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 구원회-130-
도훈이 의아한 마음으로 계속 쳐다보는데, 문득 그의 손이 잘린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반쯤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만석이 손이 들어간 상태로 사망하는 바람에, 그의 팔이 인벤토리에 끼어 버린 것이었다.
'얼래? 이 자식, 인벤토리를 열고 죽었는데?'
[어엇, 정말입니까?]
'혹시 주인이 죽으면 인벤토리는 어떻게 돼?'
[인벤토리는 해당 소유주만 열 수 있습니다. 아공간의 사용 규칙 때문에요. 그래서 소유주가 죽으면 자동으로 인벤토리는 폐쇄되며 두 번 다시 물건을 꺼낼 수 없습니다.]
'그럼 만약 이렇게 주인이 팔을 끼운 채로 문을 열고 죽으면?'
[이건 저도 처음 보는 경우라…. 열려 있다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호오.'
도훈은 장만석과 죽기 전 나눈 대화에서 그가 스스로를 아티펙트 제작자라고 말한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장만석의 인벤토리 안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제작해낸 기상천외한 아이템들이 가득할지도 몰랐다. 날 밤을 새느라 피곤해있던 도훈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렸다.
'잠깐, 그럼 이 인벤토리에 든 물건들은 현재로선 주인 없는 물건이네? 장만석이 사망했으니까?'
[원칙적으로 그렇죠.]
'아이템은 원래 다른 사람에게 양도가능 하지?'
[네.]
'그럼 여기 안에 들어있는 건 모두 내거네?'
[어엇. 그렇게 되나요?]
'장만석의 팔이 입구를 열어놓은 이상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낼 수 있는 거잖아. 이것도 모르고 시체를 태웠으면 안에든 아이템을 싹 다 날릴 뻔 했군.'
도훈이 흥분한 심정으로 장만석의 인벤토리 안으로 손을 불쑥 밀어 넣었다. 장만석이 사용한 인벤토리는 자신이 쓰던것과 비슷했기 때문에 사용법도 똑같았다.
허공에 팔을 집어 넣은 도훈이 뭔가를 잡아 꺼냈다.
"이게 뭐지?"
도훈이 꺼낸 물건은 나침반과 같은 모양이었다. 회중시계처럼 뚜껑이 달려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안에서 녹색의 화면이 나왔다.
'오잉? 뭐야? 레이더 장치처럼 생겼는데?'
그것은 바로 장만석이 처녀를 찾는데 사용했던, 처녀탐지기 아이템이었다. 지리산 근방에는, 반경 500미터 안에 처녀가 없었기 때문에 화면에 뜨는 것은 없었다.
'잠수함에서 보던 소나 탐지기같이 생기긴 했는데 용도를 전혀 모르겠군. 로시 너도 모르겠어?'
[장만석이 직접 제작한 아이템으로 보입니다. 기성품이면 데이터베이스 검색을 통해 물품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아이템이기 때문에 별도의 정보가 없습니다.]
'헐, 그럼 놈이 직접 만든 아이템은 전혀 용도를 알 수 없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마법 감정 마법을 이용하면 용도를 알 수 있습니다.
가끔 봉인된 아이템이나, 고대에 사라진 아이템들은 마법 감정 스킬을 통해 파악하기도 하거든요.]
'마법 감정? 난 그런 거 없는데?'
[주인님 같은 분을 위해 스크롤을 따로 제작해 팔기도 합니다.]
'얼만데?'
[스크롤 하나당 천 포인트입니다.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닐 겁니다.]
'그 정도면 뭐. 일단 아이템이 뭐가 있는지 다 꺼내봐야겠군.'
도훈은 팔을 깊숙이 집어넣어 장만석이 평생에 모은 아이템을 싹 다 끄집어냈다. 원래 인벤토리는 본인이 사용자인 경우 물건의 위치를 추정해 곧바로 꺼낼 수 있었으나, 타인의 인벤토리는 정리 된 구조를 모르기 때문에 손에 잡치는 대로 족족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 인벤토리를 뒤진 도훈은 어마어마한 양의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기성품으로 보이는 소모품도 있었고, 몇 개는 미션이나 업적을 수행하고 받은 아이템도 보였다. 하지만 절반 이상은 장만석이 집적 제작한 물건인지 용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와, 이게 다 몇 개야?'
[주인님, 득템한 것 같은데요?]
'일단 여기서 감정할 시간 없으니까 내 인벤토리에 때려박자.'
도훈은 꺼낸 아이템들을 한 대 모아 자신의 인벤토리 안에 욱여 넣었다. 종류만 20여종이 넘었고, 가짓수는 몇배는 더 되었다.
[주로 포션 종류가 많군요. 장만석은 자신의 스킬로, 다양한 포션을 제작해 낸 것 같습니다.]
'자기 정액으로?'
[네. 원재료를 생각하면 좀 찝찝하긴 하지만, 어쨌든 연금술은 원소 성분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딱히 상관은 없을 겁니다.]
'원소를 바꾸는 게 가능해?'
[원래 연금술의 기원은 납으로 금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상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마법의 힘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죠.]
'대박이네. 정액으로 황금도 만들었겠다.'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죠. 황금보다 더 비싼 것을 만드는 쪽이 낫지만요.]
인벤토리를 싹 다 털어낸 도훈은, 죽은 장만석의 시체에 불을 붙였다. 도훈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불길이 화염방사기처럼 쏟아지더니 고열로 그의 몸을 불태웠다.
화르르르륵-!
내공 증진의 효과 덕분인지 도훈이 뿜어내는 화력도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불꽃의 색깔 역시 1100도를 넘어서는 푸른 빛이 보였다.
시체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자 도훈이 한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불로장생을 꿈꿨으나 한낱 재가 되어 사라지는 덧없는 인생이구나…. 쯧쯧. 인생 참 허망하군.'
엄청난 화력을 쏟아 부어 뼈까지 모두 가루로 만든 도훈이 남은 잔해를 발로 지근지근 밟아 없앴다. 이어 주변에 흩어진 낙엽을 모아 덮어주자 장만석의 시체는 아예 흔적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라졌다.
'좋아, 이걸로 미션 끝인가? 보상을 받을 시간이 된 것 같은데?'
힘든 미션을 완수한 도훈이 기쁜 마음으로 물었다.
[아직 끝은 아닙니다. 정의의 여신이 내린 미션의 목표는 장만 석의 죽음이 아니라 구원회의 분쇄였으니까요.]
'뭐? 장만석도 죽이고, 그의 동생하고 아들도 처리했잖아. 이럼구원회가 분쇄된거나 마찬가지 아니야?'
[아직 구혜진양이 완벽하게 구원회를 장악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장만수를 대리로 내세워 섭정을 하고 있고, 실제 신도들의 생활은 변한 게 없으니까요.]
'참나. 그럼 어떻게 해? 구원회 신도를 모두 다 죽여야 끝나는 미션이야?'
[당연히 죽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구혜진양이 구원회를 완전히 접수해서 그녀의 뜻대로 정상적인 교회로 정상화 시킬 수 있으면 미션이 완수될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이제부턴 주인님이 구혜진양을 도울 차례입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교회의 정상화를 이룰 수 있을테니까요.]
'하아-. 이놈의 구원회는 정말 지긋지긋하구먼. 한참 걸릴 거 아니야? 그때까지 나보고 구원회에 붙어있으란 소리야?'
[혜진양이 영특하고 추진력이 있으니 초반에 조금만 도와주시면 스스로 해결해내지 않겠습니까?]
'흐음. 골치 아프게 됐군. 다 끝난 줄 알았더니 이제 시작이라니.'
[그래도 지도부를 붕괴시켰으니 반쯤은 끝낸 거나 마찬가집니다. 의도치 않게 권미숙이 나머지 반대파를 모두 숙청하는 바람에 장로들 또한 완전히 초토화 되었고요.]
'이번 사태에서 살아남은 장로가 그럼 중립을 지켰던 유장로인가 한사람 뿐인가? 구혜진이랑?'
[네.]
'유장로라는 사람이 성수를 제작한다고 했지? 장만석이 만든 복제 아이템을 이용해서.'
[맞습니다. 끝까지 장만석에게 의리를 지킨 것을 보면, 심복중의 심복이었던 모양입니다.]
'일단은 놈이 더 이상 성수를 못 만들게 하는 게 관건이겠군. 다시 구원회로 돌아가야겠어.' 도훈은 마법의 문고리를 이용해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잠을 못자 피곤하긴 했지만, 그의 체력은 하룻밤 정도 날을 새도 거뜬했기 때문에 곧바로 유장로라는 사람을 찾았다.
유장로는 어젯밤 난리통에서 위기를 느꼈는지 짐을 챙겨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가 도훈에게 딱 걸렸다.
"거기 스톱."
"흐, 흐익!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웃기고 있네. 장만석에게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지?"
"저, 저는 그저 목사님이 시키는대로 성수를…."
"어딨어?"
"예?"
"성수를 만들어내는 물건 말이야."
도훈은 도망치려는 유장로를 붙잡아 성수를 복사하는 복제기를 찾아냈다. 복제기라고 해서 대단한 물건인 줄 알았는데, 조그만 정수기 모양의 작은 기계장치였다.
"이걸로 성수를 복제한다고?"
"보, 복제요? 배양이 아니라요?"
"뭔 소리야?"
"장 목사님 말로는 이것을 이용해 성수를 끊임없이 배양해 낼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구르트를 만드는 기계처럼요."
[장만석이 유장로에게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긴, 물질을 복제하는 장비가 있다는 게 알려졌다간 당장 사이언스지에 대서특필 되었겠네.'
"그건 내가 압수하겠다."
"흐, 흐익! 가져가십시오."
유장로는 무시무시한 도훈에게 쫄아서 그대로 복제기를 헌납했다. 현재 도훈은 구혜진이 특별히 고용한 용병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그가 어젯밤 벌인 활약 덕분이었다.
실제로 혜진은 도훈을 장목사의 비밀 경호원이라고 주변에 소개했고, 이제는 그녀를 따르는 경호팀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성수 복제기를 회수한 도훈은 고민 끝에 아이템을 부셔버렸다.
제작자가 죽은 마당에 다른 용도로 재활용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혹시나 남겨두었다가 악용할 여지가 있었기에 아예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었다.
박살난 복제기를 보며 도훈이 생각했다.
'장만석은 정말 어머어마한 능력자였구나. 처음엔 그저 정액싸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어떤 아이템이든 스스로 창조해 낼 수 있는 사기적인 플레이어였어.'
[활용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능력이긴 했습니다. 그가 더 욕심만 부리지 않았으면, 평생 자신의 능력을 좋은 일이 썼을텐데요.]
'결국엔 욕심이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심. 그 욕망에 무너져서 스스로가 악마가 되어 버린 거야.'
[주인님도 타산지석으로 삼아 경계하셔야 겠습니다.]
'그야 뭐…. 근데 정말 현자타임 후유증 때문이지 좆도 안 서 네.'
도훈은 어제 환각 마법진을 벗어나기 위해 현자타임 스킬을 쓰느라 그 부작용으로 강한 성욕 감퇴를 느끼고 있었다.
평소라면 기나긴 미션을 마무리하고 나서 보상으로 실컷 섹스를 즐겼겠지만, 지금은 조금도 섹스에 대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를 원하는 여자들 또한 저마다 복잡한 상황에 처해 엄두도 못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구혜진은 밤새 구원회를 접수하느라 지쳐 쓰러져 잠들었고, 사망 사고가 발생한 합숙소 역시 임 집사가 사망자를 수습하고 신도 들을 입단속 시키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교회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지도부인 장로단 역시 붕괴되면서 한동안 혼란기가 이어질 것은 불보 듯 뻔했다.
도훈은 최대한 빠르게 혜진을 도와 구원회를 안정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장만석이 세상을 떠난 지 3일이 지났다.
장만석은 공식적으로 실종이 아닌 사망으로 정리되었다. 시체를 찾을 순 없었지만, 아들 장석개가 아버지를 해쳤다고 누군가자백했기 때문이었다.
거짓 자백을 한 사람은 권미숙이었는데, 눈치가 빠른 그녀는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곧바로 장석개를 손절하고 배신을 한 것이었다.
모든 사태를 장석개가 꾸몄고, 자신은 그저 그가 시키는데로 명령에 따른 것 뿐이라고 울먹이며 항변했다.
하지만 혜진은 악어의 눈물에 속지 않았다.
장만석와 죽은 장로들을 대신해, 임시로 구원회를 통솔하고 있던 혜진은 권미숙을 비롯한 장석개의 잔당들을 모두 배교 행위를 했다고 규정하고 추방시켰다.
추방된 이들은 이후 사법처리를 받도록 조치했으며, 얼굴마담으로 내세웠던 장만수는 이틀 만에 실각하여 아프리카 선교를 떠난다는 핑계를 대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오롯이 구원회 전체를 접수해낸 구혜진은 참신하고 신앙심이 강한 인물들로 새롭게 장로회를 구성하고 교회의 정상화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도훈은 그 과정에서 혜진을 도와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처리했다. 또 더 이상 변장의 의미가 없어진 마당에 역용마스크마저 벗은 도훈은, 자신의 본 얼굴로 혜진에게 설명했다.
사실 박민용으로 꾸민 얼굴 자체가 변장이었다면서.
"말도 안 돼."
"믿거나 말거나 네 맘이야. 아무튼 이게 내 본 얼굴이고."
"…진짜로 정체가 뭐야 너?"
"말해도 모를 거야. 세상엔 모르는 게 좋은 진실도 있는 법이지."
"흠…. 근데 정말로 내일 떠날거야? 아직 수습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지금까지 충분히 도왔다고 생각해. 어차피 난 장만석에 대한 복수가 목표였으니."
"…여기 남으면 안 돼? 목사님의 경호팀도 전부 해체할 예정이야. 대신 네가 날 지켜줘."
미련이 남는지 혜진이 도훈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