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22화 (1,902/2,000)

1922. 구원회-127-

* * *

도훈이 여자 합숙소를 수색하기 30분 전.

박쥐로 폴리모프한 장만석은 비상구를 통해 저택안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곳은 아주 작은 생물만 드나들 수 있는 일종의 환풍구였는데, 장만석은 언제 어디서나 박쥐 상태에서 드나들 수 있도록 저택 일부를 적절히 개조해 놓은 상태였다.

마법을 해제하자 박쥐 형태의 장만석의 몸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더니 늙은 장만석으로 되돌아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볼품없는 노인의 모습이 된 장만석은 혼자 서있지도 못할 지경이라 벽을 붙잡고서야 겨우 늙은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끄으···. 구혜진 이것이 어떻게 세뇌에서 풀려난 거지?"

모든 상황을 종합할 때 이번 일의 주동자 중 한 명은 자신의 비서 출신인 구혜진이었다. 하지만 장만석은 절대 그녀가 혼자 이런 큰 일을 벌이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아이는 본래 영특한 아이였지. 머리도 빨리 돌아가고, 목표가 정해지면 수단 방법을 안 가리는 강단있는 성격이었어. 하지만 절대로 혼자서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꾸밀 타입은 아니야. 내가 모르는 조력자가 분명 있어. 그 놈이 누군지 알아내야 겠어.'

장만석은 병약한 몸을 이끌고 지하 벙커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벙커는 핵전쟁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비밀의 장소였는 데, 조심성 많은 장만석이 '한반도 불바다'론을 주창하는 전쟁주의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저택을 설계할 때부터 지하에 구축한 일종의 비밀 요새였다.

성인 한명이서 아무 준비 없이 최소 6개월을 생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벙커에는, 저택 내외 카메라를 통제할 수 있는 관제 시스템 역시 구비 되어있었다. 정확히는 경호실의 영상 시스템이 똑같이 미러링되는 형태였다. 지하에 숨은 상태로 지상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게끔 대비한 것이다.

관제룸으로 향한 장만석은, 혜진이 저택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저택 내부에서 벌였던 일들을 영상을 돌려가며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대적하러 온 존재를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뚱뚱한 여자로 변신한 도훈의 모습이었다.

'플레이어놈이다!'

탈주자를 사냥하는 '헌터' 플레이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장만석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저택 주변에 경호원을 과할 정도로 배치한 것이었으니까.

'이 썩을 놈들. 하필 마지막 의식을 앞둔 마당에 초를 치러 오다니.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싶겠지만, 내가 먼저 파악한 이상 어림없는 일이지.'

모든 상황을 파악한 장만석은, 자신이 신뢰하는 림영석 팀장에게 연락해 구혜진과 그 일당을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림영석은 살짝 당황하는 듯 싶었으나, 명령을 받들겠다고 곧바로 복명했다.

장만석은 동시에 이런 때를 위해 대비한 침소의 환각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침소에 설치된 마법진은, 그가 연금술을 통해 오랜시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함정이었다. 누구든 마법진이 발동된 이후 침소에 들어오면 실제와 전혀 구분되지 않는 환상에 빠지도록 치밀하게 안배해둔 것이었다.

'끄···. 그나저나 아무리 봐도 보통 내기가 아니야. 여장까지해서 나에게 직접 근접해 칼을 꽂을 생각을 하다니. 수법도 대범하고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군. 지금의 나로선 절대 상대하지 못할 거야.'

냉철한 현실인식 속에 장만석은 최대한 빨리 마지막 제물을 구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처녀를 구해오던 구혜진이 적과 내통한 것으로 밝혀진 이상, 스스로 마지막 처녀를 구하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 이때를 위해 준비한 아이템을 꺼내야 겠어.'

장만석이 허공에 손을 집어 넣고 뒤적거렸다. 그의 손이 하늘로 쑥 사라지는 가 싶더니, 갑자기 나침반과 유사한 도구가 딸려 나왔다. 도훈이 사용하는 인벤토리와 비슷했다.

'처녀 탐지기. 되도록 이 물건을 쓰지 않으려고 했건만···.'

처녀 탐지기는 일종의 스카우터였다.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만석이, 1000명의 처녀혈을 섭취해야 하는 미션을 받은 뒤 특별히 제작했다.

처녀 탐지기는 반경 500M 내에 처녀를 검색하는 기계로, 레이더 탐지 장치처럼 녹색의 좌표 평면 위에 처녀의 위치를 점으로 표시해주는 아이템이었다.

긴 바늘이 시계침처럼 한바퀴 돌때마다 반경안에 처녀의 위치가 갱신되었는데, 아쉽게도 저택 주변 500M 내에 발견되는 점은 하나도 없었다.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하녀들 중에 몇명을 처녀를 선발해뒀어야 하는 건데···.'

장만석이 굳이 해당 아이템을 만들어 내고도 사용하지 않았던건 다름이 아니었다. 가만히 침소에만 머무르고 있어도 능력있는 채홍사였던 구혜진이 전국 각지에서 처녀를 공수해 바쳤던 것.

3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매일 빠짐없이 처녀를 데려오는 구혜진 덕에, 장만석은 편하게 미션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길가는 여자를 강제로 범해서라도 처녀혈을 빨아 마셔야 할 판이었다.

'여기선 안 되겠다. 어떻게든, 처녀가 있을 만한 곳으로···.'

지하 벙커는 밑으로 뚫린 땅굴을 통해 저택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있었다. 장만석은 괜히 저택 위로 올라갔다, 도훈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해 지하 통로를 이용해 저택을 빠져 나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기운이 쇠한 몸뚱이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거친 숨을 몰아쉰 장만석은 결국 어쩔 수 없이 각성아이템을 써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쩔 수 없군. 부작용이 너무 심해 안 쓰려고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박하니.'

장만석이 허공에 손을 집어 넣더니 이번엔 손바닥에 파란 알약을 손에 쥐었다.

'활력의 비약. 신체 나이를 수십년 전으로 돌려주는 대신, 생명력을 10% 고갈시키는 미친 약물. 내가 만들었지만 절대 먹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모르핀에 의지했던 것은 자신이 만든 약물에 반대급부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연금술로 빚어진 약물들은 원하는 효과를 주었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도 함께 제공했다. 가령 정액으로 만든 성수는, 너무 많이 들이켜면 복상사를 일으킬 정도로 성욕을 증대시켰다.

혜진에게 몰래 먹였던 세뇌약은 금단 증세가 올 경우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을 선사했다. 그가 만든 활력의 비약도 마찬가지로, 뛰어난 성능 대신 수명을 줄이는극단적인 약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도훈에게 당하겠다는 생각에, 장만석이 망설이지 않고 약물을 꿀꺽 들이켰다.

그 순간 늙어 쪼그라들었던 그의 쭈글쭈글한 피부가 살이 차오르는 것처럼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굽었던 허리가 꼿꼿해지고, 마른 장작처럼 얇은 팔에 근육도 붙었다. 흐리멍덩하던 두뇌 역시 잠에서 막 깬것처럼 개운해졌으며, 무엇보다 시들어 있던 심볼이 꿈틀거릴 정도로 정력이 솟아 올랐다.

젊어진 육체를 보며 장만석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잠깐의 회춘을 위해 수명의 10%를 날리는 희생을 감수했기 때문이었다.

"으으으! 빌어먹을 플레이어 놈! 진혈의 뱀파이어로 거듭나면 네놈을 기필코 찢어 발겨 주마."

수십년은 젊어진 장만석이 지하 통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한 손엔 처녀 탐지기를 들고 점이 나타나는 위치를 계속 살피는 데, 탐지기 끝에서 미약한 반응이 있었다.

장만석이 힐끔 위치를 보니 젊은 신도들을 모아둔 합숙소 방향이었다.

'오오, 그렇구나. 합숙소에도 아직 때가 덜 묻은 파릇파릇한 여신도들이 있겠구나. 그리로 가야겠다.'

장만석은 발걸음에 힘을 주어 지하통로를 내달렸다.

수백미터에 이르는 지하통로의 끝은,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맨홀 뚜껑이었다. 지하통로를 배수 시설과 연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출구를 설정해둔 것이었다.

육중한 맨홀 뚜껑을 맨손으로 밀고 올라온 장만석은, 강인해진 스스로의 힘에 살짝 놀랐다.

'오오, 젊었을 때보다 힘이 훨씬 더 세진 것 같군.'

이는 그가 가진 능력이라기보다, 뱀파이어의 힘 때문이었다. 비록 잡종이긴 했지만 인간에 비하면 월등한 물리력을 과시하는 뱀파이어의 힘이 젊게 변한 육체에 더욱 영향을 미치며 힘을 강하게 만든 것이다.

"오오오! 이런 힘이라니!"

장만석은 환갑이 넘어 뱀파이어가 되었기 때문에 젊은 육신의 뱀파이어의 힘에 대해 처음 실감했다. 병약한 몸으로, 그나마 박쥐로 변신했을 때나 제정신으로 돌아오던 때에 비하면 완전히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으으, 한낱 잡종 뱀파이어가 이럴진대, 진혈의 뱀파이어는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당장, 당장 처녀를!'

혈기가 넘치게된 장만석이 구원회 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막상 합숙소 앞에 선 장만석은 안으로 들어가길 주저했다.

'본원의 합숙소장이 임예령 집사였던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분명 못 알아 볼텐데.'

정문으로 들어가봐야 괜히 시간만 지체할 것이라고 생각한 장만석은 처녀 탐지기를 살피며 처녀의 위치를 확인했다.

'으음, 점이 5개니 대략 5명 정도인가? 500명의 여신도 중에 처녀라곤 1% 뿐이라니.'

스스로 성적으로 문란한 교회를 만들었음에도, 장만석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찰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정확히 어디 있는 거지?'

처녀 탐지기는 수평방향에선 위치가 확인되지만 GPS와 달리 수직방향의 위치가 전혀 제공되지 않았다. 즉, 건물에 들어간 사람의 경우 층고에 상관없이 모두 점이 겹쳐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제기랄. 시간도 없는데 여길 어떻게 다 뒤진다?'

장만석이 난처해하는데 갑자기 머릿속으로 경고음이 울렸다.

<대적자가 마법진을 탈출했습니다.>

'뭐, 뭐라고?'

장만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환각마법진은 그가 만일의 암습을 대비해, 수년간 치밀하게 공들인 함정이었다. 기문둔갑에 일가견이 있다던 제갈량이 되살아나 팔진도를 펼쳐도 그보다는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런 마법진이 불과 10여분도 안돼서 파훼된데 장만석은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어, 어찌된 일이야? 놈이 어떻게 거길 빠져나왔지?'

심지어 그곳에 있던 환영은, 자신의 인격을 복사해 놓았기 때문에 절대 가짜라고 의심할 수 없었다.

'젠장. 대단한 헌터가 나를 잡으러 왔구나. 랭커인가? 하지만 지금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구원회는 단일 교회치고는 지나치게 광활했다.

땅값이 비싼 강남 한복판에 대한민국 최대 크기의 교회를 세운 장만석은, 이를 다행으로 여겼다.

'크크크. 제 아무리 플레이어 놈이라고 하더라도 총기를 소지한 경호팀을 상대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구혜진까지 인질로 붙잡고 있으니 더더욱 시간이 지체되겠지. 이럴 시간이 없군. 나도 어서 빨리 의식을 마무리해야지.'

장만석은 불꺼진 여자 합숙소의 건물 외벽을 손으로 붙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돌출된 구조물을 지렛대 삼아 외벽을 타는 그는 흡사 스파이더맨처럼 신출귀몰했다.

'흐흐흐. 무슨 수로 마법진을 빠져나왔는지 모르지만, 거기까지다. 난 이제 진혈의 뱀파이어가 될테니까.'

외벽을 타고 3층 복도로 침투한 장만석이 처녀탐지기에 표시된 위치를 따라 여자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만약 상대가 찾는 처녀가 아니면 죽인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장만석이 3층을 들쑤시고 있을 때 도훈은 벌써 합숙소방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장만석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인 것이었다.

3층에서 별다른 소득을 못 거둔 장만석은 이제 계단을 따라 4층으로 올라갔다. 탐지기의 신호가 유독 강하게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분명 4층 어딘가에 처녀가 있을 것 같았다.

'느낌이 온다. 분명 여기에 내가 찾던 처녀가 있어.'

어둠을 이용해 몸을 숨긴 장만석이 421호 문 손잡이를 붙잡았다.

여자 합숙소다 보니 대부분 방이 잠금 상태로 있었지만, 젊어진 장만석은 강제로 문고리를 부수며 안으로 들어갔다. 비좁은 2층침대에 두명의 여학생이 곤히 잠들어있었다.

장만석은 코를 킁킁거리며 1층 침대에 있는 여자를 확인했다.

그 순간 소리에 잠을 깬 여자가 눈을 뜨자 장만석이 손바닥으로 입술을 틀어 막았다.

"흐읍!"

"쉿-! 소리치지 않으면 죽이진 않겠다. 알아먹었으면 대답해."

겁에 질린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장만석이 살짝 손을 떼고 물었다.

"너는 처녀인가?"

"누, 누구세요···."

"처녀냐고 물었다. 나는 두번 묻지 않는다."

장만석이 위협적으로 손톱을 길게 뽑아 들었다.

3층에서 벌써 몇 명을 죽인터라 그의 손 전체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무시무시한 괴한의 등장에 놀란 여자가 비명을 지르려고 하자 장만석의 날카로운 손톱이 사정없이 여자의 목을 찔렀다.

푹-!

성대를 찔린 여자가 비명도 못 지르고 입가에 피만 울컥 뿜어댔다.

"흐음, 이 아이가 아니면 2층 침대에 누운 아이인가?"

장만석이 사다리를 밟고 2층 침대에 누운 여자에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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