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21화 (1,901/2,000)

1921. 구원회-126-

무시무시한 돌무더기 수백조각이 칼날처럼 날아들었지만 도훈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현자로 변신한 도훈은 지금의 상황이 상상속이라는 걸 완벽히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주, 주인님 안 피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혹시나 주인님이 틀렸으면···.]

'내가 틀려? 웃기는 소리.'

곧이어 장만석의 염력에 이끌린 뾰족한 돌조각이 도훈의 몸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도훈의 몸에 생채기가 나고 피가 튀었지만, 여전히 도훈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뚜벅뚜벅 입구를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주인님! 아무래도 환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온 몸에 상처가!]

'정신차려, 로시. 이건 그냥 특수효과일 뿐이야.'

[특수효과라고요?]

'내 시야에 혼란을 줘서 착시를 일으키는 것 뿐이야. 실제 내 몸에는 아무 충격도 없다고. 못 믿겠으면 스캔이라도 해보든지.' 도훈의 말에 로시가 빠르게 도훈의 신체를 스캔했다.

[저, 정말이군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말했잖아. 이 모든 게 환상일 뿐이야. 비유하면 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과 똑같이 보이는 VR기기를 머리에 씌운 거야. 얼굴에 쓰는 헬멧 알지?'

[네. HMD(Head Mounted Display) 말씀이시군요.]

'그걸 쓴채로 세상을 보면, 정말로 내가 그 세상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거든. 총알이 날아들고, 칼날이 머리위로 떨어지면 진짜로 죽을 것 같은 공포심을 느끼지. 허상이란 걸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드는 거야. 인간은 시각과 청각을 지배당하면 현실을 왜곡해서 보기 마련이니까. 장만석의 환상이 바로 그런 종류야.'

[아아!]

'하지만 실제 그것은 물리적으로 어떤 타격도 주지 못해. 말 그대로 환상이니까.'

[세상에! 대체 어떤 환각 마법이 이렇게 정교하죠?]

'그게 장만석의 능력이겠지. 세상에 없는 물건을 정교하게 조형 해내는 능력. 어찌보면 사기적인 스킬이라고 봐야지.'

돌무더기를 두들겨 맞으며 입구로 다가간 도훈은 상처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장만석을 뒤돌아보며 말했다.

"발악은 거기까지야, 장만석. 난 이제부터 네 놈의 본체를 찾으러 가마."

"푸하하하! 네 꼴을 보고도 그런 허세가 나오느냐?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환각이 꽤 정교하긴 했지만, 천재인 내 눈을 속이진 못 해. 이 공간을 벗어나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히 돌아올 것 같은데?"

"네, 네놈이!"

"한 가지 더 말해줄까? 장만석 넌, 내 손에 잡히면 진짜로 죽어."

도훈이 침소를 벗어나려고 하자 장만석이 미친듯이 울부짖었다.

"아, 안돼!!! 나가지 마!"

"나름 재밌었어. VR체험존 차렸으면 돈 좀 벌었을텐데."

도훈이 휘장을 젖히고 침소를 나가자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상처입었던 피부도 생채기 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다만 스스로 태워버린 옷은 실제였기 때문에 여전히 팬티만 입은 차림이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출입구를 벗어나면 환상이 풀린다는 사실을요?]

'뻔하지. 이런 정교한 마법이라면 바운더리가 정해져있을 거라고 추측했어. 현실 고증이 지나친 만큼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에서만 실행할 수 있다는 뜻이야. 그게 바로 장만석의 침소였고.'

도훈은 곧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옷을 꺼내 걸쳤다. 아무리 추위를 못 느끼는 그라도,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기는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잠시만요. 그럼 장만석을 만나러 갔던 구혜진양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혹시 장만석에게 인질로 붙잡혔을까요?]

'장만석은 애초에 이곳으로 돌아온 적도 없을 걸. 아니, 왔다고 해도 우릴 붙잡아줄 함정을 파놓고 진즉 떠났겠지. 시간이 촉박한건 그놈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아까 구혜진양이 주인님 폰으로 전화를 걸지 않았습니까?]

'이미 그때 혜진이는 놈들에게 붙잡혔을 거야. 전화를 건 목소리만 혜진이었지.'

[그럼 대체 누가···.]

"뭐야? 저 놈 언제 다시 나왔지?"

침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단의 용병들은 도훈을 발견하더니 곧바로 총구를 겨누었다.

[경호팀이군요! 장만석의 수하들!]

도훈은 총을 겨누는 용병들을 보고도 조금도 겁먹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유를 부리며 맨 앞의 사내에게 물었다.

"구혜진은 어디에 있지?"

"What?"

"야, 그냥 갈겨. 팀장님이 저 놈 나오면 바로 사살하랬어!"

문답을 나눌 틈도 없이 드르륵, 총구가 불을 뿜었다. 하지만 도훈이 무영보를 밟으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3갑자로 늘어난 내공은 경공술에도 영향을 미쳐, 그의 신형이 무공의 이름처럼 그림자도 안 보이게끔 만들었다.

"Clear?"

"없어졌다!"

"대체 어디 간거야?"

마치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것처럼 튀어나온 도훈이 순식간에 소총의 총열을 잡더니 가볍게 U자로 구부렸다.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총구가 스스로를 향하게 된 용병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미, 미친!"

"What the···! 컥!"

도훈의 신형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바람처럼 스쳐간 자리에서 있던 용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픽픽 쓰러질 뿐이었다.

[살수를 펼치지 않으시는군요.]

'어차피 내 주먹은 모닝스타야.'

[모닝 스타라뇨?]

'한 대만 처맞아도 내일 아침에야 겨우 눈을 뜬다는 소리지.'

순식간에 용병 무리를 정리한 도훈이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예상대로 그곳엔 장만석의 심복 림영석 소좌가 혜진을 인질로 붙잡은 채 권총을 머리에 겨누고 있었다.

"한 발짝만 더 움직여 보라우. 내래 이 배신자 동무의 머리통을 ···. 컥!"

림 영석은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등뒤에 나타난 도훈이 뒷덜미를 수도로 내리쳐 기절시킨 것이었다. 조금만 더 힘을 세게 주었으면 경추가 부러져 즉사할 수 있는 위력이었다.

"간나 새끼, 말 존나 많네."

"미, 민용아!"

인질로 붙잡혀 있던 혜진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도훈에게 안기려 들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표하는 감사의 포옹이었지만, 현자타임 스킬을 사용 중인 도훈에게는 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 역하게 느껴졌다.

"워-. 감사 인사는 나중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옷은 언제 또 갈아 입었어?"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 일단 넌 최대한 안전한 장소에 대피해 있어. 우리 계획을 미리 알아챈 장만석이, 경호팀에 우릴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 같아."

"사, 사살이라니?"

"그냥 듣기만 해. 난 이제부터 장만석을 찾으러 갈 거야. 놈이 1000번째 처녀를 구해서 의식을 완성하기 전에 저지해야 해."

"무,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어. 목사님의 침소로 올라갔더니, 갑자기 대기하고 있던 림 팀장이···."

"설명할 필요 없다니까? 다 알고 있으니까. 넌 그냥 내 말대로만 해. 알았지? 정리되면 내가 연락할게."

혜진을 구출해낸 도훈은 난데없이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늦게 놀란 혜진이 비명을 질렀다.

"꺅! 민용아 거기 2층···."

쨍그랑!

미처 말릴새도 없이 창문을 깨고 튀어나간 도훈이 빠르게 합숙소를 향해 내달렸다. 놀란 혜진이 깨진 창가에 위태롭게 몸을 기대어 밖을 내다보았으나, 이미 도훈은 점처럼 작아진 이후였다.

"···이라고 말해주려고 했는데, 벌써 사라져 버렸네? 대, 대체 저 애는 어떻게 된···."

혜진은 도훈이 비범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방금 자신을 구할 때 순간적으로 모습이 흐릿해 진 뒤 림 영석의 등뒤에 나타난 장면만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움직임이었다.

'하아,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르겠어. 다만 확실한 건 민용이 말대로라면 경호팀이 더 이상 내 편이 아니라는 거야.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겠어.'

혜진은 저택의 구조를 빠삭하게 아는 점을 이용해 재빨리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총소리가 들린 이후라 그런지 저택 밖에 있던 경호팀이 안으로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이미 구원회의 구조를 모두 파악한 도훈은 초인적인 스피드로 합숙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강화된 내공에서 선보이는 경공은 어찌나 빠른지, 과장하면 배기량 높은 오토바이에 필적하는 속도였다.

[주인님. 이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나도 알아. 조금만 지체하면 장만석이 진혈의 뱀파이어 각성에 성공할 거야.'

[그게 아니라 현자 타임 스킬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뭐라고?'

[장만석과 조우할 당시에 현자 도훈이 아닐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흠, 어쩔 수 없지. 이 빡대가리 새끼를 믿는 수밖에. 그래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더라고. 내가 등장하기도 전에 환각을 깨달을 정도면.'

[나름 지능이 올라갔거든요.]

'그래봐야 도토리 키재기지. 97이나 110이나 누가 병신이고 누가 머저리냐의 싸움 아닌가?'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너도 닥치고, 장만석이 있을 만한 곳이나 수색해봐.' 빠른 속도로 합숙소 쌍둥이 건물 앞에 선 도훈은 여자 기숙사를 주목했다. 이미 야간 점호가 끝난 시간이었기 때문에 여자 기숙사동은 모두 소등한 상황이었다.

[합숙소내에 여자 기숙사생만 500여명이 넘습니다. 저중에서 어찌···.]

'그러니까 머릴 써야지. 맨 위층은 일단 배제야. 거긴 짬찬 수호천사밖에 없으니, 처녀가 있을리 없거든.'

[그렇다고 해도 남은 방이 너무 많습니다.]

'장만석도 시간이 없으니 확실히 처녀가 있는 곳을 찾으려 들거야. 하지만 구원회 합숙소에 사는 여신도 중에서 과연 처녀가 몇이나 있을까?' 현자타임이 끝나가는 도훈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마빡에 처녀라고 써놓고 다니는 여자는 없을테니, 장만석도 분명 타킷을 빠르게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역시 나이가 어리고, 가장 최근에 들어온 합숙소생 위주로 확인해야 겠군.'

[네?]

'합숙소장을 만나야 겠어.'

도훈이 합숙소 정문을 거칠게 두들기자, 관장실에 있던 임예령이 무슨 일인가 하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밖에 서있는 도훈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 아니 이 시각에 대놓고 정문으로 들어오면···."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나간 임 집사가 급하게 합숙소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얼른 들어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여자 합숙소생 명단 있지."

"으, 응?"

어둠 속에서 도훈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예령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너, 너 누구야?"

"누구긴. 내 얼굴 벌써 까먹었어?"

"아니 얼굴이 좀···."

현재 도훈의 얼굴은 역용술이 상당히 풀리면서 본래의 얼굴이 반쯤 드러났기 때문에 임집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기억과 똑같았지만, 얼굴도 달라지고 체격도 훨씬 커진 느낌이었다.

'미, 민용이가 이렇게 생겼었나?'

하지만 도훈의 얼굴이 드러날수록 더 잘생겨졌기 때문에 임 예령도 딱히 달라진 모습에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너무 짧은 시간동안만 도훈을 봤기 때문에 자신의 기억이 왜곡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합숙소생 명단은 갑자기 왜?"

"얼른 줘. 확인할 게 있으니까."

"아니, 새벽에 갑자기 처들어와서는···."

"당신, 권 권사한테 복수하고 싶다고 했지?"

"그,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면 잔말 말고 얼른 명단이나 줘. 시간이 별로 없어."

도훈의 강압적인 태도에 임 집사는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듯한 박력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의 취향을 저격하며 밑이 축축해 지기 시작했다.

'아아, 박력 쩔어.'

그녀는 이미 도훈의 대물맛을 봤기 때문에, 감히 그의 심기를 거스를 생각을 못하고 곧바로 합숙소생 명단이 적힌 파일을 열어 모니터 화면에 띄웠다.

"여, 여기···."

"엑셀 파일인가?"

"으, 응."

"나이 순으로 정렬 가능하지?"

"잠시만···."

임 집사가 서툰 솜씨로 필터링을 하려고 하는데, 도훈이 갑자기 그녀를 밀치며 의자를 빼앗았다.

"내가 직접 할게."

순식간에 엑셀 파일의 열과 행을 파악한 도훈이 빠른 속도로 모니터 화면을 훑기 시작했다.

'나이가 어린 순, 그리고 최근에 입주한 순으로.'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는 도훈의 솜씨에 이를 지켜보던 예령은 물론, 로시 역시 놀라서 물었다.

[주인님이 이렇게 컴퓨터에 능숙하신 지 몰랐습니다.]

'장난해? 느려 터진 컴퓨터라 속이 터지겠구먼.'

두회 회전이 몇배로 빨라진 도훈에게 컴퓨터의 처리 속도마저 느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두뇌를 오버클럭했을 때 가장 차이나는 점은, 세상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간다는 사실이었다.

빠르게 검색을 마친 도훈은, 새 입주생들이 주로 4,5층에 배치된 걸 확인하고 빠르게 눈으로 나이어린 합숙소생들의 방을 기억했다.

'대략 6개군. 저 중에 처녀가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아. 장만석은 아마 거기로 향했을 거야.'

[근데 장만석이 합숙소생 명단을 확인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주인님처럼 처녀가 있는 방을 찾을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놈은 전직 연금술사야. 필요하면 처녀를 찾는 물건을 만들어 낼수도 있을 거야.'

[아차!]

'젠장, 시간이 진짜 없군. 바로 올라간다.'

도훈이 임 집사를 향해 말했다.

"위에서 소동이 있을거야. 금방 끝낼테니까, 다른 합숙소생들이 동요되지 않도록 잘 통제해."

"자, 잠깐만. 뭐하려고? 설마 이 시간에 여자 합숙소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떡이 나올테니까."

도훈이 시건방진 표정으로 임 예령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한참 나이어린 도훈에게 애취급을 당하는데도, 그의 박력에 뻑이 간 예령은 얼굴을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으, 응."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