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 ex wife-3-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비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급히 통화를 거부했다.
"가지가지 하네. 상관 앞에서 무음모드 몰라?"
"죄,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깜빡···."
"그래. 뭐 난 이제 끈 떨어진 년이라 이거지? 어차피 교회 내에서 완전히 팽당했으니까. 그래서 예의를 차릴 필요도 없다는 거야? 이런 시건방진 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권사님께···."
비서가 쩔쩔매면서 사과하는데,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받지 않은 탓에 상대가 한 번 더 전화를 건 모양이었다.
비서가 당황하면서 수신을 거부하는데 갑자기 미숙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대체 누군데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지? 너 설마 벌써 구혜진 쪽에 붙어 먹은 거 아니야? 나 밀착 감시하라고 지시받은 거 아니냐고!"
"절대로 아닙니다! 권사님, 어찌 제가 그런···."
"내놔."
"네?"
"폰 내놓으라고. 확인해 볼테니."
"정말로 아닙니다. 저번에 그···. 직접 상담하셨던 최지안 신도의 전화였습니다."
"최지안이 누군데?"
"그 왜···. 남편이랑 사별하고···."
"됐고. 난 기억 안 나니까 당장 폰 줘."
"아···."
"내가 직접 걸어보면 알 거 아니야?"
의심이 많은 미숙이 비서의 폰을 빼앗더니 부재중 남은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기다렸다는 듯 상대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전도사님! 아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세요? 내일 주일 예배참석하려면 몇 시까지 가야 하느냐고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어요.
산뜻한 여자 목소리를 들은 미숙은, 마침내 지안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아, 남편 잡아먹었다는 그년이었구나?'
개명한 이름인 최지안은 무려 50억 상당의 재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구원회의 특별신도가 되어, 참회방 서비스를 받으려던 미망인.
하지만 이미 권사 자리에서 잘리고, 자택 연금 중인 미숙은 지 안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자신의 처지가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추락하고 나니, 남자만 밝히는 그녀가 너무 고깝게 느껴졌다.
"전도사 아니고, 권미숙 권사입니다. 기억하시죠? 일전에 한번 커피숍에서 만났었는데."
-어머, 권권사님! 죄송해요. 저는 전도사님에게 전화 건 줄 알고···. 제가 정신이 없어서 번호를 잘못 걸었나봐요.
"아닙니다. 전도사 폰 맞습니다. 김 전도사가 지금 화장실에 가서 제가 대신 당겨 받았어요."
-아, 그러시구나. 불쑥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교회에 처음 나가는 거다보니 궁금한 게 많아서.
"뭐가 그렇게 궁금하신데요?"
미숙이 삐딱한 자세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현재 모든 게 마음에 안들었기 때문에 말이 좋게 나올리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처음부터 최지안을 버러지 보듯 멸시하고 있었다.
-어, 그게···. 주일 예배를 참여하고 나서 그 참회방에···.
"아, 그랬었죠? 남편 잃은 지 몇달이나 됐다고 벌써 기둥서방을 찾아다니신다고 하셨었나요?"
-···예, 예?
"그런데 저희가 따로 조사해보니 최지안 님께서도 범죄 혐의가 상당히 짙은 거 같던데, 어떻게 교회보다, 감방에 먼저 들어가시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갑자기 무슨 말씀을···.
"가서 간수한테 부탁해서 남자 제소자 방으로 넣어 달라고 하시라고요, 이 씨발년아! 거기 있는 사내 새끼들한테 돌아가면서 돌림빵 당하면 공짜로 즐기고 좋겠네!"
-뭐, 뭐라고요! 지금 무슨!
"씨발, 얼굴도 반반하게 생긴 년이 아랫도리 하나 간수를 못해서 그렇게 밝히고 다니는 게 한심하다 한심해. 쯧쯧. 너 진짜 우리한테 걸렸으면, 네가 물려받은 재산 싹 다 털리고 약물 중독자로 폐인되는 거였어. 그거 알고는 있니?"
-당신, 지금 말 다했···.
"지랄."
미숙은 마음에 있는 말을 모두 쏟아낸 다음 기분 나쁘다는 듯 핸드폰도 던져버렸다.
콰직벽에 부딪힌 핸드폰이 와장창 박살이 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졸지에 고가의 스마트폰이 박살난 비서가 울상을 짓자, 이를 지켜보던 권 권사가 빼액 소리쳤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너도 꺼져!!! 씨발, 내가 이 교회에 평생을 다 바쳤는데 감히 나한테!"
사법 처리 전까지 자택 연금이 결정된 권 권사는 히스테리가 날이 갈수록 극심해졌다.
* * *
통화를 막 끝낸 지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지금 무슨 대화를 나눈건지도 감이 오질 않았다.
"뭐, 뭔데? 미친 사람이었나?"
내일 교회에 갈 거라고 최대한 단정해 보이는 옷차림을 고르고 있던 지안은 얼이 빠진 듯 서있다가 갑자기 화가 치밀어 고르고 있던 장신구와 옷을 죄다 집어 던졌다.
"하-. 씨발, 진짜 어이가 없네? 교회 들어오라고 꼬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지안이 거실 창문을 열더니 전자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궐련을 피우다가, 결혼 후 몸에서 냄새가 날까 봐 바꾸었던 전자담배를 지금껏 피우는 지안이었다.
"개빡치네 진짜. 뭐라고? 전 재산을 탈탈 털려고 했었다고? 약물중독자 폐인으로 만들어? 이것들이 완전히 나를 호구로 봤구나? 확 변호사한테 전화해서 죄다 고소 먹여버릴까 보다."
하지만 지안은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남편 살해 혐의로 불구속 상태로 있는 그녀로선,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게 좋다는 변호사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개 열받네. 남창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가 있다고 해서, 간만에 코나 풀려고 기대하고 있었더니만."
지안이 굳이 구원회를 선택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당장 호빠를 가거나, 돈이 필요한 어린 남자를 꼬셔서 떡을 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이정우의 재산을 몽땅 가로챘고, 그녀의 딸은 진즉 시어 머니에게 보내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만에 하나 그러한 유흥행위가 검찰측에 적발될 경우, 다음에 있을 2심에 너무 큰 악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는 것 뿐이었다.
남편이 죽은지 1년도 채 안 지난 미망인이 기다렸다는 듯 유흥을 즐기고 다니면 괘씸죄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일에 교회를 다니는 행동은, 적어도 남자를 만나 떡을 친다는 의심은 피할 수 있는 좋은 눈속임 수단이었다.
오히려 남편을 잃은 슬픔에 종교에 기대는 인상을 심어 주어 차후 판결에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요소였다.
그런데 잔뜩 기대했던 구원회 예배가 엎어지자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뭐냐고 진짜! 칼로 전남편을 찌른 것도 그 새끼고, 난 그저 협박에 못 이겨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인데···. 왜 대체 나한테 이래?"
개명 전 윤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이 일 때문에 법원에 정식으로 개명까지 신청해둔 상태였다.
상간남과 공모해 남편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언론 기사가 나는 바람에 그녀를 아는 지인들 사이에서 살인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었다.
재판만 끝나고 나면 이름도 정식으로 바꾸고 외국으로 떠야할 판이었다.
"하여간 개 같은 전남편 새끼. 죽어서도 나를 괴롭히다니. 짜증나 진짜."
지안이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대며 푸념했다.
하지만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비록 이정우에 대한 살해사건이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이긴 했지만, 이후의 처리에 있어 그녀는 결코 협박에 못 이겨 끌려다닌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암매장 위치를 같이 알아보거나, 남편의 재산을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면서 도망칠 계획을 꺼낸 것도 본인이었을만큼, 그녀는 적극적인 공범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실대로 진술하면 법정에서 불리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은 이후, 그녀는 마치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이며 상간남의 협박에 못 이겨 끌려다녔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항변했다.
그렇게 계속 억지 주장을 하다보니, 마치 자신이 진짜 억울한 피해자인냥 믿어 버린 것이었다.
스스로 내뱉은 거짓말을 진실처럼 믿어버리는 전형적인 리플리 증후군의 증상이었다.
"짜증나. 재판은 대체 언제 끝나냐고! 죄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금욕생활을 해야 하는 건데? 확 그냥 마음 같아선···."
지안은 몇달간 섹스를 못하고 굶주린 상태였다.
남편에 대한 살해 혐의를 받는 상간남은 증거 인멸과 도주 우려로 진즉 법정 구속된 상태였고, 해당 사건 이후 그녀가 만나던 남자들 마저 괜히 엮일까봐 겁을 먹고 그녀의 연락을 씹었다.
즉, 오랫동안 즐겨오던 남자들로 부터 완전히 외면받은 상황.
섹스를 너무나 밝혀 남자 없이는 잠도 잘 못자던 지안에게는 무척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결국 참다 못한 지안이 절친에게 전화했다.
그녀의 절친은 의상실을 운영하는 '세라'였다.
그녀와 학창 시절부터 못된 짓을 하며 어울려 다닌 친구였는데, 서로 바람 피우는 걸 들키지 않도록 알리바이를 자처할 정도로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였다.
사건 이후 죄다 그녀를 비난하고 떠났지만, 오직 세라만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었다.
"세라! 잘 살아? 요새 통 연락이 없네? 많이바쁜가 봐?"
-아니? 한가한데? 흐, 흐읏.
"···방금 무슨 소리야? 너 혹시 지금 떡치고 있니?"
-뭐, 뭐래 미친년이? 누가 보면 가게 운영은 안하고 남자만 만나러 다닌 줄 알겠네.
"아니었어?"
-흐, 흥···. 자기야 살살해.
"와, 진짜로 하고 있잖아? 그럼 전화를 왜 받는 거야?"
-신경 쓰지마. 오히려 즐기니까. 나보고 하면서 통화해 달라더라. 하읏, 흣, 기, 깊다고!
다른 남자와 떡을 치면서 통화를 하는 세라의 모습에 지안은 더 더욱 억하심정이 들었다. 친구는 보란듯이 지금 이순간에도 아랫도리를 함부로 놀리고 다니는데, 자신은 졸지에 수녀처럼 금욕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야! 그냥 다 끝나고 네가 전화해. 짜증나게 진짜 사람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미안. 이이가 엄청 오래가서 말이야. 알지? 접때 말했잖아. 한번 시작하면 최소 1시간은···, 꺄하?, 알았어. 두 시간도 거뜬하다는.
그때 갑자기 전화기 사이로 남자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접때 말한 제수씨지? 제수씨? 심심하면 여기 와서 셋이 같이 할래요?
-뭐래? 미쳤어? 윤하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음탕한 남녀의 대화를 엿듣고 있자니 지안도 덩달아 몸이 달았다.
마음 같아선 친구고 뭐고 셋이 같이 스리섬에 껴달라고 애원할 판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런 부탁까진 못하겠든지 입을 꾹 다물기만 했다.
-미안해. 이이가 좀 짓궂지? 지 마누라 지방 출장 갔다고 아침부터 나를 불러서 들들 볶더라니까? 맞다. 너 근데 왜 전화했어?
이제야 통화 목적을 묻는 친구를 원망하며 지안이 푸념하듯 말했다.
"너 저번에 알려준 전도사 기억나?"
-아, 그 교회 전도사라는? 왜? 그 교회 들어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말도 마. 오늘 갑자기 전화하니까 내 재산을 다 빼앗을 계획이었다는 둥, 나보고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둥 아주 악담을 퍼붓는데···."
-뭐? 진짜? 그럴리가 없는데? 진짜로 너한테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아니, 그 전도사가 아니라 거기 권사가."
-권사? 권사는 또 누구야? 암튼 미안. 나는 우리 단골 손님이 알려줘서 연결시켜 준 것 뿐인데···. 거기 영 못 쓰겠다 얘.
"됐고, 생각하면 더 짜증나니까 그 얘긴 그만 하자. 너 저번에 말했던 거기 연결해 줄 수 있어?"
-거기라니?
"왜, 무슨 비밀 클럽에 아는 사람 있다면서."
-그 스와핑 클럽?
"응."
-윤하야. 아니 이름 바꿨지? 지안아, 거긴 좀 아니야. 꺄흑, 잠깐만 나 통화좀 하고, 아잉 자기야, 나 중요한 통화하잖아···. 흐, 흐읏!
다시 세라의 목소리가 거칠어지자 지안은 수화기를 창문 밖으로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야 했다.
하나 남은 친구마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다른 남자랑 떡 치는 데 집중하자 울컥 서운함이 든 것이다.
자신은 독수공방 외로움에 미쳐가는데, 절친이라는 년은 전화 통화로 자신의 질펀한 섹스 라이프를 생중계 하고 있었다.
'그래. 인생은 원래 독고다이지. 내가 누굴 탓하겠어.'
"···됐다. 넌 떡이나 실컷 쳐라. 나처럼 제발 걸리지나 말고."
-지안아, 미안 잠깐 내가 다시··· 흐읏···. 좀 이따가···. 전화 할게. 도저히 지금은 흐아앙!
"끊어, 이 썩을 년아!"
지안이 빼액- 소릴 치더니 통화를 끊었다.
한마디로 되는 게 없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