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24화 (1,904/2,000)

1924. 구원회-129-

* * *

죽었나?

급격한 노화로 미라처럼 변해버린 장만석의 주검을 내려다보았다. 도넛처럼 심장 부위만 뻥 뚫린 시체를 보고 있자니, 역겨워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우웁-."

나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손에 남은 잔해물(?)을 불태웠다.

화르륵손에서 피어난 뜨거운 불길에, 바로 전까지 장만석의 몸속에서 펄떡거리던 심장이 검은 잿더미만 남기고 바스러졌다.

"후읍- 후읍-."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토할 것 같아.'

사람을 죽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앞서 몇 번의 경험이 있기도 했고, 현실처럼 정교하게 꾸며진 가상 현실 속에선 수십 명을 일시에 도륙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느낌이 너무나 생소했다.

마치 사람이 아닌 괴물을 죽인 느낌이다.

외계 생명체를 사냥하면 딱 이런 기분이 들려나?

[죄책감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인님은 정의의 여신이 내린 미션을 수행했을 뿐이고, 그는 죽어 마땅한 자였습니다.]

'······.' 갑자기 로시의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신이 내린 미션이라면, 사람을 죽여도 면책이 된다는 뜻일까? 물론 장만석은 사람마저 아니었지만.

'이번엔 확실히 죽은 거겠지?'

[네, 생체반응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습···. 어엇?]

'왜 그래?'

"끄으으!"

심장이 뽑혀 절명했던 장만석의 손가락이 갑자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 사후 경련인 줄 알았으나, 장만석이 배를 깔고 엎드린 상태로 손가락을 이용해 앞으로 기어가는 것이 아닌가?

방금 죽었던 시체가 기어 다니는 모습은 아무리 배짱이 좋은 나라도 살짝 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해서 잠시 주춤하고 있는데, 장만석이 계속 앞으로 기어가더니 겨우 몸을 똑바로 까뒤집었다.

"쿨럭-!"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심장이 뽑힌 생명체가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뱀파이어의 끈질긴 생명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크으, 진혈의 뱀파이어가 바로 눈앞이었는데···."

[주인님. 아무래도 뱀파이어가 가진 특성 때문에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튼 짓을 도모하기 전에 완전히 숨통을 끊어 버리십시오.]

'잠깐. 뭔가 말하려는 것 같은데 들어나 보자고.'

[주인님. 자비심을 보일 필요가 전혀 없는 상대입니다. 심지어 사람도 아닌 괴물이고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방심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그를 죽이고 나서 살짝 후회되는 부분이 있었다.

급박한 나머지 탈주하는 방법을 못 들은 것이다. 혹시나 숨을 거두기 전 장만석이 이에 대해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했다. 로시에게 밝히진 않았으나, 내가 장만석에게 꼭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장만석은 나무 밑둥에 기댄 채 상반신만 겨우 일으켰다. 뻥 뚫린 가슴 부분에서 끊임없이 검은 피가 흘러나왔고, 놈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가 자조적인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담배···. 한 대만 줄 수 있겠나?"

"뭐?"

"죽기 전인데 담배 한대 쯤은 줄 수 있잖아?"

"어이가 없군."

나는 무시할까 하다가, 그래도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하고 인벤토리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담배를 꺼내 손끝으로 불을 붙여 놈에게 건네자 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인벤토리 사용이 무척 능숙하군. 역시 랭커였던가?"

"······."

"아무튼 고맙군. 쿨럭-!"

장만석이 겨우 입에 담배를 물더니 힘겹게 빨았다. 담배를 뿜기 위해 힘을 주자, 구멍난 그의 가슴에서 검은 피가 콸콸 쏟아졌다.

"지나친 흡연은 폐암을 유발한다고."

"크크크. 무척이나 저질스러운 농담이군."

장만석은 이미 생의 의지를 포기한 느낌이었다.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심장이 뽑힌 상태로는 한계인 모양이었다.

"크크···. 내 언젠간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어쩐지 나를 너무 방치한다 싶더라니까···."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장만석."

"착각이라고?"

"넌 탈주한 플레이어라서 나에게 죽는 게 아니야."

"그럼?"

"네놈이 저지른 악행에 대가를 치르는 거지. 수많은 사람들을 혹세무민하고 생명과 재산을 갈취한 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로장생을 누리기 위해 순진한 처녀의 몸을 더럽힌 죄. 그게 네 놈이 죽는 이유다."

"쿨럭쿨럭-! 푸하, 푸하하하!"

장만석이 갑자기 실성한 것처럼 피를 토하며 웃기 시작했다. 이미 그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다만 지금의 모습은 회광 반조라고 불리는, 죽기 직전 신체가 극도로 활성화되는 마지막 순간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다른 건 다 인정해도, 순진한 처녀만큼은 절대 아니었다. 그년들은 스스로의 이익을 따져, 자신의 처녀성을 세일즈 한 것뿐이야. 기왕이면 비싼 값에 팔려고 나 같은 늙은이에게 몸을 대줬달까? 순진하다는 말은 어폐가 있지."

"좆까는 소리 말고. 모든 희생자가 그런 것은 아니잖아? 너를 진짜 신으로 믿고 따르는 여자들도 분명 있었어. 심지어 오늘은 그런 여자들을 네손으로 죽이기까지 했지."

"쿠헉-."

장만석이 한 번 더 피를 뿜었다.

혹시나 그가 아까처럼 혈마법을 쓸까 봐 경계했으나, 그의 몸에선 어떤 마나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을 쓸 여유도 없이, 힘겹게 꺼져가는 생명을 겨우 붙들고 있던 것이다.

"여하튼, 이름모를 플레이어 친구. 나 하나 없앤다고 이 구원회가 사라지진 않는다."

"뭐?"

"구원회는 내가 없이도 스스로 굴러가기 시작했거든. 지난 3년 간 난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상태였다."

"거짓말하고 있군. 네놈의 성수 없이는···."

"아, 성수? 그 문제는 예전에 말끔하게 해결했지."

"해결하다니?"

"너도 플레이어니까 남다른 특기 하나쯤 가지고 있겠지? 내 특기는 연금술이었다. 정액을 이용해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종의 아티팩트 제작자랄까?"

"?"

"그 힘으로 난 복제기를 만들었다. 소량이긴 하지만 똑같은 물질을 복제해내는 물건이지. 그것으로 내 정액을 끊임없이 생산해낼 수 있다."

"뭐라고?"

"물론 그 비밀은 성수를 제조하고 유통하는 유 장로 혼자밖에 몰랐지. 아들 놈이건, 동생 놈이건 절대 알려주고 싶지 않았거든.

내가 없이도 성수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알면, 진작 나를 죽이러 달려 들었을테니."

"다 알고 있었군. 네 가족에게도 진작 버림받았다는 걸."

"버림받았다고? 내가? 놈들에게? 크하하하- 쿨럭- 우욱!"

장만석의 생명력이 점점 꺼져가는지 각혈량이 늘어갔다. 얼굴에 핏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몸속의 피란 피가 구멍을 통해 줄줄 새고 있었다.

"···착각하지 마라. 놈들이 날 죽일까 봐 걱정했던 게 아니라, 나 대신 교회를 굴릴 놈들이 필요해서 지금껏 살려둔 것뿐이니까."

"그런가?"

"네놈이 벌써 둘을 곤죽을 만들어 놨더군."

"그것도 알고 있었군."

"그래. 그때 모든 걸 깨알았지. 네놈이 오늘 밤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쿠에엑-!"

"어이, 죽지 말라고. 탈주는 어떻게 했지?"

"탈주? 그건···. 으, 읍!"

장만석이 갑자기 뻥 뚫린 가슴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하지만 쏟아지는 출혈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제기랄···. 불로장생이 눈앞이었거늘."

장만석이 그 말을 유언으로 남긴 채 툭- 고개를 떨궜다.

이번엔 진짜로 죽어버린 모양이었다.

"허-. 씨발, 감질나게 대답도 안 해주고 뒤졌네."

[주인님, 소란 때문에 사람들이 이리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어서 대피를···.]

로시가 경고하기 전부터 이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처음엔 합숙소에서 벌어진 소란 때문에 그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중 일부가 합숙소 밖으로 튕겨 나간 우리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성가시게 됐군. 장만석의 시체를 어떻게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뱀파이어인 장만석의 시체는 남들이 봐선 곤란할 것 같았다. 심지어 그의 피는 독성이 있어서 그냥 만졌다간 문제가 발생할 게 뻔했다.

[곤란해졌군요. 급한 대로 인벤토리에라도 넣으심이.]

'인벤토리? 거기 사람도 넣을 수 있어?'

[생명체는 원래 불가능하지만, 장만석은 현재 시체니까요.]

'아하. 그렇군.'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장만석의 시체를 억지로 욱여넣었다.

몸집이 컸으면 안 들어갔겠지만, 미라처럼 바짝 쪼그라든 그의 늙은 육신은 비교적 작았기 때문에 인벤토리 안으로 말끔히 사라졌다.

이어 나는 바닥에 뿌려진 놈의 피를 처리하기 위해, 주변을 불태우기로 했다. 곳곳에 나무가 심어진 이곳은 일종의 산책로였는 데, 불에 타기 딱 좋은 재료가 모여있었다.

화르륵손에서 불길을 뿜어 나무에 불을 지른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재빨리 몸을 피했다.

* * *

그날 밤의 소동은 정신없는 혼란 속에서 결국 구혜진 장로의 승리로 끝났다.

경호팀에게 사살당할 뻔했던 혜진은, 이후 출동한 찰리팀과 브라보팀을 이용해 알파 팀장인 림영석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몰아갔다.

장만석의 부재 속에서, 유일하게 그에게 명령을 받은 림영석이 쓰러지자 다른 팀장들은 구혜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 탈북자 출신이라 꺼리던 림영석이라면, 충분히 장만석을 배신할 수 있다고 모함한 구혜진의 이간계가 먹힌 것이었다.

그렇게 경호팀 전체를 지휘하게 된 혜진은, 반대파 숙청을 벌이는 장석개의 잔당들을 소탕하면서 쿠데타의 배후로 아들 석개를 지목했다.

장석개가 담임 목사직을 동생 장만수에게 물려주려는 아버지의 결정에 분노해 경호팀인 림영석을 매수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관련자들이 모두 죽거나 실종된 상황에서, 경호팀의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장로회마저 접수해 버린 구혜진의 수완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도훈이 한 것이라곤 그저, 말을 맞추는 대가로 목숨을 살려준 장만수가 허튼수작을 못 부리도록 그의 옆에서 밀착 경호를 하는 것뿐이었다.

혜진이 장만수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구원회 전체를 장악하는데 걸린 시간을 고작 하루. 몰래 빼돌린 총기를 이용해 반란을 도모했던 장석개의 세력은 모두 잡히거나 사살되었고, 장석개 또한 죽기 직전 겨우 병원으로 실려가 목숨만 부지할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죽거나 다친 사람이 십수명에 이르렀으나, 경찰은 끝내 출동하지 않았다.

마치 구원회 전체가 별도의 독립된 왕국처럼 자치권을 가지고 스스로 해결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는 이제껏 쌓아 올린 정관계 인맥과, 로비로 인한 것이지만.

일련의 사태가 대강 정리되자, 거의 날밤을 샌 혜진은 그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장만석의 저택에서 잠든 혜진을 뒤로하고, 도훈이 몰래 빠져나왔다. 그에게는 아직 처리해야 할 시체가 남아있었다.

'젠장. 이걸 어디에 묻어야 하지? 인벤토리에 시체를 넣어 다닐 순 없는데.'

[혹시 산은 어떻습니까?]

'산? 야산에 암매장을 하자고?'

[음, 암매장이라고 하시니 좀 어폐가 있군요. 사람도 아닌 존재를 묻는 건데요.]

'그냥 확, 불태워 버려? 화장시키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사체를 태우면 냄새와 연기가 많이 발생할 겁니다. 사람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흐음, 그런 곳이라···.'

도훈은 고심 끝에 일전에 백년 산삼을 구했던 지리산을 떠올렸다. 지리산 산장에 기억해낸 도훈이 마법의 문고리를 열고 넘어가자 순식간에 그의 몸이 산장으로 이동했다.

낮 시간이라 그런지 산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 장군이를 처음 따먹었던 것 같은데.'

도훈이 거유 무당 장군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는데, 로시가 채근했다.

[주인님. 여유부릴 때가 아니라 얼른 사람들이 오기 전에 장만 석의 사체를 처리해야 합니다.]

'알았어.' 산장 밖을 나선 도훈은 일부러 등산로 아닌 곳으로 산비탈을 타고 올라갔다. 깎아지듯 급격한 경사 때문에 짐승들도 못 갈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도훈은,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산 속 깊숙이 들어갔다.

'이쯤이면 괜찮겠지?'

[네. 이런 곳이면 제아무리 실력좋은 심마니도 엄두도 못 낼 겁니다.]

사람 하나를 겨우 눕힐만한 공간을 찾은 도훈은 인벤토리에서 장만석의 시체를 끄집어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머리부터 딸려나온 시체는 가슴이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어, 대낮에 보기엔 살짝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다.

'이러니까 내가 무슨 연쇄살인범이라도 된 것 같군. 대낮에 야산에 시체를 처리하러 오다니.'

[살인은 사람을 죽였을 때나 성립하는 말이죠. 장만석은 인간이 아닌 뱀파이업니다.]

'하긴 절대 사람 처럼은 안 보이네.'

미라처럼 쪼그라든 장만석의 시체를 살피던 도훈은 문득 그의 왼팔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어? 왜 근데 애는 팔이 하나가 없지? 안에서 떨어졌나?'

도훈이 손을 집어넣어 인벤토리를 뒤적거렸지만, 딱히 걸리는 건 없었다.

[아까 불태워버리지 않았습니까?]

'불태웠다고 해도 이렇게 깔끔하게 잘려나갈 리 없는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