훈에게 흥미가 돋는지 말했다.
-정말 내가 해?
-그래, 남자들이 너한텐 별 의심 안하잖아. 순진하게 생겨서.
속으론 발랑 까졌으면서.
-뭐래? 근데 너무 어린 거 아니야? 20대 초반? 끽해야 스물 다섯이나 되겠는데?
-어리면 땡큐지. 우리도 또래가 있으면 좋으니까.
-그럴까?
여자들끼리 양 옆에서 조잘거리기 시작하자 희재가 성가시다는 듯 두 사람에게 한 마디 했다.
-나 게임에 집중 안 되니까 떠들거면 흡연실 가서 떠들어.
-오빠, 설마 젊은 남자 들어온다고 질투하는 거?
-정말? 희재 오빠가 질투도 해?
-뭐라는 거야? 게임에 집중 안된다고.
도훈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저것들 좀 수상하지 않아?'
[네? 뭐가 말입니까?]
'아까부터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거 엿듣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섹파 사이가 아닌것 같은데?'
[네? 그럼요?]
'몰라. 무슨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만 들어서는 생각보다 동등한 관계인가봐. 난 또 트로피 와이프처럼 주변 사람한테 과시하려고 데리고 다니는 장식품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데.'
[호오.]
'그리고 날 뭐 꼬신다느니 하는데도 남자가 별로 신경도 안 쓰는것도 이상하고.'
[주인님을 꼬신다고요? 정말로 여자들이 그렇게 말했다고요?]
'응. 확실히 들었어. 넌 안들려?'
[애석하게도 저에게는 주인님처럼 예민한 청각능력이 없으니까요. 근데 듣고보니까 너무 수상한데요? 설마···.]
'설마 뭐?'
[스리섬, 아니 포섬이라도?]
'엥?'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면 옆에 앉힌 여자들이 주인님을 유혹한다는 데 신경도 안쓸리가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니 저 희재라는 사내도 주인님에게 친한 척 하려고 했지 않습니까?]
'누가 응해준대? 웃기고 있네. 확 대물로 조져 버릴라.'
[그게 저들이 바라는 거 아닙니까?]
'아 맞다. 좆으로 응징하면 꾐에 말려드는 거구나. 절대 안 줘.
저 새끼 재수 없어서.'
[···라고 하기엔 주인님은 너무 아무나 잘 주는 편 아닙니까?]
'뭐라는 거야? 나도 눈이 있거든?'
[주인님의 높은 눈을 충족시킬 만큼 둘 다 보기 드문 미인인 것 같은데요.]
'음, 그건 인정.'
도훈도 사실 힐끔 힐끔 여자들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동시에 느낀점은, 나린이라는 금발 머리의 여자나 민하라 불린 청순녀나 보기드문 미인이라는 점이었다.
단순히 화장을 떡칠해 얼굴만 그럴듯해 보이는 게 아니라, 몸매역시 쭉쭉 빵빵 늘씬한 편이었다. 특히 나린이라는 여자는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가슴골이 굉장히 깊어 똑바로 쳐다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도훈은 두 사람의 훌륭한 비쥬얼을 떠올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수긍했다.
'···뭐, 공짜로 주면 먹을지도.'
그때 민하라는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갑자기 도훈의 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