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20화 (1,900/2,000)

1920. 구원회-125-

[주인님! 무시하십시오. 주인님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수작일 뿐입니다.]

'잠깐.'

[듣고 있을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차라리···.]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네?]

'뭔가 수상하지 않아?'

[수상하다고요? 뭐가 수상하다는 말씀이신지.]

'왜, 장만석 쪽에서 날 공격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거지?'

[그게 무슨 뜻인가요? 방금 전에도 주인님이 날린 카드로 반격을 했었는데요? 벽을 부술만큼 강력한 위력을 선보이면서요,]

'그 부분이 제일 수상하다고.'

[예?]

'들어올 때 봤지? 저택 바깥으로 경호팀 스무명이 순찰을 돌고 있었어. 필요하면 저택에 들어와서 수색을 할 정도로 삼엄하게.'

[그건 그렇죠.]

'근데 아까 내가 사자후를 일갈했을 때도 그렇고, 카드로 인해 벽이 붕괴될 만큼 큰 소음이 났는데도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잖아.

이게 안 들렸다고? 말이 돼?'

[···엇?!]

도훈은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처음 장만석의 침소에 들어왔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것은 장만석의 전음이 천장이고 바닥을 종잡을 수 없게 들려온다는 점이었다. 마치 장만석의 몸속에 들어온 것처럼, 방 전체가 장만석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장만석이었다면, 진즉 나를 죽였을 거야. 탈주자를 잡는 헌터가 회유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닐텐데, 자신의 목숨을 끊으러 온 암살자와 한가하게 대화나 나눈다? 그게 상식적으로 맞는 거야?'

[듣고 보니 뭔가 수상하긴 수상합니다.]

'분명 꿍꿍이가 있어. 지금부터 그걸 파헤쳐 보겠어.'

"플레이어를 탈주한 이유라고? 사이비 교주가 되기 위해서 아니었나?"

"하하! 역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구나.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

"웃기고 있네. 내가 뭘 모른다는 거지?"

"잘 들어라. 너는 플레이어가 어떤 존재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도훈은 겉으로는 장만석과 대화를 나누는 척 하면서 속으로 빠르게 로시와 대화를 이어갔다.

[무슨 꿍꿍이요?]

'내 결론은 장만석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야.'

[시간을 끈다고요?]

'진혈의 뱀파이어로 각성하는데 성공한 장만석이라면, 절대 내 사정을 봐줄 필요가 없어. 그렇잖아. 뭣하러 나를 살려두겠어? 내가 명백한 살해의도를 드러냈는데. 하지만 놈의 공격은 아직 나에게 어떠한 부상도 입히지 못 했어.'

[왜 그러는 거죠?]

'한 가지 유력한 가정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장만석이 정말로 실재하냐는 거야.'

[설마 환각이라고요?]

'···어쩌면. 아니 높은 확률로.' 도훈은 장만석이 일부러 플레이어를 탈주한 이야기를 꺼내며 시간을 끄는 모습에 점점 의심을 품었다. 로시가 곧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주인님이 보고 있는 장면은 저도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환상일 수 있죠? 저는 인간이 아닌데요?]

'바로 그게 문제야.'

[네?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요?]

'아니. 로시 너는 나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잖아. 그러니 내가 정말로 정교한 환각을 보고 있다면, 너 역시 같은 환각을 볼 수 밖에 없다는 거야.'

[아!]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내가 언제 어떻게 환각에 걸렸냐는 거야. 난 분명 구혜진의 연락을 받고나서···. 어? 그러고 보니 구혜진은 어딨지?'

[앗, 혜진양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로 사라졌을 까요?]

'감쪽같이 사라진 게 아니면, 처음부터 여기 없었다는 뜻일 수도.'

[그럼, 그 전화는 대체···.]

'장만석이 구혜진의 전화를 뺏어 목소리를 흉내냈을 수도 있지.

내가 아이템을 통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모방하듯이.'

[아, 플레이어 출신이었죠.]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건 저택에서 일하는 평범한 하녀였어.

그리고 하녀를 따라 이곳에 들어왔고···. 설마, 그때인가?'

[네? 뭔가 짚이는 게 있으십니까?]

도훈은 갑자기 침소를 들어올 때 손으로 휘장을 열어 젖혔던 기억을 떠올렸다.

'장만석은 연금술사라고 했지?'

[네. 아까 본인이 말한대로면, 정액을 이용해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연금술사가 분명합니다.]

'만약 장만석이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약을 제작해 에어로졸 형태로 공기 중에 분사시켰더라면?'

[그렇다고 해도 주인님의 예민한 후각에 걸리지 않았을까요?]

'무색 무취 무미가 가능하게 제작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이켰을 수 있겠지. 놈이 정말로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세상에. 그럼, 설마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전부 환상이라는 건가요?]

'···어쩌면. 그래야 모든게 납득이 되거든. 구혜진이 이곳에 없다는 것도, 크나큰 소란이 일어났는데 경호팀이 꿈쩍도 안하는 것도. 결정적으로 놈이 이제껏 나에게 한번도 제대로 공격을 안했던 것도.'

[듣고보니 확실히 수상합니다. 그렇다면 왜 장만석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지. 놈이 아직 진혈의 뱀파이어가 되지 못 했다는 거.'

[이럴수가!]

"···플레이어란 일종의 아바타다."

"아바타?"

"그래. 화신이라고도 불리는 아바타. 신들은, 위에서 방송을 보듯 우릴 관찰하고 있지. 자기들끼리 미션의 성공 여부에 내기를 걸기도 하고, 후원금이란 명목으로 포인트나 아이템을 주기도 한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모르겠나? 플레이어란 단지 신들의 유희를 위한 장난감이나다름 없다는 소리다. 마치 게임속 캐릭터에게 아이템을 주고 현질을 하듯, 신들은 우릴 조작하고 관찰하며 대리만족을 즐기는 것일 뿐."

"그게 무슨···."

"너도 플레이어 생활을 해봤으면 알지 않느냐? 미션이나 업적을 클리어하는 것이 게임에서 퀘스트를 깨는 것과 비슷하다는 걸? 아이템이나 경험치를 주는 보상 시스템까지 완벽하게 게임을 닮아있지."

[주인님. 절대 현혹되지 마십시오. 모두 개소립니다.]

'알아서 걸러듣고 있어. 단지 이게 정말로 환상이라면, 너무 감쪽같아서 도저히 파훼하는 법을 모르겠다는 거야.'

[장만석을 몰래 기습하는 것은요?]

'내 가정대로면 여긴 장만석이 만든 환상 속이야. 이곳에서 장만석은 절대 죽지 않겠지. 아까처럼 돌풍으로 변해서 순간이동해 버릴거야.'

[그렇군요. 절대 죽일 수 없는 존재라니.]

'대신 장만석 또한 물리적으론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할 수 없지. 그래서 나를 털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있는 거야.'

[아까 카드에 반격당해 머리카락을 잘리고, 벽을 부순 것은요?]

'환상이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아!]

'놈은 마지막 1000번째 처녀를 찾아 의식을 완성할때까지 나를 붙잡아두려는 속셈인것 같아. 그래서 불필요한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끄는 거겠지.'

[그럼 장만석의 본체는 이곳에 없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아마도. 놈이 자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30분 넘게 시간을 지체한 것도 어쩌면 이 작전을 꾸미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을수도 있어.'

[세상에. 하지만 주인님의 가정이 모두 맞다고 해도 한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뭐지?'

[장만석은 무슨 수로 주인님의 암습을 알아챘을까요?

'그야 모르지. 다만 확실한 건 놈이 잠적해 있는 동안, 우리의 작전이 새어나갔다고 보는 수밖에.'

[이번 작전은 구혜진과 주인님만 알고 있었는데요? 주인님이 아니면 구혜진양 밖에 없지 않습니까?]

'정말로 모르겠어.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놈의 계획대로 시간이 계속 끌었다간, 진짜로 진혈의 뱀파이어 변신에 성공한 장만석이 우릴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체스판의 말 같은 존재라는 건가?"

"체스판의 말이나 되면 다행이지. 플레이어는 일종의 광대나 마찬가지야. 자유 의지라곤 하나도 없이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

"개소리 마! 난 신들의 명령에만 따르는 사람이 아니야!"

"네 놈의 자유의지라고 생각했던 것도 결국은 신들의 농간에 놀아난 것은 아니고?"

"···뭐라고?"

"자유 의지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미션이나 업적에 엄청난 보상을 걸면서 해당 방향으로 향하게끔 유도하는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말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나는 마침내 신과 결별했지."

"탈주를 했다는 뜻인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족쇄를 무슨 수로 풀었는데?"

도훈은 장만석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했지만, 그에게 놀아난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어리숙한 척 물었다.

동시에 그가 정말로 궁금한 부분을 로시의 의심을 피해 자연스럽게 물어 볼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척 하면서, 정말로 듣고 싶었던 비밀을 듣는 것이다.

"후후. 탈주를 위해선 목숨을 걸어야 한다. 나는 운이 좋았을뿐."

"운이 좋았다고?"

"플레이어의 비밀을 깨달은 이가 이제껏 나밖에 없진 않았겠지. 수많은 플레이어가 그걸 깨닫고 족쇄를 풀려고 했지만, 대부 분 실패했지."

"흐음."

"탈주자를 잡으러 다니는 헌터 플레이어가, 탈주 방법을 궁금해 하다니 의외구나."

"당연히 탈주 방법을 알아야, 다음에 탈주하려는 플레이어를 잡기 쉬우니까."

"흐흐. 어차피 내 탈주방법을 알아봐야 다른 플레이어에겐 쓸모 없을 것이다. 연금술사라는 나의 직업 때문이었으니까."

[주인님. 계속 시간을 끌면 안 됩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장만석은 마지막 의식을 완성하기 위해 처녀를 찾고 있을 겁니다.]

'젠장. 저택에 다른 처녀는 없겠지?'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이 워낙 많아서···.]

'아니야. 저택 안은 아닐 거야.'

[어떻게 그렇게 단정하십니까?]

'저택에서 일하는 여자들은 대부분 구원회 내에서도 선발된 인원들이었어. 즉, 수호천사 이상으로 충성심과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이라는 거지. 그리고 구원회에서 계급이 높은 여자들이 처녀일확률은···.'

[거의 없군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저택 안에 처녀가 없다면, 교회 내에서 처녀가 있을 가장 높은 확률은···.'

[합숙소!]

'그렇구나. 그럼 장만석은 환각에 빠뜨리고 제물로 삼을 처녀를 찾아 여자 합숙소로 갔을 확률이 가장 높겠군.'

[하지만 이 환상을 어떻게 벗어나려고요?]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주인님이 직접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면, 결국 스킬의 도움을 받아야 겠군요.]

'스킬의 도움이라고?'

[지금은 똑똑한 주인님이 필요할 때입니다.]

'똑똑한···. 설마 현자타임을 쓰겠다는 거야?'

[현자는 모든 답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 지금은 후유증 같은 걸 신경쓸 때가 아니군. 바로 실행시켜.'

[환상속이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도훈은 장만석과 대화를 나누는 척 하면서 몰래 스킬을 발동시켰다.

현자 타임 스킬이 발동되자 그의 머리가 순식간에 팽팽 돌기시작했다.

"오오옷!"

"뭐, 뭐냐?"

현자가 된 도훈은 갑자기 대화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치 낯선 공간에 처음 들어 온 것처럼 이곳저곳 주변을 살피더니 불쑥 바닥에 떨어진 벽의 잔해를 손에 들었다.

"···무게가 없군."

"뭐, 뭣이?"

"신기하네. 돌덩이에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니. 마치 환상속에 들어온 것처럼 말이야."

"무슨 헛소릴 하는 거냐! 당장 목숨을 끊어주마."

"해봐."

"읏!"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네놈이 정말로 진혈의 뱀파이어가 되었다면 나로선 대적할 방법이 없어. 그러니 결국 네 손에 죽겠지. 근데 만약 이게 현실이 아니라면, 네놈은 날 죽일 방법이 없겠지. 결국 결과는 정해져있으니 한번 도박을 걸어봐야겠어."

갑자기 말이 빨라진 도훈이 아까와 다른 냉철한 눈으로 장만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니 날 죽여봐. 할 수 있으면."

현자가 된 도훈은 장만석을 무시하고 등을 돌려 입구로 걸어나갔다.

당황한 장만석이 돌풍으로 변해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감히 어딜 도망가려고!"

"입 털지 말고 죽여보라니까?"

"으. 으으! 네 놈이 죽으려고 발광을 하는 구나!"

장만석이 갑자기 손짓하자 바닥에 떨어진 돌부스러기 잔해들이 사방에서 떠올랐다. 하지만 현자가 된 도훈은 특유의 냉철한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돌로 무슨 타격을 주겠다고?"

"뭐, 뭣이?"

"멍청하긴. 힘은 질량과 가속도의 곱이야. 즉, 질량이 없는 물질은 아무런 에너지도 품을 수 없거든."

"으아아아앗!"

광분한 장만석이 염력을 발휘해 도훈을 향해 수백조각의 돌덩이를 일제히 날렸다. 도훈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시하고 입구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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